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3. 반역?(3) (33/400)

033. 반역?(3)2019.04.23.

스왕!! 루주의 말이 끝난 순간 운검의 검이 루주의 턱밑에 닿았다. 그 안에 있는 그 누구도 권희달이 검을 움직이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하지만 검은 루주의 턱 밑에 닿아 있었고, 권희달은 두 눈에 분노를 품은 채 루주를 노려봤다.

16553194886667.jpg“희달아.”

스르륵, 착! 하지만 왕의 한마디에 섬광이 한차례 일어나더니 납검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운은 눈이 팽팽 도는 기분이었다. 권희달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의 검을 바로 코앞에서 보고서도 흔들리지 않는 루주도 어찌 보면 대단한 담력이었다. 스르륵.

16553194886667.jpg“감히 뉘 앞이라고 얼굴을 가리느냐.”

동시에 루주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이 흘러내렸다. 그런 루주를 향해 차갑게 말하던 권희달이 멈칫했다. 복면 아래 드러난 것은 새하얀 탈이었기 때문이다.

16553194886667.jpg“이런 불상사를 대비해 항상 소녀가 차고 다니는 탈입니다. 운검.”

루주는 그런 권희달을 조롱하듯 말했다. 하지만 권희달은 그런 루주를 차갑게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왕의 뒤에 가서는 석상처럼 섰다.

16553194886667.jpg“어찌하여 운검이 검주란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냐?”

그러자 왕이 루주에게 물었다. 루주는 왕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16553194886667.jpg“분명 운검의 무공 실력은 감히 말하건데 중원에 가서도 능히 수위를 다툴 수 있을 것입니다.”

16553194886667.jpg“헌데?”

검명과 검사를 구사할 정도가 된다면 초절정을 뛰어넘었다는 뜻이다. 즉 초절정인 일월합벽을 넘어 오기조원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뜻이었다. 화경(化境)! 인간의 수명을 뛰어넘고, 신선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라 하여 선입지경(仙入之境)이라 부르는 것이 바로 화경이었다. 그런데도 검주에게 안 된다는 것이었다.

16553194886667.jpg“검주는 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왕과 설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권희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이 안에서 유일하게 루주의 말을 이해한 사람이 권희달이었다.

16553194886667.jpg“검의 주인이라 불릴 정도로 검의 달인인데, 검이 필요하지 않다?”

16553194886667.jpg“그렇사옵니다.”

16553194886667.jpg“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이해가.”

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운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 권희달이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여 소리를 냈다.

16553194886667.jpg“검주란 자,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에 이른 것이냐?”

16553194886667.jpg“검주 만우는 중원에서 나뭇가지 하나로 다섯 명의 초절정을 꺾었습니다.”

16553194901077.jpg

16553194886667.jpg“…….”

권희달은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지금까지 조선제일검이라 불리며 중원에 나가더라도 자신을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헌데 같은 검을 다루는 이가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충격이었다.

16553194886667.jpg“그런 자가 한양을 활보하고 있단 말이더냐?”

16553194886667.jpg“그렇사옵니다.”

16553194886667.jpg“흐음…… 재밌구나.”

왕은 웃었다. 운검인 권희달의 표정을 보니 검주란 자가 운검보다 강하다는 루주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왕은 그게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왕이지만 그는 어릴 적 조선의 건국왕이자 그의 아버지가 동북면에서 가별초와 함께 수많은 오랑캐와 싸우는 것을 봤다. 그중 단 한 번이라도 아버지가 유리한 형세에서 전투를 시작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열세를 뒤집었다. 그것처럼 생사란 것은, 단순히 실력에 의해서만 갈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16553194886667.jpg“그래서 너는 내게 무엇을 말해주러 온 것이냐?”

왕은 루주에게 말했다. 설마 검주란 자에게 겁을 집어먹으라고 부른 것은 아닐 터였다. 루주는 왕에게 말했다.

16553194886667.jpg“그자. 은월루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16553194886667.jpg“…….”

왕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은월루와 왕 사이의 밀월관계는 대단히 오래됐다. 정확히는 왕이 왕자 시절 중원에 보내졌을 때 그곳에서 전대 은월루주를 만났고 그들을 조선으로 끌어들여 정착시켰다. 그들은 왕의 숨겨진 힘이자 왕이 모든 대신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왕의 수족이다.

