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검주, 입궐!(1)2019.04.02.
“그래. 무림맹도 움직였다고?”
마군자 마원은 고개를 숙였다. 무언의 긍정이다. 혈세천마는 클클거리며 웃었다.
“재밌게 돌아가는구나.”
“예. 하오문에서 개방의 정보력을 너무 우습게 본 듯싶습니다.”
“그렇지. 제법 신경을 쓴 것 같다만.”
하오문에서는 개방의 정보력을 우습게 봤다. 은밀하게 움직이기 위해 가짜 정보를 퍼뜨린 것은 좋았지만 개방은 삽시간에 이상함을 눈치채고 역으로 하오문의 움직임을 주시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하오문의 정보망이 조선으로 향한다는 것을 무림맹에서도 눈치챘다.
“중원의 기상이니 뭐니. 또 그런 이야기를 지껄였겠지. 보나마나 하오문에게서 그것을 빼앗거나 부수기 위해 갈 것이고.”
“예. 속하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끌끌끌. 오대세가라 부르는 것들도 전부 중원 밖에서 들어온 놈이거늘.”
모용세가는 북방계의 핏줄이고 황보세가도 비슷하다. 그리고 소림의 기원인 달마도 천축국의 사람일지도 모르는 판에 중원의 것을 지켜야 된다고 아우성치는 정파놈들의 악다구니가 머릿속에 훤히 펼쳐졌다.
“그래도 상대가 하오문이니 무리는 하지 않았겠구나.”
“예. 허나 하오문의 뒤를 따라 다른 중소문파의 고수들이 조선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에 걸맞는 인력으로 구성했다고 합니다.”
“그래?”
그쪽에도 제갈세가라는 버팀목이 있으니 그렇게 허술하게 조선행의 구성원을 짜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산파의 매화극검 검인을 수장으로 삼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고수 한 명씩을 포함하여 열다섯 명으로 행장을 꾸렸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정의대(正義隊)라 칭하였습니다.”
“호오.”
혈세천마의 눈이 번뜩였다. 확실히 그 정도면 조선에서 그들의 앞을 막을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말이 열다섯 명의 고수라는 것이지 각 문파에서도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한가락 하는 이들만 보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매화극검은. 검주 때문에 가는 것인가?”
“예. 또한 북경제일도도 자원하였다고 합니다.”
“아. 검주가 마지막으로 깨부수고 간 그놈 말하는 겐가?”
북경제일도라는 그럴듯한 위명을 날리고 있었지만 마교 고수들의 눈에는 그냥 하북의 애송이일 뿐이었다. 검주의 마지막 제물이 된 불쌍한 놈.
“끌끌. 사파는?”
“사림곡에서도 조선으로 인원을 급파한다 하였습니다.”
“좋구나. 중원에서 벌일 일이 없으니 조선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인가?”
조선은 무림이 없지만 그곳은 관이 지배하는 나라다. 하지만 동시에 조선은 돈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명에서도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삼과 청자를 생산하는 나라였으니까. 나라라고는 하지만 명에게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몇몇 이들은 조선을 명의 또 다른 주(州)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애초에 나라 자체가 딱 중원의 주(州)와 비슷한 크기였기 때문이다.
“사파의 기린대가 조선으로 향하였습니다.”
“기린대(麒麟隊)?”
기린대라는 소리에 혈세천마가 끌끌거리며 웃었다. 무림맹의 정의대를 의식해서 파견하는 고수들이었다. 기린대라면 삼십 명의 고수로 구성된 사파 거두 교수의 직속 친위대 중 하나로 무림맹의 정의대와 비슷한 수준의 전력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저희도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원이 조심스럽게 혈세천마에게 물었다. 그러자 혈세천마가 끌끌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꽤나 시달린 모양이구나, 군사. 그대가 그렇게 물어볼 정도라면.”
“송구스럽지만, 몸이 닳은 이들이 있습니다.”
“투귀대(鬪鬼隊)놈들이렷다.”
“예. 교주.”
