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거래를 하자(2)2019.05.04.
“…….”
왕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결국 이거였다. 괴력난신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만우에게서 느껴지던 기운은 전부 진짜였다. 수라를 헤쳐 나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투쟁의 기운.
“그리고 그 넷. 그 넷이 조선을 두려워하여 내금위에게 잡혀갔다고 생각하는 건가?”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선의 왕인 자신을 앞에 두고 조선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광오한 말이었다.
“옥면산군, 필수교어, 괴검과 괴검.”
만우는 차례대로 네 명의 별호를 왕에게 말해주었다.
“중원무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가 있다면 저 이름을 들려줘 보아라. 저들은 이 작은 반도의 왕인 너보다 저 넓은 중원에서 더욱 왕처럼 살아온 자들이니.”
특히 감령과 필두는 그랬다. 문형일과 마익후는 표홀히 중원을 유랑하는 만우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그럴 새가 없었지만, 만약 괴검과 괴권이 의탁할 문파나 세가를 찾는다면 아마 억만금을 줘서라도 데려갈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짐은 그토록 위험한 자들이 한양 저잣거리를 돌아다니게 좌시할 수 없다. 이는 이 도성의 치안이 달린 일이야.”
“…….”
단순히 강한 힘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부하를 견제하여 죽여 버린 군주들을 나열하면 한도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었다. 왕이란 자리는 원래 그런 법이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더라도, 한 번 신경이 쓰이면 반드시 그 끝을 보고야 말아야 하는 권력의 귀신들. 그 권력이란 놈에게 홀리면 약도 없기 때문에 결국 유일한 결과는 대부분 파멸이었다.
“게다가 검주, 그쪽도.”
왕의 눈에서 대쪽 같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것도 안 할 것이라고 해도 믿지 않겠지?”
왕은 풀썩 웃었다.
“힘이 있는 자가 그 힘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것은 그 어떠한 고사(古事)를 찾아봐도 찾을 수 없더군.”
힘이란 쓰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쓰지 않는 것을 본 적은, 적어도 왕이 기억하는 한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어떻게든 다른 일에 얽히게 된다.
“그럼 거래를 하지.”
“거래?”
왕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거래를 하는 행위는 조선에서 제일 천하게 여기는 행위 중 하나였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가장 아래에 위치한 것이 상(商)이 아니던가.
“왕이 본주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 그러면 그 대가로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도록 하지.”
왕은 턱을 쓰다듬었다. 만우는 그런 왕을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직시했다. 왕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검주가 한 발자국 물러났으니 왕도 한 발자국 물러나야 한다. 왕은, 검주를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을 했다. 조선제일검과 용호군이 나서도 제압하지 못한 상대를 자신보다 하등하다하여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왕은 고민했다. 여기서 만약 왕이 허락할 수 없다거나 거래에 응할 수 없다고 하면 검주는 어떻게 할까.
‘조선과 맞서 싸울 생각은 없으나, 4인방을 무력으로 구출하겠지. 그러면 검주와는 영원이 척을 지게 된다.’
왕은 만우에게서 권력에 대한 탐욕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가 딱히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것은 확신했다. 권력에 대한 탐욕은 절대로 숨길 수 없는 기침과도 같아서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하여도 결코 숨길 수 없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왕의 머릿속에 근래 들어 그를 가장 괴롭히던 골치 아픈 일이 떠올랐다.
“거래라. 좋지. 대신 어려운 일인데, 괜찮겠나?”
“말해봐라.”
만우는 팔짱을 꼈다. 어떠한 것도 어려울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왕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저렇게 자신만만하지만, 왕이 부탁할 것은 만우가 가진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차가운 시체가 되어 돌아온 두 명을 떠올린 왕은 고개를 저었다. 동북면을 주름 잡던 신궁(神弓) 때만큼은 아니지만 아버지인 상왕 이성계의 활솜씨는 여전했다. 그런 이성계의 화살을 막아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이득이다.
“내 조만간 어사(御使)를 제수할 생각이네.”
“어사?”
“감찰관이라고 하면 이해가 쉽겠지.”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찰관이라면 바로 이해가 갔다.
“하지만 암행(暗行) 감찰관이네.”
“목적은…….”
