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어? 검주가 왜 여기서 나와?(3)2019.02.26.
“아참. 조용히 하시게. 마님께서 요즘 건강이 안 좋으셔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고 있네.”
일복이 안채를 지나면서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제야 만우는 왜 윤도가 바깥에서 놀고 있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가 많이 안 좋으십니까?”
“그러게 말일세. 의원들이 다녀가도 병의 원인을 모르네. 나리께서 어의도 부르셨네만, 효용이 없었네.”
어의(御醫)라면 조선의 의원들 중 가장 실력이 탁월한 의원을 일컫는 말이다.
“엄청나게 중한 병은 아니라 집안에서 요양하고 계시지만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셔서 걱정일세. 그래도 대감님께서 명나라에 가서 약을 구해온다고 하셨으니.”
일복은 자신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만우는 안채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만 대협.”
“나도 알아. 그래도 괜히 아는 척하지 마. 귀족들이랑 엮이면 안 좋은 거, 너도 알잖아?”
만우가 투명한 눈으로 필두를 쳐다봤다. 그러자 필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우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안채를 쳐다보면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한기(寒氣)라. 여인에게서. 흠.’
***
“후우.”
설미수는 광화문을 나오고 나서야 크게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지금의 왕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철혈의 왕. 자신의 형제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스승으로 모셨던 삼봉 정도전까지 죽였으며 고려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까지 죽이고 조선의 삼대 국왕으로 오른 분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의 주춧돌부터 서까래까지 얹었기 때문에 왕의 위압감은 가히 어떠한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 앞에 서기만 해도 자신의 영혼까지 까발려지는 듯한 느낌. 신하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없게끔 만드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왕에게서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설미수는 바짝 긴장한 상태에서 사신단의 성과를 거의 한 시진 동안 보고해야 했다.
[설 부사가 고생이 많았군. 돌아가서 쉬시오.]
왕에게서 돌아온 것은 그 한 마디가 전부였지만 왕은 그 한 마디만으로 설미수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그의 묵직한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대감.”
“아. 이 대감 아니십니까.”
“한양에 돌아오셨습니까.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에요.”
설미수가 궁으로 들어오던 이조판서 이직(李稷)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설미수가 명에 가 있던 근 8개월 동안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반가운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입궐하시는 겁니까.”
설미수가 말하자 이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근심 어린 그의 얼굴에 놀란 설미수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기에 얼굴이 그리 어두우신 겁니까.”
이직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간의 어려움이 가득 담긴 무거운 한숨이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분명했기 때문에 설미수의 표정도 자연스레 굳었다.
“상왕(上王) 전하의 진노 때문이네.”
“네?”
설미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확실히 그 일이라면 얼굴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의 왕자의 난에서 현재의 왕은 두 명의 형제를 살해했다. 첫 번째에는 이복동생인 이방석을 칼로 베어 죽였고 두 번째 난에서는 친동생인 이방간을 베어 죽였다. 이 일로 인해 상왕이 진노하여 아들인 정종에게 왕위를 양위해 버리고 함경도의 함흥으로 가 현재의 국왕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상호군 박순에 이어 호군 송유를 상왕께서 활로 쏴죽이셨다네.”
“예에??”
설미수가 눈을 크게 치켜떴다. 상왕의 진노는 조선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런다고 해서 아들이 아닌 그 명을 받고 간 신하들을 쏘아죽일 정도로 상왕이 잔혹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이…….”
“그 둘의 연락이 끊긴 지 벌써 이레가 지났네. 아무래도…….”
이직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네. 새로이 보낼 차사를 찾으시기에 들어가는 중이네.”
이조의 일이 바로 인사에 관련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두 명이 죽었기 때문에 그곳에 갈 사람이 있을지 그것이 문제였다.
“아. 어서 들어가야겠네. 전하가 기다리시겠어.”
“예. 그럼 고생하십시오.”
“조만간 만나서 차 한잔하세.”
이직이 서둘러 광화문 안으로 사라졌다. 설미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깐.”
집이 있는 북촌으로 돌아가려던 설미수의 발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지금 집에 돌아가면 그곳에 누가 있는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설미수의 표정이 검게 죽었다.
“좌익찬. 좌익찬이 필요해.”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린 설미수가 궁문에 선 위사에게 달려가 말했다.
“세자익위사 소속 좌익찬 설운. 불러주시게. 판한성부사 설미수가 찾는다 꼭 전해주시고.”
“예. 나리!”