16553194886667.jpg“은월루를 어찌 알고?”

16553194886667.jpg“저희도 잘 모르겠나이다. 그자가 지난 며칠 동안 기루를 돌아다니며 은월루에 대해 찾으려 했다는 것만 파악했나이다.”

16553194886667.jpg“그래서. 그자를 치워달라?”

16553194886667.jpg“아닙니다.”

루주는 왕을 보면서 눈을 빛냈다.

16553194886667.jpg“전하의 검(劍)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아니, 동반자라도 좋습니다. 만약 그리한다면…….”

루주의 전음이 왕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16553194886667.jpg[시황제(始皇帝)가 헛된 꿈은 아닐 것이옵니다.]

왕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

16553194916038.jpg“방매.”

16553194916043.jpg“으, 으와아아악! 깜짝이야!!!!”

방매가 기절할 것처럼 팔다리를 파르르 떨면서 뒤를 돌아봤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식은땀이 확 나는 것이 보통 놀란 것이 아닌 듯 했다.

16553194916038.jpg“죄가 많은가봐? 이렇게 놀라는거 보면?”

만우가 빙글거리며 방매를 쳐다보고 있었다. 놀란 방매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맷자락을 붙잡아 으슥한 골목으로 확 이끌었다.

16553194916043.jpg“야! 너 미쳤어?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그런 길가에서 걸어다녀!”

만우는 잡힌 자신의 소맷자락을 쳐다봤다.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피해지지 않았다.

16553194916038.jpg‘내가 이 조막만한 계집애를 믿는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당가의 고수가 날린 암기도 한 개 단위로 쳐낼 수 있는 자신이 소맷자락을 붙잡혔을 리 없다.

16553194916043.jpg“야! 왜 대답 안 해! 너 미쳤냐고!”

방매가 다시 한번 묻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만우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16553194916038.jpg“안 미쳤어.”

16553194916043.jpg“그런데 어쩌자고 돌아다녀! 잡히면 어떻게 하려고!”

16553194916038.jpg“잘못을 안 저질렀는데 왜 잡혀가.”

16553194916043.jpg“야! 양반 나리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끝인 거야. 우리 같은 백성들은 그냥 눈에 안 띄고 조용히 사는 게 최선이라고!”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궁에까지 들어가 물건을 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16553194916043.jpg“아저씨들은 다 잡혀갔는데 너만 못 잡았다면서? 안 그래도 순찰이 부쩍 늘어났어. 너 때문인가 봐.”

어차피 이곳까지 지붕을 뛰어넘어 왔기 때문에 만우는 포졸들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설령 마주친다고 해도 포졸들이 만우를 잡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16553194916038.jpg“좀 도와줘야겠다.”

16553194916043.jpg“내가? 뭘?”

방매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지금 상황에서 만우를 도와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6553194916038.jpg“너. 궁궐에 벌써 거래 텄다면서?”

방매의 친화력과 사교성은 가히 최강이었다. 그 때 한 번 궁궐에 같이 입궐한 것을 계기로 그녀는 궁녀와 항아들을 대상으로 매분구 판매로를 텄다. 궁에서 일하는 예비 왕의 여자들이 수백 명도 넘었으니 앞으로의 길은 창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6553194916043.jpg“궁궐에 들어가려고? 그 아저씨들 구하려고?”

방매가 눈을 크게 떴다. 방매도 이들이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방매도 아예 무예에 문외한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그녀가 아저씨라 부르는 네 명이 범상치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것이 바로 만우였다.

16553194916043.jpg“네가 특출나다고 해도 안 돼. 궁에 몰래 들어갔다가 들키면 궁궐 무사들이 전부 너를 쫓을 거라고! 임금님이 사는 곳이야 임금님!!”

방매는 말도 안 된다면서 만우를 말렸다. 하지만 만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3194916038.jpg“날 보고 명에서부터 따라온 사람들이야. 그리고 내 잘못도 있고. 그러니까 궁궐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 좀 알려줘.”

아예 궁궐의 정문부터 뚫고 들어가도 되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만우라고 해도 군대와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만우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왕과 독대만 할 수 있으면 됐다. 굳이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일을 멀리 돌아가는 것도 낭비였다.

16553194916043.jpg“끄응…….”

