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사짜 기술사(氣術士)(2)2019.03.09.
“조선의 그 기물이 중원으로 넘어와 화를 불러일으키기 전에, 그 물건을 소실시키면 되는 일입니다.”
“호오.”
“그런 방법이 있었구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동이족의 옛 보물은 필요하지 않았다. 유구한 역사가 자랑인 그들에게 가장 큰 자산은 자존심이다. 그것을 가질 생각이 없으니, 가지지 않을 것은 부숴 버리고 없애 버리면 그만이다.
“다른 이들의 반발이 클 것이오.”
묵직한 모용가주의 말에 천혜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독주로 인해 정파의 중소 문파와 세가들이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정파의 힘은 최고조이기 때문에 감히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는 것일 뿐. 그런데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나서 그들이 강해질 수 있는 그 보물조차 없애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무림인은 무공으로 대화하는 법.”
팽가주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남궁현덕이 말한 방법이 그에게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다들 잊으신 것이 있습니다.”
제갈명공이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검주 만우. 그가 조선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크흠…….”
“끄응…….”
검주 만우의 이름이 나오자 그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자 제갈명공의 말을 화산파의 장문인인 무인진인이 받았다.
“그의 성격을 모르시는 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량수불.”
“아미타불.”
여기저기서 도호와 불호가 터져 나왔다. 정사마에서 중도를 걷는 검주와 부딪쳐 보지 않은 사람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검주 만우가 아직까지 건재하다는 것이 그들과 부딪치고도 오히려 물러난 쪽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쪽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무림에서 은퇴하여 조선으로 돌아가 은거를 한다 하였습니다. 헌데, 만약 그를 다시 건드려 그가 복귀라도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흠…… 흠…….”
“그가 아직 이립(而立 : 서른)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립도 되지 않은 나이로 무림십좌(十座) 중 하나인 검주에 오른 만우다. 그런 그가 몇 십 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일패인 혈세천마가 그와의 비무를 피했다는 소문마저 떠도는 참이었다. 그런 그를 일패로 올리지 않은 이유는 그가 중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하면 됩니다.”
팽가주가 두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가문이 장보도의 혈사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중 가장 강한 이들 열다섯 명을 뽑아 보냅시다. 조선에는 무공이 높은 자들이 없으니 그들로 충분할 것이오.”
팽가주가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제갈명공의 입으로 향했다. 제갈세가의 머리에 대해 의심하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검주 만우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움직인다면.”
제갈명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혜대사가 나섰다.
“좋소. 그렇다면 장문인들과 가주께서는 각 문과 세가에 알려 고수들을 차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곧바로 조선으로 파견하겠습니다. 아미타불.”
***
“아저씨. 아니 신선님.”
만우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설미수가 퇴궐한 것을 기감으로 느꼈지만 그를 부르지 않았다. 가족과 해후를 풀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를 딱히 부려먹거나 무리한 부탁을 할 생각은 없었다. 사신으로 명나라에 갈 정도면 관직이 높을 것이고, 설미수의 도움을 받으면 한양에 정착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재물이야 하오문을 탈탈 털어서 가지고 나오면 되는 것이고.
‘그런데 이건 또 뭐냐.’
그렇게 잠들었다가 기분 좋게 일어난 만우가 마주한 것은 방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넙죽 인사를 하는 윤도였다.
“도, 도련님?”
그 모습에 당황한 것은 일복이었다. 만우야 누군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그리 낯선 모습은 아니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하지만 일복에게는 아니었다. 윤도는 이 집안의 독자다. 그런 그가 다른 양반도 아니고 평민인 만우에게 넙죽 절을 한 것이다.
“일어나십시오.”
“일복 아저씨는 저리 가!”
일복이 윤도를 일으키려 하자 윤도가 일복의 손을 밀어냈다.
“무슨 일인가 이게!”
그러자 일복이 다그칠 대상은 만우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만우도 영문을 몰랐다. 그냥 자고 일어났을 뿐이니까.
“무슨 일입니까. 만 대협.”
