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검주, 입궐!(2)2019.04.06.
그나마 괴검이나 괴권은 만우가 하는 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감령과 필두는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설미수 저택의 일복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은 익숙해졌지만 다른 이에게 하대를 듣는 것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나마 못 알아들을 때가 나았는데.’
차라리 조선말을 모를 때에는 저들이 무슨 말을 하건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만우의 강요에 의해 조선말을 배우고 난 다음에는 알아들을 수 있어서 오히려 더 힘들었다. 콱 마음 같아서는 다리를 분질러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자. 그러다가는 내 다리가 부러진다.’
단순무식한 감령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만우와의 대련은 끔찍했다. 앞으로도 말을 듣지 않거나 귀찮은 일을 만든다면 매번 대련을 할 것이라고 했으니 최대한 그런 경우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기다리라고 했다고?”
만우가 그렇게 했음에도 의심의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위사를 물러서게 만들었다.
“아, 왔나.”
설운을 본 위사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무뢰배들인 줄 알았는데 설운의 옷을 보니 계방 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금위 같은 막강한 권력은 아니지만 세자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이들이다.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신분도 확실했기 때문에 위사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세자저하의 손님이시네.”
“예. 알겠습니다.”
위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세자의 손님이라는데 막을 명분도 없었다. 설운은 만우 일행을 데리고 대문 옆에 난 작은 문으로 들어섰다.
“이쪽으로 오시게.”
광화문으로 들어갔지만 세자가 머무는 거처는 궁의 동쪽에 있었다. 그래서 세자가 머무는 거처를 동궁(東宮)이라 불렀다. 동궁은 세자와 세자빈이 머무는 자선당(資善堂)과 공부를 보고 정무를 담당하는 비현각(丕賢閣)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비현각 앞에 교육을 담당하는 춘방과 익위사들이 머무는 계방이 있었다. 비현각으로 가기 위해서는 계방을 지나쳐야 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만우 일행이 들어서자 계방 무인들이 분분히 일어섰다. 씨익. 문형일과 마익후, 감령과 필두가 그들을 보면서 씩 웃었다. 계방 무인들은 분한 눈으로 그들을 보면서 눈빛을 불태웠다.
“실력도 안 되는 것들이 뭘 쳐다봐.”
문형일이 말하자 마익후가 문형일의 말을 지적했다.
“우리는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는 지쳤으니까. 다 저들을 보고 있다.”
마익후의 말에 계방 무인들의 눈을 바라본 문형일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때 확실히 강렬한 모습을 보여준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감령과 필두였기 때문이다.
“물러서라.”
설운이 그들을 보면서 말했다. 계방 무인들은 설운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춤에 올려놓은 손을 내려놓았다.
“물러서라 하였다!”
설운이 목소리를 키우자 계방 무인들이 완전히 자세를 풀었다. 만우는 문형일과 마익후, 그리고 감령과 필두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한 짓을 벌이지 마라.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예. 대장.”
“알겠습니다, 만 대협.”
문형일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필두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세자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이쪽으로.”
만우 일행은 계방 무인들의 도전적인 눈빛을 받으며 계방을 통과해 비현각에 들어섰다. 비현각은 설미수의 저택에 비해서도 작은 규모에 속했지만, 심혈을 기울여 지은 궐의 일부분답게 고즈넉한 분위기가 흘렀다. 공부와 정무를 위해 만든 곳이라고 하더니, 정말 사방이 조용하고 아늑한 것이 책과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분위기가 났다.
“꼭 제갈세가에 온 것 같네.”
만우가 그렇게 말하자 문형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세가의 분위기가 딱 이러했다. 그들도 서책이라면 자다가 일어날 정도로 심각한 활자중독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세자저하. 만우와 그 일행들이 도착하였나이다.”
설운이 문 앞에 도착해 눈빛을 보내자 내시 한 명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우는 신기한 듯 내시를 쳐다봤다.
“남자가 여자 목소리를 내네.”
“몰라? 명에도 동창 그 놈들이 있잖아.”
“으으, 그 귀신들?”
