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사짜 기술사(氣術士)(1)2019.03.05.
“아부지이이이!!”
“어허허허. 이놈. 그러다 넘어지면 다친다!”
설미수의 얼굴에서 그늘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가문의 삼대독자인 윤도가 짧은 다리로 도도도 뛰어 그의 품에 안겼기 때문이다.
“보고 싶었어요!”
“그래. 나도 우리 윤도 많이 보고 싶었단다.”
설미수의 집안은 뼈대 깊은 유학자 집안이었지만 손이 귀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인 윤도는 설미수에게 마음껏 어리광을 피울 수 있었다. 다른 집안의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천자문이니 소학이니 하면서 엄한 가풍 속에 사는 것과는 달랐다.
“그래. 어디 얼마나 자랐나 보자.”
설미수는 묵직한 윤도의 무게감을 느끼면서 뿌듯하게 웃었다. 집으로 오는 길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던 무거운 심정은 날아가 버린 지 오래다. 거의 일 년 만에 보는 아들은 부쩍 키도 크고 무거워졌다. 역시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는 것이 맞는 듯했다.
“오셨습니까.”
그런 윤도의 뒤로 힘겨운 조씨 부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때 개경제일미녀로 수많은 남정네들의 방심을 뒤흔들었던 그녀지만 지금 조씨 부인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다. 얼굴은 창백했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하녀가 옆에서 그녀를 부축해 주었기 때문에 간신히 서 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돌아오는 낭군을 맞이하기 위해 힘들게 여기까지 나온 것이다.
“부인. 어쩌자고 이곳까지 나오셨소.”
설미수는 윤도를 내려놓으며 얼른 조씨 부인을 부축했다. 하녀 대신 그녀를 부축할 정도로 설미수는 자신의 부인을 사랑했다. 대대로 손이 귀함에도 불구하고 첩 하나 들이지 않고 기루에도 얼씬도 하지 않은 이유가 조씨 부인 때문이었다.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 일 년이 넘게 쫓아다녀 마침내 성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씨 부인에 대한 설미수의 마음은 각별했다.
“내 명에서 부인의 병에 도움이 될 만한 약재들을 구해왔소. 헌데…….”
설미수가 조씨 부인의 반걸음 정도 뒤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저 처자는 누구요?”
“아. 나리. 매분구 방매라고 합니다.”
“매분구?”
설미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매분구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분구가 지금 이 시간까지 집에 있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말솜씨가 좋아 제가 조금 오래 데리고 있었습니다. 말을 참 예쁘게 잘하는 아이더이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조씨 부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병색이 완연하고 나이를 먹었음에도 그녀의 미모는 여전했다.
“아. 정말이오?”
설미수가 웃으며 방매를 쳐다봤다. 병이 심해 매일 집에만 머무는 안사람이다. 잠시나마 그녀가 즐거워할 수 있으면 거렁뱅이라도 상관없었다.
“내 너의 매분구 가격을 후하게 치러주마. 오늘 부인을 즐겁게 해준 값이다.”
“가, 감사합니다, 나리.”
방매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한양 제일 매분구라고 하지만 가지고 다니는 물품을 완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수익을 올린 것이다. 사실 이 집의 마님이 아파 접객을 하지 않아 하녀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던 방매다. 한양제일매분구라는 별명에 맞게 방매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그 말을 듣는 하녀들이 저절로 전낭을 열어 몇 가지 물건을 사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리가 조씨 부인의 귀에 들어갔고, 흥미를 느낀 조씨 부인이 방매를 불러들여 지금까지 머문 것이다.
“아. 그리고 최 도사는 아직도 머물고 있는가?”
“예. 달에 한 번씩은 꼭 마님에게 도술을 펼치고 있습니다.”
일복이 꾸벅 허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설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요구한 것들을 명에서 사 왔으니 건네주시게. 부인의 병세에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다면 크게 후사한다고도 전해주고.”
“예. 나리.”
“그리고 이건 명에서 사온 유명한 약재일세. 그러니 부인은 힘들더라도 꼭 매일 복용하시오.”