방매는 앓는 소리를 냈다. 뭔가 대단한 일에 휘말리는 것 같아 겁이 더럭 났기 때문이다. 만우는 그런 방매를 보면서 웃었다.

16553194916038.jpg“그냥 어디로 들어가면 되는지만 알려줘. 내가 할 테니까.”

16553194916043.jpg“끙…….그래도……그래도.”

16553194916038.jpg“그래도는 무슨.”

16553194916043.jpg“그래도 의리가 있지! 밥도 같이 먹고 같이 구르기도 했는데!”

게다가 만우 덕분에 무려 고래 등 기와 저택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네 아저씨들을 비롯해 그 집 사람들과도 친해졌기 때문에 그냥 도망갈 수는 없었다.

16553194916043.jpg“따라와. 내가 알려줄게.”

의리를 앞세우면서 자신에게 손짓을 하는 방매를 보면서 만우가 피식 웃었다. *** 잡힌 네 명을 구하는데 있어 가장 깔끔한 방법은 바로 어명이다. 어명으로 내금위에 붙잡혀 들어갔고, 그곳에서 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어명이었다.

16553194916038.jpg“그러니까.”

만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방매의 수혈을 짚었다. 방매는 궁궐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개구멍까지 벌써 알아뒀다. 궁녀와 항아들을 상대로 판매로를 텄다고는 하지만 그 사실이 궁녀나 항아들의 상관인 상궁이나 내시에게 발각된다면 경을 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퇴로가 하나 필요했고 방매는 가히 명인급의 눈치와 관찰력으로 궁궐 담벼락 중 취약한 부분을 찾아내 개구멍을 파놓았던 것이다.

16553194916038.jpg“넌 여기에 가만히 있어.”

궁궐 안으로 들어온 만우는 방매의 수혈을 짚어 그녀를 조심스럽게 푹신한 풀 위에 눕혔다.

16553194916038.jpg‘소주방인가.’

만우는 음식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수라간(水刺間) 중 하나인 소주방(燒廚房)이란 것을 안 만우의 무릎이 살짝 굽혀졌다가 펴졌다. 스팟!! 만우의 신형이 마치 공간을 넘듯 수라간의 처마에 다시 나타났다. 높은 곳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니 널찍한 경복궁의 내부가 눈앞에 펼쳐졌다.

16553194916038.jpg‘저쪽인가?’

만우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넓게 기감을 퍼뜨려보니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이지만 궁에는 이 야심한 시각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왕의 침전일 것이다.

16553194916038.jpg‘왕이 대화가 통하는 작자여야 할 텐데.’

어둠과 맞닿은 공기를 가로지르며 만우의 신형은 가장 많은 기척이 느껴지는 곳의 지근거리까지 도달했다.

16553194916038.jpg‘강녕전(康寧殿)?’

건물 위에 그림자처럼 내려앉은 만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궁 내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이란 것을 증명하듯 주변에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기척들이 많았다. 왕의 침소라고 널리 알릴 필요가 없으니 주로 왕의 침소 주변을 지키는 이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매복하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접근했다가는 사방팔방에서 튀어나오는 왕의 호위군인 용호군에 의해 갈갈이 찢겨져 나갈 것이다. 덜그.럭 만우가 발끝에 힘을 주자 기왓장이 미약하게 어긋나면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란 만우가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이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존재감을 지웠다. 파바밧! 그리고 만우가 은신술을 펼치자마자 지붕 위로 용호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저들과 부딪친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그냥 깔끔하게 왕만 보고 가고 싶었다.

16553194886667.jpg“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16553194886667.jpg“예, 기왓장이 움직이는 소리였습니다.”

16553194886667.jpg“……흐음…….”

용호군 세 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소리가 들려서 올라왔는데 아무도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명은 방심하지 않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만약 상대가 그들보다 월등히 뛰어날 실력자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소리에 만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작아졌다. 생각보다 엄정한 군기에 만우는 잘하면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16553194886667.jpg“경계를 강화하라!”

16553194886667.jpg“경계를 강화하라!”

이내 강녕전 주변에 퍼진 용호군이 서로와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만우의 기감에 느껴졌다. 넓은 범위를 경계하는 것보다 경계병 사이의 거리를 줄여 힘을 한 곳으로 집중한 것이다.

