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검주와 왕의 자식들(1)2019.03.19.
만우는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는 설미수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만우의 표정을 본 설미수와 설운이 안절부절못한 표정을 지었다.
“으…… 은공. 이쪽에 계신 분이…….”
“잠깐 내 소개는 내가 하도록 하지.”
만우는 나이에 비해 덩치가 크고 공부보다는 나가 노는 것을 더 좋아하게 생긴 세자와 그 옆에 똘망똘망한 눈으로 앉아 있는 그의 동생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하셔도 됩니다.”
만우는 설운을 쳐다봤다. 설운은 만우의 그런 표정을 애써 외면했다.
“세자 저하와 대군마마. 아니십니까?”
만우가 둘을 알고 있자 세자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세자와 충녕은 그들이 궁에서 입는 복장이 아니라 일반 양반집의 자제들이 입을 법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윤도와 비슷한 의복이었기 때문에 만우는 그 둘이 변장을 하고 나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설운 하나만을 호위로 달고.
‘정상적인 외출은 아니네.’
세자와 그 동생이 궐 밖으로 나간다는데 고작 설운 한 명만 호위로 붙을 리 없다. 세자익위사들이 총출동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맞네.”
세자는 약과를 집었다. 만우는 설미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그런데 하나 질문이 있습니다, 설 부사.”
설미수가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영특하게 생긴 충녕이 입을 열었다. 그는 설미수와 만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내 설 좌익찬에게 듣기로 저자는 평민이라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설 부사께서는 저 평민에게 말을 높이시는 겁니까.”
“…….”
설미수는 벼락을 얻어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우는 그냥 평민이 아니었다. 아주 가깝게는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자신의 부인의 병을 단박에 치료해준 사람이자 크게는 중원에서는 가장 강한 열 명의 무인 중 한 명이 아니던가. 조선에 돌아온 후 설미수가 무림이란 세계에 찾아본 뒤로 그는 만우에게 더욱 깍듯하게 대했다. 조선이 붓으로서 모든 것이 정해지는 곳이라면 명나라 속 중원무림이란 세계는 칼로서 모든 것이 정해지는 곳이었다. 그는 유학자로서 무(武)란 나라의 국방을 지킬 수 있을 정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의 정점을 찍은 자들을 폄하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중원무림에서는 가장 강한 자가 황제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명나라 주원장이 명을 세우면서 소림사의 방장과 무당파의 장문인을 왕후의 예우로 대접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은공은 그들보다 윗선이다.’
만약 강함으로 중원무림이란 곳의 신분이 정해진다고 한다면 만우는 소림방장이나 무당의 장문인보다 위였다. 현재 무림십좌로 불리는 이들 중에 그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설 부사. 제 질문이 곤란한 것입니까?”
충녕의 눈에는 아이답지 않은 호기심이 반짝였다. 세자는 충녕의 말에 이제야 그것을 알았다는 듯 만우를 쳐다봤다.
“설운.”
“예. 세자저하.”
“충녕의 말이 타당하다. 어찌 생각하느냐.”
갑자기 불똥이 자신에게 튀자 설운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물론 세간에서 말하는 반상(班常)의 도가 맞기는 맞았다. 하지만 만우는 평범한 평민이 아니다.
‘애초에 무림인들 대부분이 평민인데.’
무림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아니었다.
“세자저하. 그리고 대군마마. 여기 만 대협의 중원 이야기를 듣고 싶다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설미수는 차라리 화제를 돌리는 방법을 택했다. 만우는 그런 설미수를 쳐다봤다. 만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설미수는 필사적이었다.
“맞아. 그것을 들으러 왔지. 그대는…….”
세자가 설미수의 그런 수법에 넘어가 화제를 돌리자 충녕도 수긍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궁금하단 눈빛으로 만우를 쳐다봤다.
“만우라 하옵니다, 세자저하.”
만우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 만우는 당당했다. 평민인데 세자와 대군 앞에 양반다리로 앉아 고개만 까닥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의 예의를 탓하는 것보다 세자는 명나라 이야기가 더욱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래. 명나라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느냐?”
만우는 한참 어린아이 두 명이 양반들이 쓸 법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 몸에 베인 어른 말투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으실 겁니다. 신분이 미천하여 제가 보고 들은 것들은 전부 미천한 이들의 삶입니다.”