“그러게요. 아침부터. 하아아아.”
필두는 아침 일찍부터 어제 배운 조선말을 복습하고 있었다. 감령은 자다가 시끄러워서 얼굴을 내밀었고.
“너네 둘은 빨리 조선말이나 배워. 못 배우면 대련이다.”
만우가 둘의 얼굴을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난감한 얼굴로 윤도의 몸을 일으켰다.
“도련님. 이러시면 제가 경을 칩니다.”
“아니에요. 신선님이니까 괜찮아요.”
윤도는 만우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초롱초롱한 얼굴로 만우를 쳐다봤다. 일복이 뒤에서 강렬하게 쏘아봤지만 만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왜 신선이에요, 도련님?”
만우가 묻자 윤도가 하늘을 가리켰다.
“어제 날아가는 것을 봤어요. 제가 들었는데 신선님들은 학을 타고 날아다니신다면서요. 그런데 그거 없이도 나셨으니까요.”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모르지만 만우가 볼을 긁적였다.
‘어제 그 기척이 이 아이였나.’
감령과 십령수를 보기 위해 경공을 썼는데 그때 착각했다 생각한 기척이 이 아이인 모양이었다.
‘빼도 박도 못 하겠군.’
그냥 딱 모른 체를 하면 되지만 윤도의 눈이 너무 반짝였다. 만우가 언제 이런 눈빛을 받아봤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제가 잘 달래서 보내겠습니다.”
“……도련님. 쇤네는 그럼…….”
만우를 한참 쳐다보던 일복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섰다. 그러면서도 불안한 듯 계속해서 뒤를 쳐다봤지만 윤도는 그런 일복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신선 노릇을 해야 하나.’
“도련님. 그런데 신선님은 왜 찾으시나요?”
“음…….”
윤도가 입에 손가락을 물었다.
“저기 사랑채에 있는 도사 아저씨가 그랬어요. 자신은 도력이 부족해서 우리 엄마를 못 고치는데 신선님이면 가능하다고 했어요.”
“도사? 도력이요?”
만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어머니가 많이 아파요. 의원님들이 봐도, 약을 먹어도 낫질 않아요. 그런데 그 도사님이 도력을 쉬쉭! 부리시면 조금 괜찮아 지거든요.”
윤도는 꽤나 신기했던 듯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그러자 만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기. 그 한기와 관련이 있는 놈이렷다.’
만우는 안채에서 뻗어져 나오던 한기를 떠올리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한기는 절대 자연적으로 생긴 한기가 아니었다. 인간의 몸은 음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陽)이 더 강한 사람은 남자가 되고 음(陰)이 더 강한 사람은 여인이 된다. 만우가 어제 느낀 한기(寒氣)는 음양 중 음기(陰氣)와 유사하기는 하나 엄연히 다른 기운이다. 음양의 조화가 깨져서 생긴 병이 아니라 누군가 인공적으로 만든 한기(寒氣)다.
‘그러니 의원도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약도 듣지 않는 것이군.’
“흐음.”
만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윤도가 똘망거리는 눈으로 만우를 올려다봤다.
“사신 나리. 거기 숨어서 안 들으셔도 됩니다.”
만우는 주변의 눈을 의식해 설미수에게 존댓말을 했다. 그러자 문으로 몸을 가리고 있던 설미수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알고 있었나?”
“예.”
“아부지!”
윤도가 도도도 뛰어가 설미수에게 안겼다. 설미수가 그런 윤도를 번쩍 안아주자 만우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양반댁에서 저런 식으로 아버지가 아이를 안아주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엄격했으면 모를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내 안사람을 한번 봐줄 수 있는가?”
설미수의 눈에서는 간절함이 보였다. 만우는 턱을 쓰다듬고는 윤도와 설미수의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한번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고칠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설미수는 그래도 희망을 품었다. 어떠한 의원이나 약재로도 아내의 병을 고칠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만우가 무림에서도 가장 강한 열 명 중 한 명이란 것도 알고 있었고.