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주인 혈세천마가 단박에 그들을 떠올릴 정도로 그들은 마교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골칫덩어리들이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싸우지 못해 안달이 된 이들이 그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이 중원의 고수들이 일제히 조선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과 손속을 겨루고 싶어 아마 지금쯤 온몸에 쥐가 날 지경일 것이다. 그러니 마원을 우르르 찾아가 사정사정을 한 것일 테고.
“클클클. 한 번쯤은 나갔다 와야겠지.”
“소교주께서 괜찮으실까요?”
투귀대는 마교의 체계에 정식으로 포함되어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마교 최고의 전투집단인 투신대(鬪神隊)에 들고자 하는 후기지수들이 만든 일종의 친목 집단이었다. 단지 그 친목집단의 우두머리가 소교주라는 것 때문에 웬만한 전투부대 못지않은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만. 강자존이라는 마교의 율법 앞에 투귀대는 스스로 실력을 갈고닦으며 내부에서 서열 정리를 하였고, 기준에 들지 못한 이들은 알아서 쳐냈기 때문에 투귀대는 흡사 소교주의 개인 단체처럼 여겨졌다. 여덟. 후기지수들의 모임이라고 하지만 웬만한 고수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무위를 가진 후기지수들이 속한 모임이었다. 그중 단연 발군은 혈세천마의 아들인 소교주 마얼(魔孼) 주창이었다. 그는 아직 후기지수임에도 불구하고 마교 서열 100위 내에 들 정도로 무공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보다 약간 못한 이들이 일곱 명. 여덟 명으로 이뤄진 투귀대는 투신대에는 미치지 못 하지만 나름대로의 명성을 얻어가고 있었다.
“보내라.”
“허면…….”
“대신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은 허락지 않는다 하라.”
“어떤 것을 원하시나이까.”
마교의 교주인 천마는 마교도의 신이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천마란 신의 무공인 천마신공을 익혀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신인 것이다. 그 신이 말했다.
“검주의 목.”
혈세천마의 비정한 목소리에 마원이 순간적으로 멈칫 했다. 아무리 투귀대가 마교 내에서도 손꼽히는 무력 조직이라고 하지만 구성원이라고 해봤자 후기지수 여덟 명이다. 물론 그 여덟 명이 어리다고 해서 약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투귀대라면 능히 정의대의 절반이나 기린대의 절반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로 검주를 도모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아직 잊으시지 못한 건가.’
마원은 혈세천마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원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존명!”
마원의 허리가 구십 도로 꺾이며 우렁찬 소리가 튀어나왔다. ***
“넌 왜?”
“왜. 나도 궁궐 좀 구경하게.”
만우의 말에 방매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원기를 회복한 문형일과 마익후, 그리고 감령과 필두가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설미수도 만우에게 은혜를 입고 그를 깍듯이 은인으로 모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봤음에도 방매가 만우를 대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그냥 같은 평민. 만우가 그냥 평민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만우의 수하를 자처하는 문형일과 마익후, 그리고 감령과 필두가 계방 무인들과 싸우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대단하다. 저걸 신경이 두껍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뻔뻔하다 해야 할지…….”
“강심장이다…….”
문형일의 말에 감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시선이 마주친 둘이 고개를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돌렸다.
“이게 조선의 왕이 사는 궁이구나. 작네.”
“수채보다도 작군.”
마익후와 필두는 광화문을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중국에서 황제가 사는 궁을 보고, 궁보다 큰 수채에서 살았던 둘에게는 작아만 보였다.
“넌 들어가서 뭐하게.”
만우가 방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러자 방매가 씩 웃었다.
“원래 나 같은 매분구한테는 인맥이 밥줄인 법이야. 그쪽 덕분에 이번에 마님께 많이 팔았지만, 그래도 그냥 놀 수는 없지.”
방매는 궁을 지그시 쳐다봤다. 만우는 피식 웃었다. 결국 매분구로 발을 넓히기 위해 궁에 들어갈 생각이란 소리였다.
“항아님들이나 궁녀님들은 이런 데 엄청 민감하다니까? 그쪽이 여자가 아니라서 몰라요, 몰라.”
궁의 여인들이 화장품을 구할 곳은 이런 매분구를 통해서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한양제일매분구라는 방매가 궁 쪽의 인맥을 잡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양제일매분구라면서.”
