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사짜 기술사(氣術士)(4)2019.03.16.
“이 개 같은 마익후…….”
문형일이 마포 나루터를 기어 올라오며 길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옆에는 같은 포즈로 마익후가 널브러졌다. 괴검 문형일과 괴권 마익후. 검주 만우를 수족처럼 따랐던 그 둘이 이제야 한양에 도착한 것이다.
“뭐? 이렇게 가면 검주보다 먼저 온다고? 왜. 아예 검주보다 먼저 저승을 간다고 하지.”
“말할 기운. 없다.”
문형일과 마익후는 완전 물에 빠진 생쥐꼴이었다.
“에이씨. 너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문형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 눈물겨운 여정이었다. 조선으로 돌아가겠다는 서찰 하나만 남긴 채 훌쩍 떠났던 검주를 무작정 쫓아 나왔던 둘이다. 만우가 그 둘을 함께 대동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 둘은 스스로를 만우의 수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만우는 그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형일은 북방계 선비족 선우의 핏줄이었기 때문에 미래의 부족을 책임져야 했고, 마익후는 고향인 대진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원을 떠도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만우는 그 둘이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는 생각에서 그 둘에게도 서찰 하나만 남기고 떠났다.
“자연재해는 나도 예측할 수가 없다.”
마익후는 얼굴을 훔쳤다. 그렇게 한 번 마음을 먹고 떠난 만우에게 데려가 달라고 해봤자 거절할 것이 뻔했기에 둘은 다른 계획을 세웠다. 검주를 앞질러 미리 조선에 도착해 만우의 조선 정착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미리 닦아놓자. 그렇게까지 하는데 만우가 자신들을 외면할 리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육로로 떠난 만우보다 먼저 조선으로 오기 위해 해로를 선택했다. 북경에서 산동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배를 타고 조선으로 건너오는 길이 육로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간과했다. 뱃길의 험난함. 예측할 수 없는 자연. 이 두 가지가 문형일과 마익후의 여정에서 동시에 그들을 덮쳤다. 평생을 육지에서만 살아온 둘에게 뱃길이란 것은 매일 매일이 멀미의 연속이었다. 거기에 예상치 못한 폭풍우까지. 그 폭풍우 때문에 조선으로 향하던 배가 뱃길을 잃고 한참을 바다 위에서 표류를 하다가 조선의 군선을 만나 간신히 조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배는 쳐다보기도 싫다. 생각만 해도 싫어.”
무려 오 개월을 배를 타고 온 바다를 표류했다. 그 와중에 이제 비린내만 맡아도 토가 나올 정도로 생선을 잡아먹었고 물만 봐도 질릴 정도였다.
“땅이야. 땅이라고.”
기진맥진한 그 둘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나루터 한복판에서 아예 뻗어버렸다. 그냥 흔들리지 않는 땅 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둘은 행복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괴검과 괴권은 무림십좌에 들지는 못 했지만 초절정의 끝자락에 있는 낭인이었다. 괴검은 흉노의 선우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실전검술을 배운 실전의 대가였고 괴권은 대진국에서 그가 ‘레기온’이라 불리는 군단의 병사들에게 가르쳤던 박투술의 대가였다. 무당의 권이나 소림의 권처럼 부드럽거나 강맹한 초식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전신을 이용해 최적의 효율로 적을 살상하는데 모든 심혈을 기울이는 살권이었다. 그런 둘이 넝마주이가 되어서 조선의 저잣거리에 거렁뱅이처럼 드러누웠다고 한다면 이 말을 누가 믿을까.
“응? 뭐야 이 아저씨들은?”
그런데 그때 문형일과 마익후의 귀에 통통 튀는 듯한 가벼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형일과 마익후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발랄한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어? 이 아저씨는 색목인이네.”
방매. 한양제일매분구인 방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익후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꼬르르륵!!!!
몇 개월간 생선만 잡아먹은 문형일과 마익후의 배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거세게 울려 퍼졌다.
“헤에. 배고픈가 보네.”
“으…… 먹을 것 좀.”
“나도…… 죽겠네.”
심한 풍랑에 휘말렸기 때문에 당연히 문형일과 마익후에게 남아 있는 돈이라고는 단 한 푼도 없었다.
“명나라 말인가?”
게다가 더욱 치명적인 것은 문형일과 마익후가 조선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씨 부인에게 가져다 줄 명나라제 매분 용품을 사기 위해 마포 나루터에 나왔던 방매는 곤란한 짐을 발견한 느낌에 볼을 긁적거렸다.