무림인들 대부분이 평민들이니 미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맞다. 소위 말하는 오대세가가 아니라면 구파일방도 종교인이지 귀족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괜찮네. 내 황하강과 양자강이 참으로 궁금하였는데 그곳은 어떠한가.”
만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선에서 평온하게 살기로 했으니 이 왕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영락없이 이야기꾼이 되어야 하나하고 고민하는 찰나, 바깥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
만우가 고개를 돌리자 설운의 고개가 곧바로 돌아갔다. 그도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러자 설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자저하. 그리고 대군마마. 잠시 안쪽으로 피하시지요.”
“무슨 일인가.”
설미수가 설운에게 물었다. 설운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만우가 말했다.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싸우는 소리?”
설미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곳은 북촌이다. 조선에서 힘 있는 관료들이 모여 사는 동네란 소리다. 이런 동네에 싸우는 소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법이다.
“다수와 소수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쪽으로 오고 있군요.”
만우는 태연했다. 그의 기감은 지금 싸움이 바로 설미수 저택의 대문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소수는 약 세 명. 그리고 나머지는 약 스무 명 남짓.
“원한이라도 사셨습니까?”
만우가 설미수를 쳐다봤다. 설미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면 세자께서 이쪽으로 오신다는 소리가 어딘가로 흘렀거나.”
“그럴 리가. 아니, 그렇다고 해도 세자 저하를 어찌하여.”
설운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왕조와 비교해도 현재 왕의 왕권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세울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현재 왕의 손에 의해 사실상 조선이 건국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현재 조정은 왕에게 충성을 받쳤던 충신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은 왕의 한마디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의 충신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왕의 혈족을 노린다? 죽으려고 자살할 생각이 아니라면야 불가능한 소리다.
“잠시 살펴보고 있겠습니다. 설 부사, 세자 저하와 대군마마를 부탁드립니다.”
설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패검하고 있는 상태였다. 설미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만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
“자, 자네도 갈 셈인가?”
설운은 자꾸만 만우만 보면 존댓말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참았다. 그만큼 만우가 설운에게 선사해준 충격이 작지 않다는 뜻이다.
“끙. 내가 아는 사람인 것 같소.”
만우는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만우의 고개가 홱하고 돌아갔다. 저택 안에서 쏜살같이 움직이는 두 개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아는 사람이 늘어났소.”
감령과 필두다. 그 둘이 일어난 싸움을 피할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신이 나서 구경하러 갔을 수도 있다. 조선말을 배우기 위해 하루 종일 방 안에만 처박혀 있는 것은 그들에게도 고역이었으니까.
“아는 사람?”
설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만우는 그런 설운에게 말했다.
“몰려온 다수가 세자익위사인 것 같소만. 안 나가셔도 됩니까?”
“뭐, 뭐라?”
설운이 눈을 크게 떴다. 세자익위사라니. 그렇게 궁에서 조심스럽게 나왔는데 세자익위사, 혹은 계방이 따라왔다는 소리다.
“좌익위께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설운이 바람이 나도록 몸을 돌렸다. 누구를 떠올렸는지는 모르지만 만우처럼 두려운 대상인 모양이었다. 아마 상사이리라. 만우도 그런 설운의 뒤를 따라 방에서 걸어 나갔다. 하지만 만우는 세자와 충녕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런 예의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무뢰배가 아닌가.”
세자는 인상을 쓰면서 불쾌해했지만 충녕은 아니었다. 충녕은 세자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무뢰배라고 하기에는 여유가 흐릅니다. 무뢰배라면 거들먹거리며 자신을 과장하기 마련인데 저자는 귀찮은 기색만이 역력하더이다.”
“귀, 귀찮아? 우리가 귀찮다는 말이냐?”
충녕의 말에 세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세자와 대군이었다. 조선의 그 어떠한 사람들도 그들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아니, 설령 귀찮다 하더라도 그것을 드러낸 사람은 없다. 설미수는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충녕의 관찰력에 혀를 내둘렀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자 같습니다. 아닙니까, 설 부사?”
충녕이 설미수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설미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충녕의 통찰력이 이렇게 뛰어날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 했다.