“그런데 난 혼자잖아. 궁 쪽은 내가 뚫기 힘들어.”
매분구들이 흔히 물건을 파는 대상은 기생들이나 대갓집 마나님들이다. 그나마 방매가 한양제일매분구라는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에 마나님들이 만나주는 것이지 아니라면 기생들밖에 손님이 없다.
“궁은 그쪽에 뭐 하나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내가 보다시피 혼자 다니잖아?”
방매는 혼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의 고충을 우르르 늘어놓았다. 만우는 멈추지 않는 방매의 입에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을 후회했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돈 벌어서 뭐하게.”
방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단편적인 정보는 하나였다. 열심히 사는 여자라는 것과 천애고아라는 것.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부양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일까.
“부모도 없는 여자가 혼자 살려면 돈이라도 많아야지. 늘그막에 누울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하려면.”
“현실적인 이유네.”
“사람은 원래 현실적이어야 하는 법이야.”
방매는 손가락을 흔들면서 그렇게 말했다. 만우는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인 대답에 피식 웃었다. 흡사 낭인으로 십 수 년을 구른 삼류 무인과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다.
“아니 대장님. 우리는 어쩌고 이런 떨거지들을 받으신 겁니까. 저희를 정녕 버리시려고 하셨습니까?”
방매와 대화를 하던 것을 끊고 들어온 문형일이 만우에게 말했다. 그러자 만우가 문형일을 쳐다봤다. 그냥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문형일이 움찔했다. 오랜만에 당한 몽둥이찜질이 떠오른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대련이나 비무라고 했지만 누가 봐도 그건 일방적인 구타였다.
‘네 명이 덤벼들었는데도.’
문형일과 마익후만 달려든 것이 아니라 감령과 필두도 덤벼들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만우가 그렇게 해서 한 대라도 때리면 봐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 명의 초절정 고수가 덤벼들었는데도 만우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만우는 칼이 아니라 나무 몽둥이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왜. 떨거지한테 맞고 싶어 괴검?”
“하. 이 산적 새끼가.”
감령의 사나운 목소리에 문형일이 금세 이를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렸다. 지금 둘은 밥그릇 싸움을 하고 있었다.
“말려야 되는 것 아닌가?”
“안. 말린다.”
감령과 문형일은 성격이 겹쳤다. 하지만 마익후와 필두는 아니었다. 마익후는 보이는 그대로 순박하다 못해 생각이 없었고 필두는 보기와는 다르게 약삭빨랐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경쟁 대상이 아니란 것을 금세 알아챈 것이다.
“멍청이들은 멍청이들끼리.”
“흠. 그거 좋은 생각이구만.”
마익후가 그렇게 말하고는 외면하자 필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서툴러서 그렇지 마익후도 바보는 아니었다.
“거기! 경거망동하지 마라!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문형일과 감령이 서로를 보면서 으르렁거리자 궁문을 지키던 위사가 눈을 부라렸다. 내공을 익힌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궁을 지키는 위사답게 눈에서는 엄정한 기운이 흘렀다.
‘나쁘지 않네.’
이 정도면 충분히 정병이다. 만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하하. 알겠습니다, 나리.”
만우가 허리를 굽히면서 굽실거리자 문형일과 감령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방매는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저들은 비록 궁문이나 지키는 위사지만 일반 평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권력을 누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안 되겠다. 너희들 아무래도 수상해. 조사를 해봐야겠다.”
만우나 감령, 문형일은 덩치도 크지 않고 겉으로만 봤을 때는 눈에 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익후나 필두는 아니었다. 색목인인 마익후는 물론 웬만한 산적도 한 수 접어줄 것 같은 필두의 험상궂은 생김새에 위사가 의구심을 품은 것이다.
“아, 아닙니다. 저희는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하셔서 서 있는 것입니다.”
괜히 문제를 일으키기 싫었던 만우가 얼른 나서서 말했다. 그러면서 뒤로 살기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네 명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헤헤. 보셨지요?”
만우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네 명의 얼굴은 거무죽죽하게 죽었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