“아저씨들. 조선말 몰라요? 조선말?”
문형일과 마익후는 방매를 올려다보면서 눈망울만 반짝였다. 문형일은 물론 대진국에서 온 마익후은 한어도 간신히 배웠다. 조선말을 알고 있을 리 없다.
“아우. 이 사람들을 어쩐다?”
방매는 자신만 간절하게 쳐다보는 둘을 보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마님이 기다리실 텐데.”
그렇다고 이 둘을 데리고 북촌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씨 부인과 설미수가 방매를 어여쁘게 봐줬기 때문에 출입이 가능한 것인지 설미수는 최고위층 관료였다. 잘해준다고 해서 그 사실을 잊으면 그 순간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법이다.
“끄응…….”
방매가 앓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
“자. 저건?”
“음…….”
감령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자 필두가 재빨리 끼어들어 얄밉게 말했다.
“닭입니다.”
“그렇지.”
만우가 씩 웃으며 당과 하나를 내밀었다. 그러자 필두가 히죽 웃으면서 당과를 입에 쏙 넣었다. 감령이 참다 못해 폭발했다.
“야! 왜 끼어들어! 나도 알아!”
“씁!!”
만우가 인상을 썼다. 그러자 감령이 울상인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헤헤. 이 아저씨 말을 나보다 못 해요.”
윤도가 곰살맞게 웃으면서 감령을 놀렸다. 감령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웬만한 여인보다 잘 관리된 그의 긴 머리가 산발처럼 변했다.
“조선말 너무 어려워!!!”
따악!!! 감령의 이마에 만우의 딱밤이 작렬했다. 감령이 이마를 부여잡고 몸을 부들부들 떨자 윤도가 배를 잡고 까르르 웃었다.
“조선말로 하라고 했지.”
만우가 엄하게 말했다. 감령이 한어로 말할 때마다 만우는 감령의 이마를 때렸다. 필두는 차라리 조용해서 맞을 건덕지가 없었는데, 감령은 성격이 급한 것인지 머리가 나쁜 것인지 매번 이렇게 매를 벌었다.
“자. 그럼 다음. 이건?”
만우가 손에 들린 그림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삐뚤빼둘하게 그린 소가 그려져 있었다. 조선말을 배워야 되는 감령과 필두를 위해 윤도가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소!”
감령이 드디어 정답을 맞혔다. 그러자 만우가 씩 웃으며 약과를 내밀었다. 감령이 뿌듯한 얼굴로 약과를 받아들였다.
“한 달에 이 정도면 많이 배웠네.”
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설미수의 저택에서 머문 지 한 달이 지났다. 조씨 부인을 치료한 이후 설미수는 만우를 마치 상전을 모시듯 극진히 모셨다. 반상의 도를 따지며 북경의 만향루에서 만우에게 양반과 평민의 도를 말하던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만우에게 깍듯하게 경어를 썼고 만우의 숙소도 행랑채에서 손님용으로 사용하는 접객전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만우는 한 달 동안 감령과 필두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단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감령과 필두가 조선말이 서툴러 그 둘만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우 자신이 편하자고 데려온 놈들인데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감령! 필두!”
“저 늙은이. 또 왔어!”
그런 감령과 필두가 한 달 동안 빠르게 조선말을 습득할 수 있었던 데에는 겉모습과는 달리 좋은 그들의 머리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일복 아저씨.”
“어서 나와. 일하러 가게.”
바로 일복 때문이었다. 이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는 일복이 설미수의 공대를 받는 만우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만우의 하인 노릇을 하고 있는 감령과 필두가 노는 꼴을 두고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령과 필두가 무시무시한 산적과 수적이란 것을 알 리 없는 일복은 그 둘에게 가차 없이 일을 시켰다. 그 대부분이 힘이 필요한 허드렛일이었다. 그렇게 일복과 함께 일을 하고 하인들과 어울리면서 조선말이 저절로 늘어났다.
“오늘은 무슨 일이요?”
필두가 능숙해진 조선말로 일복에게 말했다. 그러자 감령이 옆에서 툴툴 댔다.
“어제 모 속아냈으니까 물 대러 가겠지.”
