소설리스트

038. 거래를 하자(4) (38/400)

038. 거래를 하자(4)2019.05.11.

16553195982497.jpg

  명나라 대도독의 아주 먼, 팔촌보다도 더 먼 친척이 연 정사중도의 무림방파로 실력이 뛰어나다기보다는 대도독과의 친분을 팔아 하남 근처의 고을 여러 개를 반경에 둔 중견 문파였다. 애초에 탄생 자체가 누군가의 후광을 등에 업고 문을 연 문파이다보니 규율이 엄정하게 서 있을 리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말만 문파였지 하는 행동을 보면 그냥 규모가 큰 파락호 집단에 불과했다. 자릿세라면서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받고, 통행세도 받았으며 무료로 객잔이나 여러 시설을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런 놈들이 만우와 맞부딪친 것은 필연이었다. 통행세를 못 내겠다는 만우와 철혈문이 부딪쳤고 당연히 산산조각이 난 쪽은 철혈문이었다. 쭉정이들만 모아놓은 문파에서 만우의 일검을 제대로 받아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대도독의 먼 친척이라는 이름값 답게 그 철혈문주라는 놈이 만우를 암살해 달라는 의뢰를 무려 살막에 집어넣은 것이다.

16553195982502.png‘미친놈들.’

살막은 살행의 기본 의뢰금이 금 천 냥부터 시작한다. 금 천 냥이면 북경 시내에 커다란 저택을 사고 매일 밤 기루의 최고 기녀들을 불러 놀아도 1년은 놀 수 있는 금액이었다. 어쨌든 살막의 살수들은 만우에게 된통 깨졌고, 그 이후로 살막은 화경지경에 든 무림십좌를 대상으로는 의뢰를 받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살막의 살수들의 기예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 기예가 통하는 것은 초절정까지라는 것을 만우를 통해 처음 경험한 것이다. 그 누구도 화경지경의 고수의 살행을 해본 적이 없던 살막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야 큰 교훈을 얻었다.

16553195982502.png‘그 덕에 지금까지 잘 살아 있으니까.’

사람은 겸손함을 배워야 오래 살 수 있다. 무인은 특히 그랬다. 자기 자신이 무적이라고 생각하며 살다가는 비명횡사하기 딱 좋은 곳이 바로 무림이다.

16553195982511.png“어쨌든, 한양에서 염왕채를 하는 놈들은 검계 딱 그 놈들뿐이야.”

16553195982502.png“어째서? 돈이 될 텐데?”

고리대금은 엄청난 돈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자가 있을 법도 하건만 검계라는 곳이 한양의 뒷골목을 꽉 붙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16553195982511.png“잔인하고 지독한 놈들이라고 했잖아. 무료부장도 죽인 놈들이야. 자기네 식구 구하겠다고.”

무료부장은 녹봉을 받지 않고 포도청에서 근무하는 무관들을 뜻한다. 대신 그들은 못 받은 녹봉을 그만큼 백성들로부터 받아냈기 때문에 그다지 평이 좋지 않은 이들이었다.

16553195982502.png“그래? 의리가 있는 게 아니라?”

포도청의 군사들이야 검계를 악독한 놈들이라면서 열심히 씹고 뜯을 테지만 무림에서 온 만우가 보기에는 의리가 있는 놈들이었다. 사실 무림방파란 곳도 결국엔 그런 주먹을 쓰는 놈들 중 의리 있는 놈들이 모여 만든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소림이니, 무당이니, 사파니 마교니 하면서 서로들 떠받들기에 정신없는 곳이 바로 중원이었다.

16553195982511.png“그건 의리가 아니야. 자신들의 의리를 챙기자고 사람들의 고혈을 그렇게 빨아먹는다고?”

방매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만우를 째려봤다.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만우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들어보였다.

16553195982511.png“여기야.”

방매는 퀘퀘한 냄새가 나는 종로 뒷골목에 들어서자 한 발짝 뒤로 스윽하고 빠졌다. 만우는 그런 방매를 힐끗 보고서는 피식 웃었다.

16553195982502.png“어지간히도 무서운 모양이다?”

16553195982511.png“그럼. 넌 여기가 안 무서워?”

확실히 바로 옆에 있는 저잣거리와는 달리 분위기 자체가 음산했다. 하지만 그것 낮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밤이 되면 이 거리는 홍등이 빼곡하게 들어차고, 지금은 죽은 듯 고요한 이 골목이 기생들이 뜯는 악기의 소리와 남녀의 교성으로 빼곡하게 들어찰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 거리 어딘가에, 검계 놈들이 있었다.

16553195982502.png“안 무서워.”

그 흉악한 마인(魔人)들이 득시글거린다는 마교에도 두 발로 들어가 멀쩡히 걸어 나온 만우다. 그의 배 밖으로 튀어나온 간은 지금까지 큰 코를 다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6553195982511.png“흐으. 어쨌든 난 무서워. 이만 갈래.”

방매는 소름이 우수수 돋은 팔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 때 만우가 손을 뻗어 방매의 앞을 가로막았다.

16553195982511.png“왜, 왜?”