“예.”
조씨 부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심하게 기침을 하자 설미수는 그녀를 얼른 안채까지 부축했다. 조씨 부인을 조심스럽게 눕힌 후 보료까지 덮어준 설미수가 자신의 아내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대체 왜 그녀가 아프게 된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매우 건강했다. 개경제일미녀라 불리며 남정네들을 홀리고 다니는 것을 즐길 정도였으니, 대단히 활발했고 활동적이었던 것이다. 성혼하기 전에는 말을 타고 외유하는 것을 즐길 정도였는데, 삼 년 전부터 그녀가 갑자기 앓아눕기 시작했다. 어의까지 동원해 그녀의 병의 이유를 알아내려 했지만 원인불명이란 소리밖에 듣지 못 했다. 그래서 별의별 수단을 다 써봤지만 딱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차도가 없었다. 장백산의 도술을 사용한다는 최 도사. 그가 도술을 부리면 잠시나마 아내의 병이 완화가 되었다. 그 때문에 그에게 막대한 재물을 주고 집 안에 사당까지 지어 그만을 위한 거처까지 만들어주었다. 한 번 시술할 때마다 막대한 도력을 소모한다 하여 달에 한 번씩밖에 도술을 펼치지 못했지만 그것이라도 붙잡을 정도로 설미수는 절실했다.
“대감.”
조씨 부인이 설미수를 불렀다. 설미수는 창백한 조씨 부인의 얼굴을 보면서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대감이라니. 둘이 있을 때는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 그러지 않았소!”
“낭군님.”
조씨 부인의 창백한 볼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설미수는 싱글벙글 웃으며 차가운 조씨 부인의 손을 잡았다. 손이 기이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녀의 몸에서는 그 어떠한 원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한기가 똬리를 틀었다.
“손님을 모시고 왔다 들었습니다.”
“아…….”
설미수의 얼굴이 시꺼멓게 죽었다. 만우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윤도가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요.”
“윤도가?”
설미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들의 이름이 나오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 행랑채에 머물고 있는 손님이 신선이라고. 윤도가 그분이 하늘을 나는 것을 봤다고 하더군요.”
“…….”
설미수의 머릿속에 만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히 십만 대군이 뿜어내는 기세와 비슷하게 달려드는 수십 명의 고수들을 공중분해 시키던 만우의 가공할 만한 무공. 그가 저 큰 대국에서도 가장 강한 열 명의 무림인 중 하나라는 사실이 그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잠깐. 어쩌면…….’
설미수가 창백한 조씨 부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이 병을 잘하면 해결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인간은 믿음이 안 가.’
*** 무림맹(武林盟). 본래 무림맹의 취지는 정파 무림에 심각한 수준의 위기가 닥쳤을 때 정파 무림의 힘을 한 군데로 모으기 위해 결성되는 역할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원은 너무나도 큰 대륙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주(州)에 있지 않은 다음에야 정파 무림이 서로간의 교류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결성된 것이 바로 무림맹. 예전처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비장함을 띄고 수많은 정파 무림이 모여든 단체는 아니나 정파 무림의 교류와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에 많은 정파인들이 무림맹을 드나들었다. 게다가 무림이라면 필히 일어나기 마련인 소란을 중재하는 등 중재자 역할도 수행했다. 그런 무림맹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이백 년 전 발발한 마교의 중원 침공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무림맹의 회의실에 앉은 면면은 그 이름들만으로도 무림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한 인물들이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방주, 그리고 오대세가의 문주들. 그들 개개인의 무력은 물론 그곳에 앉은 사람들의 세력이 힘을 합치면 정파 무림의 5할이 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들이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과 무당을 비롯해 화산, 청성, 아미, 점창, 곤륜, 종남, 공동에 개방의 구파일방. 그리고 남궁세가, 모용세가, 제갈세가, 하북팽가와 사천당가의 오대세가. 이들이 전부 무림맹에 모인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아미타불. 장보도라 이 말씀이십니까?”
“예. 맹주.”