16553194916038.jpg‘좋은 방법이네.’

만우는 쯧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확실히 저렇게 되면 뚫고 들어가기가 배는 더 힘들어진다. 하지만 만우는 이내 피식 웃었다.

16553194916038.jpg‘그게 효과가 있는 자가 있고, 없는 자가 있지.’

팡! 만우의 신형이 부드럽게 하늘로 치솟았다. 구름 위를 노니는 용의 움직임을 흉내냈다는 곤륜의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과 흡사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표홀하게 용호군의 이목을 숙인 만우의 발이 부드럽게 강녕전의 지붕에 내려앉았다. 깃털이 내려앉는 것처럼 만우는 어떠한 소음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16553194916038.jpg‘진법.’

하지만 강녕전의 지붕에 내려앉는 순간 만우의 눈이 커졌다. 강녕전에 들어서니 감각을 기이하게 방해하고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수백의 용호군에 이어 진법까지 펼쳐놓은 그 철두철미함에 만우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16553194916038.jpg‘자금성이 차라리 더 쉬울지도 모르겠군.’

명의 황제가 기거하는 자금성(紫禁城)의 규모는 경복궁보다 월등하게 컸다. 그리고 그 크기에 걸맞을 만큼 많은 수의 비밀 호위와 금위대, 동창들이 자금성을 철통같이 호위했다. 하지만 그것에 비해 경복궁도 용호군의 경호가 그에 못지않았다.

16553194916038.jpg“끄응.”

만우는 뻐근한 어깨의 압력을 느끼고는 어깨를 한번 털었다. 그러자 만우를 향해 몰려들던 진법의 기운이 흩어졌다. 굳이 이런 진법의 압력을 온몸으로 받아낼 필요는 없었다. 흘려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도 만우 정도 수준이 돼야 가능한 것이다.

16553194916038.jpg“저긴가.”

만우는 용호군이 물 샐 틈 없이 호위하고 있는 전각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아직 왕이 침소에 들지 않은 듯 궁녀들과 내시들이 긴 줄을 이루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16553194916038.jpg“흡.”

숨을 짧게 들이마신 만우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이 사라졌다. ***

16553194886667.jpg“세자가?”

16553194886667.jpg“예, 전하.”

이찬이 고개를 숙였다. 왕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썼다. 빈객 이내를 붙여 검을 빼앗고 제왕학을 가르치려 했는데 그게 역효과를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16553194886667.jpg“못난 놈.”

왕은 얼굴을 붉혔다. 차대의 왕이 되어야 할 세자가 본을 보이지 못하고 배워야 할 것은 자꾸만 피하면서 배우지 않고 있으니 걱정이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16553194886667.jpg“또한 하루 내내 음식도 입에 대시지 않았습니다.”

16553194886667.jpg“세자가 반항을 하는구나.”

열두 살의 세자의 돌발행동에 계방의 무인들은 전전긍긍하면서 속을 썩혔다. 동궁전의 나인들과 내시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세자가 저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날벼락을 맞는 것은 세자를 잘 모시지 못한 그들의 잘못이기 때문이었다.

16553194886667.jpg“되었다. 세자가 알아서 동궁전에서 나올 때까지 쌀 한 톨, 물 한 모금도 주지 말아라. 알겠느냐?”

세자가 반항을 하고 있었지만 왕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검을 배우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의 왕은 검보다는 책을 더 가까이 해야 한다. 검을 좋아하고 패거리들과 몰려다니며 연회를 즐기던 고려의 왕들이 어떻게 패망했는지 모두 지켜본 것이 지금의 왕이다. 그 때문에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의 기풍을 선망하여 명에서 유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그에 조선의 건국공신인 사대부들이 두 팔 벌려 왕의 행동을 환영했다.

16553194886667.jpg“경전이야 말로 왕이 되기 위한 세상의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이거늘.”

왕은 쯧하고 혀를 찼다. 왕은 문무겸전이었다. 동북면에서 아비를 따라 말을 타고 활을 날렸지만, 동시에 성균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 때문에 지금은 상왕이 된 부친이 얼마나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던가. 하지만 그 자랑스럽던 아들의 얼굴도 보기 싫다며 함흥으로 내려가신 뒤 서신을 보내는 족족 사람을 쏘아죽이고 있었다.

1655319499266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