“내, 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네. 제발 부탁하네. 조금의 차도라도 있으면 되네.”
차도가 있다는 것은 고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설미수는 천금을 들여서라도 조씨 부인을 치료할 자신이 있었다.
“음. 일단.”
설미수는 당장이라도 만우를 데려갈 기세였지만 만우는 설미수의 말을 끊었다.
“최 도사. 그 도사라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마님께 도술을 부린다는 것인지 봐야겠습니다.”
“알겠네. 내 그를 준비시키겠네.”
마침 최 도사가 조씨 부인을 치료할 시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설미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흐흐흐.”
최 도사, 아니 최면철은 음흉한 웃음을 흘려댔다.
“좋은 거지. 좋은 거야.”
최면철은 오늘이 조씨 부인을 치료하는 날이란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각종 부적과 도술에 필요한 물건들이 가득 찬 곳을 뒤져 도술을 부리는 척을 하기 위한 물건들을 챙겼다. 작은 죽통을 꺼낸 그가 안에 든 검은 가루를 부적 위에 슬슬 뿌렸다. 그러고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말아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 안에 넣었다. 이제 여기에 불을 붙이면 눈 깜짝할 사이에 화르륵 타오르면서 도술을 부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미리 준비한 소매가 큰 두루마기 안에 물소의 뿔을 가공하여 만든 기구를 단단히 고정했다. 이제 그가 팔을 휘두르면 바람이 들어오면서 귀신이 우는 듯한 으스스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붉은 산호로 만든 필(筆)을 한 자루 챙겼다.
“내가 명필이긴 하지.”
그는 명필이었다. 그는 가난한 양반이었는데 도저히 먹고 살기가 힘들어 부적을 쓰면서 저잣거리에서 연명하는 처지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한순간에 인생역전을 한 이유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 때문이었다. 저잣거리에서 글을 대필해 주는 것으로 연명하던 최면철에게 다가온 그 남자는 자신을 마술사(魔術師)라고 소개하면서 대뜸 동업을 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러고는 이런 저런 신묘한 수법을 보여주더니 이것으로 부잣집 마나님들의 쌈짓돈을 털 수 있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글을 아는 자가 필요하다고 꼬셨던 것이다. 그렇게 최면철은 그 남자를 따라다니면서 부잣집 마나님들을 화려한 기술로 홀딱 넘어가게 한 이후 도력이 깊은 도사인 척을 하면서 부적을 아무렇게나 써주고 막대한 복채를 받았다. 그 남자가 그 짓거리를 하다가 한 마나님과 간통하여 그 주인댁 양반에게 죽지만 않았어도 최면철과 함께 사기를 치고 돌아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었고, 그의 기술 몇 가지를 곁눈질로 배웠던 최면철은 그의 도구를 그대로 훔쳐 설미수를 만났던 것이다. 아내인 조씨 부인의 병마를 조금이나마 완화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돈을 줄 정도로 절실한 설미수는 최면철을 도사로 믿고 그에게 도술을 부탁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조씨 부인이 최면철의 마술에 병세가 조금 괜찮아진 것이다. 그로부터 장장 1년을 그는 도력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한 달에 한 번만을 도술을 부리며 이 집에서 막대한 돈을 받아먹고 있었다.
“캬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부적이 잘 마르게 한 쪽에 널어둔 최면철이 벌러덩 드러누웠다.
“도사님. 치료하러 가실 시간입니다. 오늘은 나리께서도 참관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최면철이 씩 웃으면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설미수의 눈앞에서 화려한 마술 기술을 뽐내 그의 돈을 왕창 타낼 생각이었다. 예전 같으면 긴장이라도 했겠지만 이 집안 사람들이 조씨 부인의 안위에만 정신이 팔려 호구가 됐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도 저번 달처럼!”
주먹을 불끈 쥔 최면철이 마술 도구들을 주섬주섬 챙겨 사당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 최면철의 표정인 진짜 도력이 높은 도사처럼 엄숙하게 변해 있었다.
“무량수불. 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