무림맹주는 소림의 전대고수인 무왕(武王) 천혜대사였다. 그러자 제갈세가의 가주이자 무림맹의 천안각(天眼閣)의 각주인 제갈명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타개(萬打丐). 사실입니까? 아미타불.”
천혜대사가 개방방주인 만타개에게 물었다. 그는 아홉 결의 수실을 허리춤에 단 늙은 노개(老丐)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맹주. 하오문 고 앙큼한 것들이 노리고 있다 하더이다. 다른 곳으로 무림의 시선을 돌리려 귀여운 짓을 하긴 했으나 그건 거짓이었소.”
만타개는 하오문이 정보 교란을 위해 흘렸던 가짜 소문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괜히 개방방주가 아니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이족의 것에 무림맹이 집결해야 합니까?”
“장보도이지 않습니까.”
곤륜파의 장문인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하북팽가의 가주고 반박했다. 곤륜파는 마교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중원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있었지만 하북팽가는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조선에 가까운 곳이었다.
“조선에서 그들이 장보도를 차지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하오문입니다. 그들이 들어오는 순간 그것을 노린 이들이 승냥이처럼 달려들 것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천마신공의 혈사를.”
팽가주의 말에 이들의 얼굴이 굳었다. 천마신공의 혈사(血事)는 무림에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힌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마교의 초대 천마의 신공절학인 천마신공(天魔神功)이 하북의 태산에 묻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곳은 과거 소림의 초대조사인 달마와 마교의 초대교주인 천마가 동귀어진을 했다 알려진 곳이기 때문에 삽시간에 거의 모든 무림인들이 소림으로 몰렸다. 마교에서는 당연히 초대조사의 유물을 확보하겠다며 무림에 출두했고 그들을 막기 위해 곤륜과 청해가 나섰다가 봉문을 당했다. 그리고 사파에서도 신공절학을 차지하기 위해 피바람이 불었고 천마신공이 묻혔다고 알려진 태산의 소림사를 중심으로 그 일대에서 거대한 피바람이 일었다. 결국 천마신공은 그 와중에 소실되어 누가 소유를 하게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피바람에 휩쓸렸던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 전체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때 소실된 무림의 전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십 년이 필요하다는 예측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 피해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소요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심지어 원나라 황실에서까지 개입을 했을 정도였다.
“그 소요가 다시 이 중원에서 벌어지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만약 하오문이 그 장보도로 보물을 찾아 중원으로 돌아온다면 하오문은 명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그들이 가는 길을 따라 피바람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희생양이 될 것은 조선에서 가까운 하북팽가다. 그렇기 때문에 팽가주는 필사적으로 다른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오?”
괄괄한 당가주가 말하자 팽가주가 말했다.
“하오문을 멸문시키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중원에 들어올 여지를 주지 않으면 조선에 남을 것이 아닙니까.”
팽가주의 말에 제갈명공이 고개를 저었다.
“하오문은 본래 이 땅의 하류 인생들이 모여 만든 집단입니다. 그러니 좀도둑들과 기생들을 전부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멸문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거지들을 다 죽이겠다는 것과 같은 소리요. 불가능하단 소리지.”
제갈명공에 이어 만타개까지 그 의견에 반대했다.
“아미타불.”
천혜대사는 불호를 읊으면서 눈을 감았다. 거대한 폭풍이 일어나려는 조짐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야 동이족의 그 보물이 필요하지 않다지만 다른 중소문파와 세가들은 다를 겁니다.”
제갈명공이 다른 이들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찌르자 다들 침음을 흘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무림은 결국 무공으로, 가진 힘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중소 문파와 세가들도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싶어 할 것이다. 그들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처럼 유구한 역사 속에 만들어지고 쌓인 무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 자체에서 뒤처지는 중소 세가와 문파, 그리고 사파들은 그런 무공을 확보하여 자신의 힘을 키우고 싶어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침묵하고 있던 남궁세가주가 입을 열었다. 구파일방에서 소림과 무당이 은연중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것처럼 오대세가에서는 남궁세가의 발언권이 가장 컸다. 남궁세가주 남궁현덕이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