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거래를 하자(3)2019.05.07.
만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관기는 관아에 속한 기생이다. 기루에 속한 기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가에 속한 기생은 관가에서 벌이는 다양한 일에 동원된다. 그리고 그곳의 여종이란 소리는 김향도 다음 관기로 내정된 예비관기란 소리나 진배없었다.
“관기라면, 노비(奴婢)를 말하는 건가?”
만우의 질문에 십령수가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만우는 끄응하는 소리를 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영향력이 별로 없었다고는 하나 김약항은 분명 양반이었다. 그러니 집안이 몰락했다고 해도 김향은 양반가의 자손이다. 그런데 그런 김향이 한양에서 부지런히 가야 두 달은 걸리는 함흥에까지 가 그곳에서 관기가 되었다는 것은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인가. 만우의 나이고 올해로 스물다섯이고 김약항이 죽을 때 만우의 나이는 이제 막 약관에 들었을 때였다. 그러니 그때 김향의 나이는 고작 열 살이다.
“광산군 김약항의 아들인 김선의 병세의 차도를 보기 위해 집의 논답과 족보를 담보 삼아 염왕채를 빌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염왕채.”
만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김약항이 그렇게 명에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동안 조선에 남은 나머지 식구들의 삶도 평탄치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 내가 할 일이 정해졌군.”
만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할 일이 생기면서 시간이 빠듯해졌다.
“대협. 저는…….”
“넌 길 안…… 아니다. 다른 안내인을 쓸 터이니 이만 가도 좋다.”
“감사합니다, 대협.”
십령수는 혹시라도 만우의 마음이 바뀔까 번개처럼 사라졌다. 만우는 대청에 든 설미수 대신 조씨 부인을 찾아갔다. 정확히는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일복을 찾았다.
“아저씨. 잠시 자리를 비울 터이니 궐에서 사람이 나온다면 잠시 기다려 달라 말해주시겠습니까.”
“예, 그럽지요.”
일복은 꾸벅이며 만우를 어렵게 대했다. 다른 네 명은 그리 편하게 대하면서도 설미수가 예를 지키는 만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부재중에 일어날 일에 대비한 만우는 아직 공사 중인 저택 대문을 넘어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팔짱을 꼈다.
“방매 고것이 어디로 갔을까.”
한양을 안내하는 데 있어 방매보다 뛰어난 안내인은 없다. 하오문도라고 해도 한양과 그 인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방매보다는 한양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다. 방매는 장사를 하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만, 하오문도들은 정보를 모아야 할 때가 아니면 그냥 자신들이 살던 곳 위주로만 돌아다니기 때문이었다.
“흠!”
만우의 신형이 연기로 화해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경신법이 너무나도 고절하여 사람의 동체시력으로는 잡지 못 한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냥 가만히 서서는 뽈뽈 거리며 돌아다닐 방매를 찾을 수 없으니, 만우가 직접 초고속으로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거기구나!”
그렇게 만우가 눈 몇 번 깜박일 새에 북촌에서 종로 쪽으로 넘어가는 순간, 만우의 신형이 달려가던 속도를 무시하면서 직각으로 꺾였다. 팡! 공중에서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에 저잣거리의 사람들의 위를 쳐다봤지만 아무것도 없는 시린 하늘만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
“아씨. 요 연지 한번 보셔요. 저기 명에서 건너 온 질 좋은 연지예요. 복숭아 향도 나죠?”
“흐음. 고운 게 아주 딱이구나?”
방매는 오늘도 열을 올리면서 화장품 판매에 열을 올렸다. 방매의 손이 여시종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움직일 때마다 아씨라 불린 여인의 얼굴이 마치 만개한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매분구는 단순히 화장품만 파는 방물장수가 아니다. 직접 화장법까지 보여줘야 넘어오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나 방매는 이 화장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제일매분구란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체 높으신 여인네들이 상것들처럼 자주 바깥에 돌아다닐 수 없으니, 양반집의 규수들이 방매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린다는 소리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건 얼마냐?”
“명나라에서 넘어온 복숭아 향이 나는 이 연지, 고작 무명 한 필밖에 안 합니다.”