감령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명을 세운 주원장은 무림인의 유용함과 그 강함에 홀딱 반해 버렸다. 그래서 황실과 인연이 닿은 소림과 무당에서 몇몇을 초빙하여 황궁 내 무공을 익힌 집단을 만들었다. 그들이 바로 동창이다. 황제를 바로 가까이서 모시는 환관들. 유사시에는 황제를 보필하고 지켜야 하는 이들이 무공을 배우게 된 것이다. 환관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며 괄시를 받던 이들이 힘에 집착한 것은 당연했고 그 집착으로 힘을 얻은 동창에게 황제는 권한을 밀어주었다. 어차피 자신의 명에 죽고 살며 가장 가까이서 평생을 보내는 환관들이니 가장 믿을 수 있는 그들에게 감찰(監察)의 역할까지 맡겼다. 그 때문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 동창 앞에서는 관과 무림 간의 상호 불가침 조약도 안중에 없다. 황제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그들은 무림인도 당연히 명나라에 속한 백성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이 명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을 획책한다면 그조차도 망설임 없이 단죄를 했기 때문이다. 거시기 없는 환관들이라고 무시했다가 그런 그들에게 혼난 문파가 여럿이었다. 당연히 그중에는 황제에게 올라가는 진상품을 털어보았던 산채와 수채들도 여럿 껴 있었고. 그런 산채와 수채들이 하룻밤 안에 모조리 털린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령과 필두도 동창이라면 혀를 내둘렀다.
“조, 조선에도 그런 놈들이 있는 거 아니야?”
감령이 주변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동창 특유의 음흉하면서 한기가 섞인 기운을 풍기는 이는 없었다.
만우는 비현각 안으로 들어서면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먹향과 종이의 향기가 뒤섞여 만우의 콧속을 휘저었다.
“부르셨습니까, 세자저하.”
그곳에는 세자 복장을 한 양녕, 세자가 자못 점잖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는 찰떡처럼 충녕대군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내 그대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불렀다.”
만우는 세자 앞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세자의 앞이라고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린 다른 이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자세였다. 하지만 이미 그런 만우를 한 번 겪어본 세자나 충녕대군은 놀라지 않았다. 단지 설운만이 흠칫하면서 놀랐을 뿐.
“저하께서 무림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듣자하니 너는 대국에서 무림이란 세계에 있었다지?”
“그렇사옵니다.”
만우는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솔직하게 밝혔다. 그러자 충녕대군의 눈에서 불이 뻗쳤다.
“하지만 이 미천한 것의 이야기는 저 아랫것들의 이야기라 세자저하와 대군마마의 귀를 더럽히는 것이 아닐까 저어되옵니다.”
표정은 전혀 그것이 아니었다. 귀찮다는 빛이 두 눈 가득히 일렁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아본 충녕대군은 불쾌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두 눈을 빛냈다.
“그대의 눈을 보니 필히 무림이란 곳에서도 높은 곳에 있었던 것 같구나. 그곳은 핏줄이 아니라 가진 바 무력으로 서열이 정해진다고 들었다.”
“쇤네는 중원을 유랑만 하였기 때문에 들려드릴 말씀이 많이 없사옵니다. 허나.”
만우는 충녕대군의 말을 씹었다. 세자가 아니라 대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는 충녕대군이 불쾌해하기 전에 얼른 다른 것을 내밀었다.
“이들은 모두 그곳에서 이름을 드높였던 자들이옵니다. 이자는 산적의 왕이고 이자는 수적의 왕이었습니다.”
“호오! 그곳에는 도적놈들의 왕이 있단 말이냐!”
만우가 감령과 필두를 가리키며 그리 말하자 세자와 충녕의 눈가에 빛이 맴돌았다.
“고얀 놈들이지만 내 흥미가 돋는구나!”
왕을 참칭한다는 것은 중죄 중에 중죄다. 특히 조선의 경우에는 산적이나 수적 따위가 임금과 같다고 하는 것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자는 그것마저도 흥미로운 것인지 눈을 더 크게 뜨고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저자는 대진국에서 온 자이옵니다.”
만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익후도 팔았다. 자신의 입으로 이런 귀찮은 짓을 하느니 이들을 팔아넘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자는 흉노. 흉노의 핏줄이옵니다. 그것도 선우의 핏줄이지요.”
“오, 오오!!!”
만우의 소개에 세자와 충녕대군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몹시 기꺼웠던 것이다. 명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대진국과 흉노의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다.
“쇤네의 이야기는 보잘 것이 없어 세자저하와 대군마마의 귀를 더럽혀질까 걱정이 되어 이들을 데려왔나이다. 이들이라면 두 분께 조선 최고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옵니다.”
“좋다! 좋다!! 하하하!!”