“정말입니까 설 부사? 저자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
세자까지 관심을 가지자 설미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만 대협, 아니 만우 대협은…….”
***
“이…… 이 떨거지들은 뭐야 대체.”
마익후가 두 주먹을 들어 올리면서 날아드는 검격들을 빗겨냈다. 절정에 달한 그의 이화접목에 마익후를 향해 날아들던 검격들이 마치 그의 손에 딱 달라붙은 듯 마익후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계방의 무인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은 홀로 습격자들을 상대하도록 배우지 않았다. 그들의 주된 업무는 경호 대상인 세자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 그 때문에 마익후를 향해 후미의 무인들의 검격이 날아들었다.
“이익!”
마익후가 날아드는 검격을 보면서 온몸에 힘을 줬다. 한두 군데쯤은 베일 각오를 한 것이다. 그의 신체는 강건해서 검상을 입더라도 조금만 요양하면 나으니까.
“에익!”
하지만 마익후의 몸에 검날이 박혀드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익후의 뒤에서 다른 무인들을 상대하고 있던 문형일이 기형적으로 날이 달린 검으로 그들의 검을 쳐냈기 때문이다.
“제 힘이 안나.”
“나도!”
문제는 그 둘의 컨디션이 지금 엉망이라는 것이었다. 몇 개월 동안 바다를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체력과 내공이 모두 바닥이었다. 제대로 운기조식을 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긴 표류로 인해 둘은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스무 명이 넘는 계방 무인들의 합격술을 막아내고 있었다.
“저놈들은 대체.”
이들을 이끄는 익위사 이찬은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설운 그 멍청한 놈은 세자저하와 대군마마를 모시고 이런 곳에 오다니.”
이런 곳이라고 하기에는 경복궁 다음으로 치안이 좋은 북촌이었지만 계방은 아주 티끌만한 위험이라도 세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지키는 것이 주 업무다. 그랬기 때문에 이찬에게는 경복궁 바깥은 모두 위험한 곳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궁문으로 세자저하가 나가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위솔과 부솔, 시직과 세마까지 모두 이끌고 설미수의 저택으로 달려왔다.
“으아아아!!!”
그런데 설미수의 집 앞에서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이들과 조우했다. 방매가 그들을 데리고 오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마치 방매가 그들에게 납치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세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이라면 일단 배제를 하고 보는 이찬의 명령 하에 이들이 달려들었다. 일단은 제압하고 무고하다면 돈 몇 푼과 함께 풀어주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 몰아쳐라!”
하지만 그런 이찬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이 괴한, 문형일과 마익후의 실력이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몹시 지친 상태로도 능히 계방 무인들의 합격술에도 버티는 것을 보니 저들의 본 실력이라면 계방 무인들을 가볍게 누를 수 있다는 뜻이다.
‘위험한 놈들이다.’
저런 무예를 가진 이들이 한양에 버젓이 돌아다니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웬만큼 무예가 고절하다고 소문난 무사들은 전부 포도청과 내금위에 의해 모든 관청에 공유되고 있었는데 저 둘은 처음 보는 자들이었다.
“차!!!”
심지어는 그들에게 납치되었다 생각했던 방매도 만만치 않았다. 문형일과 마익후의 뒤를 지켜주는 정도였지만 보법과 발기술이 비범한데다 여인이었기 때문에 무인들이 함부로 공격을 하지 못했다.
“어디서 온 놈들인지 알아야겠다. 쳐라!!!”
이찬은 소리를 쳤지만 문형일과 마익후는 조선말을 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계속 같은 상황만 되풀이 된 것이다.
“익위사님!!”
그 때 설미수 저택 안에서 설운이 뛰어나왔다. 이찬은 그런 설운을 보고는 소리쳤다.
“좌익찬!!!! 이런 위험한 곳에 세자 저하를 모시고 온 이유를 소상하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끄, 끄응…….”
설운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죽었다. 이찬은 규칙을 절대신봉하는 원칙주의자다. 그만큼 잔소리가 심했다.
“차압!!”
일단 설운이 문형일과 마익후를 향해 달려들었다. 설운은 종6품의 좌익찬이었지만 그 실력은 계방 무인들 중 가장 뛰어났다. 익위사인 이찬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으나 그도 절륜한 무인이었기에 그의 합세에 문형일과 마익후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