히에엑! 방매가 가격을 말하자 여시종들이 뒤로 놀라 까무러쳤다. 하지만 규수는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명에서 들어온 것 치고는 가격이 괜찮구나.”
“전 다른 매분구와는 다르게 가격을 지나치게 후려치지 않으니까요.”
“그래. 네 발로 직접 뛴다지?”
무명 한 필이면 무려 쌀 반가마니의 가격이다. 보통 달에 한 필, 1년이면 열두 필을 만들어 내는데 저 작은 연지통 하나에 한 달 동안 꼬박 무명을 짜는 가격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백성의 경우였고, 양반의 경우에는 그리 비싼 가격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다음에도 기다려 주세요 아씨. 헤헤.”
방매는 환하게 웃으면서 명주 한 필을 받고 연지를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나무로 만든 찬합에 펼쳐놓은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집어넣고, 그 찬합을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로 둘러 단단히 싸맸다.
“안녕히 계셔요.”
“그래, 잘 가려무나.”
아씨라 불린 여인은 방매에게서 산 연지가 퍽이나 마음에 드는지 복숭아 향을 연신 맡았다. 그런 그녀에게 인사를 한 방매는 콧노래를 부르며 저택에서 나왔다.
“흥~ 흥흥~!”
오늘도 한 건을 올렸으니 뿌듯했다. 이렇게 하루에 한 개씩만 팔아도 달포면 무명이 삼십 필이나 됐다. 물론 때가 되면 마포나루에 나가 새로운 화장품을 사야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수익이었다.
“야!”
파라라락!!! 그런데 그때 방매의 눈앞에 벼락이 꽝하고 떨어졌다.
“에그머니나!”
놀란 방매가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나무 찬합을 가슴에 꼭 껴안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벼락이 칠 때 나는 소리가 아니라 천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뭐하냐?”
방매가 고개를 들자 하얀 무명천으로 된 옷을 입은 만우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만우 때문에 놀랐다는 것에 방매의 눈이 도끼눈이 됐다.
“왜 그렇게 귀신처럼 나타나는 거야! 사람 놀라게시리!”
“아, 놀랬어?”
“당연하지! 안 놀래냐?”
“흠. 이 정도로 놀랄 줄은 몰랐지.”
방매의 발놀림을 보면 분명 무예를 제대로 익혔다. 여자 혼자 매분구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필히 호신술이 필요하긴 했지만 방매의 발놀림은 단순 호신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훌륭한 보법이었다.
“시끄러! 칫!”
골이 난 방매가 만우의 옆을 바람처럼 스쳐지나갔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매를 따라잡았다.
“뭐 물어볼 게 있는데.”
“나 바빠! 일하는 거 안보여?”
무명 한 필을 벌었다고 해서 만족할 방매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해도 중천에 있으니 한 군데 더 돌 수 있었다.
“그래? 왜 일하는데?”
방매가 고개를 훽 돌렸다. 만우나 그 잡혀간 사인방이야 팬팬히 수련이라고 둘러대면서 노는 것을 보니 팔자가 좋아보였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돈 벌어야 되니까!”
“너 돈 많잖아.”
하지만 만우는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방매는 돈이 많았다. 괜히 그녀가 한양제일매분구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설미수의 저택에서 신세를 지고 있으니 따로 돈이 들어갈 구멍도 없었다.
“돈 많이 모아서, 여객 낼 거야!”
“여객?”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객주가 되면 돈은 많이 벌 수밖에 없다. 여객이란 곳은 일종의 중개무역상으로 보부상이나 상단에게 휴식처와 거래장터를 제공하는 곳이다. 자연스레 돈을 쥔 사람들이 거쳐 가는 곳이니 돈이 흐를 수밖에 없고 돈이 흐르는 곳에서는 돈이 벌린다.
“그래! 그래서 아주 부자돼서 떵떵거리면서 살 거다.”
“아하. 그러니까 돈을 벌어야 된다고?”
중원의 객잔과는 다르게 중개장터라는 기능이 추가된 곳이 바로 여객이다. 만우는 역시 꿈이 크다고 생각했다. 여객을 세우고 그곳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이 한두 푼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돈만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중개장터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상인들을 끌어모아야 했는데 그렇다면 위치가 가장 중요했다. 상인들이 지나다닐 길에 여객을 차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돈이 될 만한 목에는 전부 여객이 차려져 있었다. 설미수를 따라 중원에서 들어오면서 봤으니 확실했다.