세자가 탁자를 두드리면서 웃었다. 하지만 네 명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다. 하지만 만우는 그런 그들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했다. 이미 만우에 대한 세자와 충녕의 관심은 이 네 명에 대한 화제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특히나 이야기나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충녕대군의 호기심이 더 컸다.
“그럼 쇤네는 물러가겠나이다. 좋은 시간 보내시옵소서.”
기둥서방이 기생을 넣어주고 할 법한 소리가 만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만우는 입을 떡 벌리고 배신당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넷을 보면서 전음을 보냈다.
[보모 역할을 내가 하리?]
[하, 하지만 그렇다면 한 명만 해도…….]
그랬다. 만우에게 있어 이 일은 보모 역할에 불과했다. 저 어린 것들 앞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만우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만 아니면 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들 중 누구만 빼주는 것도 형평성에 어긋나고.]
만우가 언제부터 형평성을 따져가면서 저들을 대했는지 모르지만, 이번만은 확실했다. 만우는 이번에 아주 공평하게 네 명에게 모두 귀찮은 일을 선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그냥 귀찮은 일이 아니라 무려 왕족을 상대해야 되는 일이다. 중원에서는 이름을 날리는 고수인 그들이, 머슴과 위사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도 모자라 왕족 앞에서 재주까지 부리게 된 것이다.
[난 간다. 잘못해서 괜히 눈 밖에 나지 마라. 여긴 궁이다. 아무리 너희들이라도 사고치면 수습하기 힘들어.]
[마, 만 대협!]
[대장님!!]
다른 때 같았으면 한 번에 한 명이 아니라 네 명에게 동시에 전음을 보냈다는 것에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툭. 만우가 설운과 함께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리고 네 명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럼…… 누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느냐.”
그런 네 명의 앞에는 얼른 이야기를 시작해 보라며 재촉하는 열두 살짜리와 아홉 살짜리 남아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저 두 분의 호기심은 임금님께서도 꺾지 못하시는데…….”
설운이 멋지게 그 둘의 관심을 자신으로부터 돌린 만우를 보면서 감탄했다. 만우는 고개를 돌려 설운을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그렇지. 대단하지?”
“그렇다.”
만우와 단둘이 남게 된 설운이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설운도 만우는 껄끄럽기 때문이었다.
“어제 튀었더라?”
“튀어? 내가? 내가 어디서 뭘…….”
순간 설운의 표정이 변했다. 얼음물에 온몸을 담그고 나온 것처럼 창백해진 것이다.
[대련이다. 너희 전부. 설운까지.]
설미수의 저택 앞에서 난리를 피운 설운과 나머지를 향해 만우가 분명 그리 말했었다. 하지만 설운은 세자를 호위해야 했기 때문에 대련 없이 그냥 궐로 돌아갔다. 그 이야기를 만우가 꺼낸 것이다.
“그, 그게 아니라…….”
“아까 내가 형일에게 그리 말했다.”
문형일이 그 네 명 중에 하나란 것은 설운도 알고 있었다.
“누구 한 명을 빼주는 것도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설운은 만우의 얼굴에서 악마의 형상을 보았다. ***
“반란?”
임금의 검미가 하늘 높게 치솟았다. 그러자 그의 앞에 부복한 파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선의 3대 임금이 되자마자 강력한 개혁정책으로 조선의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틀어쥔 임금은 노련함과 잔혹함을 겸비한 강건한 군왕이었다. 그 조차도 건국공신이었기 때문에 다른 건국공신들도 현재 임금 앞에서는 입 한 번 뻥긋하지 못 하는데, 한낱 파발 따위가 편히 입을 열 수 있을 리 없었다.
“증좌는?”
임금이 두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임금의 앞에 이번 사건의 전후 사정이 적힌 서찰이 펼쳐졌다.
“이, 이익!!!!”
그 상소를 읽은 임금이 분노하여 서찰을 내던졌다. 그러고는 분노를 토해내며 소리쳤다.
“당장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상세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일이 거짓이라면 이딴 일로 내 심기를 어지럽힌 이의 구족을 멸할 것이다!”
임금의 진노에 조정에 선 신하들의 목이 한 뼘이나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이 퍽 웃겼지만 임금의 분노는 그 정도로 거대하고 대단했다.
“대체 하늘 아래 어떤 아비가 아들을 죽이려고 한단 말이냐!!!”
“통촉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