“굳이 그것까지 자네가 알 필요는 없겠지. 자네의 임무는 단 하나, 그 어사를 지키는 것이니 말일세.”
“…….”
“아참. 암행 감찰관이니 호위무사나 무관으로 임명할 수는 없네. 단.”
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만우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질러볼 생각이었다.
“어사에게는 역졸이라는 수행원들이 함께 하네. 때문에 부득이하게 자네의 신분과 진명을 숨겨야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은가?”
만우는 잠시 고민했다. 신분과 진명을 숨기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동네방네 자신이 검주라는 것을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도 조건을 하나 더 걸지.”
만우는 본능적으로 이 일이 하루이틀 걸리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사 이야기를 꺼낼 때 왕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만우는 놓치지 않았다.
“내 부하들. 옥사가 아니라 더 나은 곳에 넣어놓고 신경을 써다오. 내 부주의로 인해 생긴 일이니.”
“흠…… 좋아.”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왕은 만우가 떠나 있는 사이 그 네 명을 가지고 할 일이 마침 있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그 네 명을 옥사에 가둬둘 수는 없었다.
“기간은?”
“6개월.”
“3개월로 당겨주지.”
“여기서 함흥까지 가는 데만 2개월이 넘어. 3개월은 불가능하네. 게다가 어사는 양반이지만 역졸은 일반 백성이지.”
신분 차이도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만우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아는 사람은 그 양반나리밖에 없을 테니 상관없지.”
“…….”
왕은 얼굴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만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그 어사가 문득 불쌍해졌지만 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쩔 수 없었다. 중원에서 검주라 불렸던 이를 일개 어사의 호위로 쓰는 것은 너무 과한 처사였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죽기에는 아까운 이가 바로 왕이 어사로 내정한 사람이었다.
“모든 것은 검주, 그대가 하기에 달린 일이라고 생각하도록 하지.”
“그럼 거래가 끝났으니, 내일 다시 오겠다.”
만우가 몸을 반쯤 일으켰다. 순간 만우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스르륵하고 사라지는 것을 본 왕의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아참. 그 전에 하나.”
만우의 신형이 연기처럼 스르륵하고 사라지려는 찰나 만우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진 만우의 마지막 말은 왕의 머릿속에만 울려 퍼졌다.
[쥐새끼들이 많더군. 다음부터는 조심하는 게 좋겠어.]
왕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런 왕의 뒤로 비슷하게 창백한 안색이 된 은월루주, 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도 만우의 전음을 똑똑히 들었다. *** 만우는 기지개를 쭉 켰다. 그러고는 늘 그랬던 것처럼 부스스하게 일어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접객전의 마당으로 나갔다. 하지만 원래라면 네 명이 시끌벅적하게 티격태격하고 있어야 할 마당이 조용했다.
“아. 다 잡혀갔지?”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냈다고 있다가 없으니 허전함이 든 모양이었다. 피식 웃은 만우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세수를 한 다음 하품을 쩍했다.
“야 너!!!!”
그 때 방매가 불쑥 튀어나와 만우에게 소리를 빽하고 질렀다. 만우는 얼굴을 찡그러고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비키라는 뜻이었다.
“아니 어떻게 날 거기에 그냥 눕혀두고 갈 수가 있어?”
방매는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그러자 만우가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아! 뭔가를 까먹은 것 같더라니.”
“너, 너어어어!!”
방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궁에 들어갈 때 방매의 수혈을 짚어놓고서는 깜박 잊고 나와 버렸다. 그래도 한 시진이 넘지 않게 짚어뒀기 때문에 들키지 않고 나온 모양이었다.
“너 때문에 진짜, 진짜 내가.”
방매의 눈에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하지만 검주 만우, 여자의 눈물에 그렇게 쉽게 흔들릴 정도의 성격이 아니었다. 거기에 진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그냥 분해서 흘리는 눈물이었기 때문에 만우는 손을 휘저었다.
“저리 비켜!”
방매는 눈가를 소맷자락으로 찍어내면서 도끼눈을 뜨고 소리쳤다.
“왜!”
“햇빛.”
“이…… 이익!!!!”
방매는 화가 나 못 참겠다는 듯 더욱 햇빛을 가렸다. 만우는 고개를 휘휘 옆으로 저어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려고 했지만 방매의 방해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 뭐어!!!”