방매가 당황해하며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곱상하게 생긴 방매의 얼굴을 보고는 쯧하고 혀를 찼다.

16553195982502.png“지금 혼자 가면 후회할걸?”

만우는 코를 킁킁거렸다. 이 퀘퀘한 냄새의 정체를 만우는 잘 알고 있었다.

16553195982502.png‘아편. 침쟁이들로 가득한 곳이구나.’

고통을 잊게 해주고 극락을 선사한다 하여 극락약(極樂藥), 혹은 검은약, 감은약 따위로 부르는 아편의 냄새가 맡아졌다.

16553195982502.png‘저것 때문에 인생 말아먹은 무인 여럿이었지.’

아편이 얼마나 무서운 마약(痲藥)인고 하니, 내공을 심후하게 익힌 화경지경의 고수라고 해도 아편의 잔재를 완전히 씻어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화경지경의 고수라도 아편을 한번 피우기 시작하면 그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 같다 하여 주접약(蛛蝶藥)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16553195982502.png‘뭐, 그 주접이 아니라 아편하면 주접 싸는 것처럼 보이지.’

무림방파 중에서는 이 아편을 이용해 고통을 모르는 강시 같은 무인을 만들어 낸 곳도 있었다. 물론 생긴 지 얼마 안 돼 무림공적으로 지정되어 싹 쓸려 버렸지만 그 때문에 무림에서는 아편 경계령이 한때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상처와 떼려야 땔 수 없는 것이 바로 무인의 인생이었기 때문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무인들은 아편을 문 채 고통을 잊고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6553195982502.png“하지만 이곳에 그런 무인은 없는 것 같단 말이지.”

만우는 기감을 한껏 돋웠다. 지금은 음산한 이 뒷방길은 인적이 없었지만 건물 안에는 아편에 취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다들 아편을 하고 있기 때문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어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사삭!! 그리고 그런 만우의 기감에 만우와 방매를 감시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걸려들었다.

16553195982511.png“왜, 왜! 나 갈래. 여기 무섭단 말이야!”

만우가 막자 방매가 만우의 팔을 밀었다. 만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16553196041273.jpg“크헉!”

쿠웅!! 그러자 방매의 바로 머리 위 초가집 지붕에서 답답한 신음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물체가 툭하고 떨어졌다.

16553195982511.png“엄마야!!”

방매가 놀라면서 만우의 팔에 와락 매달렸다. 만우는 목을 붙잡고 숨을 못 쉬어 꺽꺽대는 놈을 보면서 손을 다시 한번 튕겼다. 따악! 그냥 단순히 손가락만 튕긴 것이 아니었다. 이건 일종의 음공(音功)의 일환으로 매우 기초에 속했다. 진정한 음공은 인간이 귀로 듣는 모든 소리에 내공을 실을 수 있어야 하지만 만우가 배운 것은 기초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기초도 만우의 강대한 공력이 실리면 이렇게 한 명 정도는 충분히 고꾸라뜨릴 수 있었다.

16553196041273.jpg“허억, 허억!”

숨구멍이 뚫리자 땅바닥에 처박힌 놈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만우는 그런 놈을 보면서 방매에게 물었다.

16553195982502.png“너, 검계 놈들 중에 얼굴 아는 애들 있어?”

16553195982511.png“몰라. 검계 애들 맨날 죽립 쓰고 다니거든.”

검계의 특징은 그들이 얼굴을 감추기 위해 매일 쓰고 다니는 죽립과 검에 있었다. 만우는 발끝으로 허리춤의 옷을 슬쩍 걷어 젖혀 검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16553195982502.png“검계냐?”

16553196041273.jpg“네놈…… 아니…… 고인(高人)은 뉘신지…….”

검계 조직원은 눈치가 빨랐다. 이런 눈치가 있기 때문에 이 뒷골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괜히 검계라면서 자존심을 세웠다면 여기서 죽었을 것이다. 이 주변에 검계는 많았다.

16553195982502.png“호오. 눈치가 빠른 놈이구나.”

16553196041273.jpg“제, 제가 좀 그렇습니다. 헤헤.”

쉬익!! 그때 지붕 위에서 날카로운 비수가 날아왔다. 같은 동료일 텐데도 불구하고 손속이 매섭기 그지없었다. 만우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텁.

16553196041273.jpg“헙!!!!”

상대방을 안심시켰다가 비수를 날려 틈을 만들고, 그사이 초근접 거리에서 단검을 찔러 넣을 생각이었던 검계는 단검을 품에서 뽑을 새도 없이 놀라야만 했다. 만우가 검지와 중지만으로 비수를 태연하게 잡아냈기 때문이었다.

16553195982502.png“싸구려 검을 쓰는구나?”

만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소맷자락을 털듯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만우의 손에 들려있던 단검이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끄르륵! 털썩

16553195982511.png“꺄, 꺄악!!!”

방매가 비명을 질렀다. 땅에 픽하고 떨어진 남자의 목에 단검이 꽂혀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방매도 저잣거리에서 억척스럽게 살아왔기 때문에 시체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연코 말하건데, 살인을 목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살인이 자신이 만만하게 대했던 만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다는 것에 방매가 몸을 우수수 떨었다.