감령이 하는 말도 조선말이었다. 확실히 머리가 나쁘면 무공을 배우지 못한다는 말이 맞았다. 당연히 무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산적과 수적인 이 둘이 조선말을 한 달 만에 꽤나 배웠으니까. 물론 그 뒤에는 조선말을 제대로 못 배우면 만우와의 대련이 있었기 때문에 둘이 더 필사적으로 배운 것도 있었다.
“신선 아저씨.”
감령과 필두가 사라지자 윤도가 뒹굴거리다가 만우를 불렀다.
“아저씨 신선 아니야.”
누차 만우가 신선이 아니라고 윤도의 말을 고쳐주려 했지만 윤도는 꿋꿋이 만우를 신선이라고 불렀다. 만우가 온 다음에 조씨 부인의 병이 완전히 나았기 때문이다.
“근데 신선 아저씨 우리 집에서 떠나요?”
윤도는 퍽이나 귀여웠다. 그리고 고관대작의 자제답지 않게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다. 그 때문에 만우도 윤도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내가?”
만우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윤도가 말했다.
“네. 설운 형님이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아저씨 이야기를 해요.”
“흐음…….”
만우는 볼을 긁적였다. 안 그래도 설운을 만우가 찾아가려 했는데 설운이 먼저 만우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만우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
‘세자를 만나라니.’
세자라니. 세자가 왜 자신을 만나려고 한단 말인가.
‘정안군이 왕이 되었는데. 어르신의 죽음의 뒤에 그 왕이 있을지도 모르고,’
만우는 자신이 조선으로 돌아온 이유를 잊지 않았다. 김약항의 후손들과 그의 죽음을 밝혀내기 위함이다. 왜 그가 조선이 아니라 먼 명나라에 와서 그렇게 죽어가야 했는지. 그를 죽이기 위해 왜 살수까지 보내야 했는지.
‘삼봉은 죽었고. 정안군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은월루는…….’
만우는 고개를 털었다. 아직 제대로 입수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조선에는 개방이나 하오문 같은 정보조직이 없다는 것이 아주 불편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하오문을 족치러 가야겠는데.’
그러고 보니 한 달 전에 십령수를 두들겨 패 보냈는데 하오문이 잠잠했다. 분명 자신에게 저번 일에 대한 보상을 하라고 했는데 무시한 것이다.
“아니. 안 가. 아니, 나중에는 갈지도 모르지.”
“정말요? 정말 가요? 히잉…….”
윤도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사실 요즘 윤도는 정말 행복했다. 맨날 아팠던 어머니도 건강을 되찾았고 만우와 감령, 필두는 윤도와 잘 놀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맨날 하던 전쟁놀이도 안하고 일어나면 어머니인 조씨 부인과 놀고, 그게 지겨워지면 만우를 찾아오는 것이 윤도의 일과였다.
“아저씨들 가는 거 싫은데. 나랑 뛰어다니면서 놀아주고. 그래서 좋은데.”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윤도는 감령과 필두가 놀아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무공 수련의 일환이었다. 아홉 살이라고는 하나 윤도의 근골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무공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고, 근골이 잘 발달할 수 있게 간단한 기초 수련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런데 그때 접객전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만우가 윤도를 옆으로 옮겨 앉히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공.”
혈색이 돌아 건강해진 얼굴의 조씨 부인이 만우를 찾아왔다. 만우는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부인.”
조씨 부인은 만우를 은공이라 불렀다. 그런 그녀의 몸에서는 자연스런 기품이 흘렀다. 그녀의 아름다운 기품은 부드럽게 사람들을 감싸는 기질이 베어 있었다.
“오늘도 좌익찬께서 찾아오셨습니까.”
“설운이요?”
만우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설운은 끈질겼다. 만우가 세자와 만나지 않겠다고 단칼에 거절했음에도 매일같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게 지겨워 대련을 핑계로 떡을 만들어 버렸지만 그래도 찾아왔다. 세자가 시킨 일이니 반드시 해야 한다면서.
“헌데…….”
살포시 웃던 조씨 부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조씨 부인이 더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만우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동행이 있는 모양이군요.”
“예.”
조씨 부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매일 궁으로 입궐하라고 조르던 설운이 함께 동행할 사람이면 뻔했다.
“할 수 없지요. 일단 가보죠.”
만우가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그러자 윤도도 만우를 따라 일어나 쪼르르 조씨 부인의 손을 붙잡았다.
‘세자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만우가 조씨 부인의 뒤를 따라 사랑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