“여기서 태평하게 뭐하는 거야! 그 아저씨들 구하겠다면서!!!”
“애들은 괜찮아. 뭐, 몇 달 그 안에서 답답하긴 하겠지만 3개월 후에는 나오기로 약속했어.”
“약속? 누구랑? 어제 온 사람들 내금위라고 그러던데. 내금위에게 잡혀가면 못 돌아온다고!”
만우는 알 것 없다는 듯 방매의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방매가 약이 바짝 오른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나도 흥이다!”
토라진 방매가 만우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발재간 하나만큼은 일품이었다. 저 정도면 웬만한 경신법을 가르쳐놔도 대성을 이룰 수 있을 정도의 자질이었다. 어쩌면 미래의 대(大) 양상군자(梁上君子)가 될지도 모른다.
‘무영투니 뭐니 했던 그 늙은이처럼.’
만우는 씩 웃었다. 중원을 유랑하면서 만우가 만난 기인(奇人)만 해도 열 손가락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 중에는 무영투라고 해서 전설적인 도둑으로 불리던 늙은이도 있었다. 구파일방의 전력이 무영투가 훔쳐간 소림의 대환단과 무당의 태청단을 되찾겠다면서 일 년이 넘게 추격전을 벌였지만 꼬투리도 잡지 못한 대도(大盜)가 바로 무영투(無影偸)다.
“아함.”
만우는 또다시 입을 쩍하고 벌렸다. 왕이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는 할 일이 없었다. 어제만해도 내금위가 찾아와 난리가 났었는데 설미수의 저택은 대문을 고치느라 땅땅거리는 소리만 날 뿐 조용했다. 그런데 그때, 햇살을 즐기던 만우가 눈을 반개한 채로 말했다.
“왔으면 나와. 숨어서 관찰하지 말고.”
“대, 대협.”
접객전의 지붕 위에서 십령수가 뚝하고 떨어졌다. 만우는 고개를 들어 무심한 눈으로 십령수를 쳐다봤다. 십령수는 얼굴이 퍼렇게 질려서는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었다.
“왜?”
하오문에서 만우를 먼저 찾아올 일이 없었다. 무화 임수미 고 앙큼한 년이 왔다면 또 모를까.
“광산군 김약항 자제들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파앗! 십령수가 침을 꿀꺽 삼키고 한 마디를 한 순간, 만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동시에 십령수는 헛숨을 집어삼켰다. 순간 만우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고절한 공력이 자신의 심장을 꿰뚫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정말이냐?”
“예. 무화께서 특별히 신경을 쓰셨다고 꼭 말씀을 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호오.”
만우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소식에 미소를 지었다. 이게 다 중원에 있을 때부터 하오문을 적절히 교육시킨 그 효과라고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맞아가면서 커야지.’
십령수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거품을 물면서 뒤로 넘어갔을지 모른다. 만우의 손에 박살이 난 하오문 지부와 문도들이 대체 몇 명이었던가. 그걸 그냥 꿀밤 몇 대 때린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니 하오문으로서는 만우의 머릿속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래. 어디 한번 말해보거라.”
광산군 김약항은 조선에서도 거의 잊힌 사람이었다. 조선의 사신으로 보내졌다가 그곳에서 평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거의 버려진 인물이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조선 내에서도 파벌이나 정치에 깊게 관여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기반이 튼튼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김약항의 자(子) 김선. 사(死). 오랫동안 앓던 지병으로 가세가 기울자 요절(夭折).”
‘도련님은 돌아가신 건가.’
원래부터 김약항의 아들인 김선은 몸이 약해 김약항의 큰 걱정이었다. 그런데 집안의 가장인 김약항이 명에 체류되자 가세는 점점 기울었다.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원체 병약했던 그가 요절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김선의 자 김문, 사(死). 10년 전 역병으로 인해 요절(夭折).”
‘……도령께서도.’
김문의 얼굴은 만우의 기억 속에 없었다. 하지만 김약항은 만우를 보면 손자인 문이 생각난다면서 늘 말하곤 했다.
“김선의 여(女) 김향, 함흥관아 소속 관기(官妓)의 여종. 올해 나이 열다섯.”
“……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