16553195982511.png“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해!!!”

하지만 방매는 만우를 무서워하기보다 만우의 옆구리에 주먹을 날렸다. 꽤나 매서운 일격이었다. 만우가 움찔하며 방매를 쳐다봤다.

16553195982511.png“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하냐고!”

16553195982502.png“……안 무서워?”

방매의 떨리는 눈을 봤을 때 그녀는 살인을 해본 적도, 살인을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만우를 무서워하는 것보다 방매는 만우의 옆구리에 주먹을 날렸다.

16553195982511.png“안 무서워.”

방매는 그렇게 말하면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무서운 것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노력이 가상해 만우는 픽 웃었다.

16553195982502.png“무서워해도 된다.”

방매처럼 자신을 만만하게 여기는 눈빛보다 만우는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경탄해하는 시선에 더 익숙했다. 하지만 방매는 다시 한 번 만우의 옆구리를 때렸다.

16553195982511.png“안 무서워할 거야.”

16553195982502.png“……대체 왜?”

방매와 만우는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친분이 쌓이지 않았다. 그저 우연찮게 길에서 만나서, 같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굳이 방매가 만우의 기분을 생각해 무서워하지 않겠다고 오기를 부릴 필요는 없었다.

16553195982511.png“내 마음이야.”

방매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 보니 문형일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문형일과 마익후, 조선말을 하나도 못하고 극심한 굶주림에 지쳐 있던 그들을 설미수의 저택까지 안내한 것이 바로 방매라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 거기에 낯선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방매는 도와주려 했던 것이다.

16553195982502.png‘착한 거라고 생각하자.’

만우는 자신이 너무 속물같이 생각했다는 것에 쓰게 웃었다. 방매는 그냥 순수한 호의다.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못 보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6553195982502.png“마음대로 해.”

16553195982511.png“먼저 죽이려고 한 사람이니까, 죽일 수도 있어.”

방매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듯했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방금 사람 하나를 숨 쉬듯 손쉽게 죽이고서는 앞에서 만담을 벌이는 둘을 보던 검계 조직원이 흠칫 했다. 만우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16553196041273.jpg“대, 대인…….”

16553195982502.png“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는 놈들 있지? 여덟 명. 괜히 아까운 목숨 낭비하지 마. 아, 쓰레기들이라 죽어도 상관없으려나?”

만우의 서늘한 눈빛이 주변을 훑었다. 저잣거리의 뒷골목, 흔히 피맛골과는 다르게 뒷방길이라 불리는 이곳은 검계의 앞마당이었다. 똥개도 앞마당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간다는데 사람인 검계는 어떻겠는가. 그냥 보기에는 보통 골목길처럼 보이지만 이 뒷방길에서만큼은 검계들은 내금위가 몰려와도 막아낼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16553195982502.png“막아서봐.”

하지만 만우는 오히려 보라는 듯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검계가 살기로 촘촘하게 그물망을 짠 바로 그 경계선이었다.

16553196102825.png

16553195982502.png“대신 죽어도 모른다.”

검계 조직원들의 뒷골이 쭈뼛 섰다. 만우의 목소리에 담긴 한기는 진짜배기였다. 뒷방길에서 거칠게 살아온 검계 조직원들의 육감은 그런 쪽으로 비상하게 발달이 되어 있었다. [상대가 되지 않으면 상대하지 않는다.] 검계의 제1 철칙이었다. 그들은 상대가 될 만한 상대에게만 검을 들고 덤빈다. 하지만 만우를 마주한 그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강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이곳, 뒷방길에서는 아주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단지 그 대상이 검계라는 것이 의외였지만, 결국 검계들도 강자에게 굴복하는 뒷방길의 일원일 뿐이었다.

16553195982502.png“감이 좋아.”

만우가 히죽 웃었다. 입을 찢으며 웃는 만우를 보는 검계 조직원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귀의 미소였다.

16553195982502.png“검계로 안내해.”

만우는 주변에 모여들었던 감시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유일하게 자신의 손에 걸린 검계 조직원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16553195982502.png“어서.”

퍼억!

16553196041273.jpg“예, 예 대인!!!”

검계 조직원의 눈이 순간적으로 방매를 향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 조직원은 눈을 얼른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 눈 속에 담긴 악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만우는 그런 검계 조직원을 보면서 비릿하게 웃을 뿐, 나서지 않았다.

16553195982502.png‘열심히 파놔라. 무덤.’

만우는 자신의 팔에 바짝 달라붙은 방매를 매단 채 조직원의 씰룩거리는 엉덩이를 따라 뒷방길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스윽. 그렇게 사라지는 만우를 지켜보는 눈길이 있었다. 하지만 만우의 실력을 알고 있는 듯, 아무리 만우라고 해도 눈치챌 수 없을 정도의 거리에서 만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육안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거리지만, 시력을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특수한 기공을 익혔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라락!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감시자가 입고 있는 옷자락을 건드렸다. 그 옷자락 끝에는 은색 달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