“그 돈, 내가 줄게.”
만우는 방매에게 말했다. 그러자 방매의 몸이 멈칫했다. 만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 키득거렸다. 방매에게는, 그 어떠한 것보다도 돈을 주는 것이 바로 직방이었다.
“어, 얼마?”
방매가 고개를 슬쩍 돌려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만우에게는 하오문에서 가져다 준 재물이 차고 넘치도록 있었다. 사실 만우에게 그렇게 많은 재물이 필요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런 몇 수레나 되는 재물보다는 명검 하나가 더 가치가 있었다.
“음. 패물 하나.”
“패물?”
방매의 눈이 커졌다.
“옥가락지가 있더라고. 너도 봤지?”
방매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오문에서 상자로 재물들을 들여올 때 그 자리에 방매도 있었다. 저게 다 얼마인가 싶어 군침을 흘렸었다.
“오, 옥가락지? 정말?”
방매가 본 옥가락지를 준다면 이런 명주를 이십 필은 줘야 살 수 있다. 혹시나 만우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방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와줄게. 하지만 값은 제대로 치러.”
“쓸데없는 의심을 하고 있어.”
만우가 태연하게 대답하자 방매의 눈이 반짝였다.
“뭐가 알고 싶은데?”
“염왕채.”
“염왕채?”
방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염왕채라면 양반과 상놈을 가리지 않고 고혈을 빨아먹는 바로 고리대금을 뜻하는 말이다.
“그 염왕채를 쓰는 놈이 한양에 몇 놈이나 있어?”
“엑. 왜? 그놈들한테 염왕채라도 썼어?”
방매는 고개를 저었다. 그놈들과 엮여서 좋을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만우는 검지를 치켜들고 까닥였다.
“아니. 그놈들에게 확인할 게 있거든. 어때? 놈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게?”
“…….”
“옥가락지.”
“대, 대신 난 근처에 숨어 있는다? 그놈들한테 얼굴 보이면 피곤하단 말이야…….”
사람도 납치해서 감금하고 죽인다는 소문도 있는 놈들이었다. 방매는 고개를 저었다.
“검계 놈들은 나도 싫은데…… 히잉…….”
“검계(劍契)? 그 놈들의 이름이 검계야?”
만우가 흥미를 보였다. 만우는 검(劍)자가 들어가면 전부 다 관심이 있어 했다.
“맞아. 검을 차고 돌아다니는 놈들이라고 해서 검계야. 저기 종로에 복상골 있지?”
“기루 몰려 있는데?”
“거기서 더 들어가면 있는데…….”
“가자. 어서.”
만우가 방매를 재촉했다. 옥가락지에 홀린 방매도 두 눈을 반짝이며 애써 의지를 불태웠다.
“그래! 가자! 옥가락진데 뭘 못 하겠어!”
*** 검계는 많은 것이 비밀에 쌓인 조직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은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염왕채를 양반이건 상놈이건 가릴 것 없이 발행하는 놈들이었고 그 대가로 영혼까지 쪽쪽 빨아먹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놈들 때문에 멋모르고 돈을 빌렸다가 패망한 양반만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계는 단 한 번도 소탕된 적이 없었다. 포도청에서 검거를 하러 우르르 몰려나오면 미리 눈치채고 귀신처럼 숨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검계의 계주(契主)가 누구인지, 검계에 몇 명이나 있는지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만우는 방매의 설명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재밌네. 살막(殺幕) 같은 놈들이구나?”
“살막? 그게 뭔데?”
“명나라에 그런 게 있었어.”
돈만 준다면 황제의 목도 따다 준다는 살막의 살수들은 명의 북쪽의 대사막에 그 본거지를 두고 있는 은밀한 집단이었다. 그들의 살행은 언제나 비밀스럽고 조용했기 때문에 사람이 죽고 나서야 살막의 살수들이 다녀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살막이 유일하게 실패한 살행이 바로 검주, 만우 자신에 대한 살행이었다.
‘철혈문 떨거지들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