위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흐흐흐. 나 혼자 죽을 수는 없는 법이지.”
설미수가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웃었다. ***
“세자 저하. 신 좌익찬 설운. 전하의 명을 마치고 돌아왔나이다.”
궁에 복귀한 설운의 모습은 사신단에서 보여주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만우에게 당해 실의에 빠지고, 만우에게 얻어터지면서 그의 눈치를 보던 그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금 설운은 당당하게 넓은 어깨를 쫙 편 채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있었다. 그런 설운은 우렁찬 목소리로 세자 양녕(讓寧)에게 고개를 숙였다. 세자익위사 소속인 설운이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나의 주군.’
왕은 금군(禁軍)이 보호한다.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호하는 것은 금군 최고이자 조선제일인 권희달이다. 설운은 자신도 기필코 그리 되겠다며 투지를 불태우며 형형한 눈으로 양녕의 발치를 쳐다봤다.
“일어나게.”
양녕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겨했다. 올해 9의 나이였지만 매서운 눈과 곧게 뻗은 콧날은 전장을 호령하던 태상왕이 연상됐다.
“안 그래도 설운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네. 명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거든.”
세자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설운을 쳐다봤다. 설운은 그런 세자의 눈길을 느끼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명나라에 대한 것은 조선의 양반이라면 다들 궁금해했다. 그것은 세자도 다르지 않았다.
“형님, 형님!!!”
“아이코. 충녕이다. 내가 없다고 하거라.”
그때 동궁전 쪽에서 더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곳으로 똥그란 눈과 통통한 볼살이 인상적인 남아가 짧은 다리로 총총거리며 뛰어나왔는데 그 모습이 퍽이나 귀여웠다. 하지만 그 남아도 왕위계승권이 있는 왕의 아들이었다. 충녕대군(忠寧大君). 충녕군의 뒤에서는 내시와 궁녀들이 기겁하며 뒤따르고 있었지만 충녕군은 뭐가 그리도 급한 것인지 설운을 향해 뛰어왔다.
“대군마마를 뵙습니다.”
“아. 그대가 이번에 명에 다녀온 좌익찬 설운인가?”
설운은 슬쩍 놀랬다. 충녕군의 나이는 올해로 아홉이다. 그런데 형인 양녕보다도 목소리가 더 곧았다. 목소리가 곧다는 것은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다는 뜻이다.
“예. 그렇사옵니다, 대군마마.”
“그래? 아니. 그런데 형님은 어디가신 것이지? 혹시 형님을 보았느냐?”
그러자 설운의 거대한 덩치 뒤에 숨은 세자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설운은 웃음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보지 못하였나이다. 소신도 세자 저하를 뵈러 가는 길이었사옵니다.”
“그래? 그 말에 거짓이라고는 없으렷다?”
설운은 웃음을 애써 참았다. 말투는 제법 엄했지만 그 말을 하는 것이 볼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홉 살짜리 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운은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사옵니다. 소신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사옵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그대는 불순한 의도를 품은 침입자렸다! 여봐라!!!”
“예이!!”
내시와 궁녀들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충녕대군의 한 마디에 곧바로 대답하는 내시와 궁녀를 보면서 설운은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비록 그들이 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고는 하나 동시에 가장 경험과 경력이 많은 이들이다. 특히 내시들 같은 경우에는 세자와 대군들의 훈육까지도 겸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어린 대군들은 내시들을 더 무서워한다. 그런데 충녕대군은 아니었다. 오히려 충녕대군이 내시들과 궁녀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불한당을 당장 끌어내라!”
“예, 예?”
충녕대군이 설운을 가리키면서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이의 목소리지만 제법 위엄이 살아 있었다.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대군마마.”
하지만 귀여워도 상대는 대군마마였다. 왕의 아들이란 소리다. 설운은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네 발 아래 삐져나온 그것은 무엇이냐!”
“…….”
충녕대군은 설운의 발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옷자락을 가리켰다. 세자의 의복 자락이었다.
“그것은 분명 형님의 의복이다! 헌데 그대가 형님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대군인 나에게 거짓을 고한 것이다. 형님을 납치라도 하려는 것이냐?”
충녕대군의 말에 설운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설운의 다리 사이에 숨어 있던 세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 아닙니다. 가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형님!!!”
충녕대군이 얼른 달려들어 형인 세자를 일으켜 세웠다. 세자는 충녕을 몹시 부담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설운은 왜 그런지 알 수 있었다.
“어찌하여 이 나라의 본이 되셔야 할 세자께서 이러시고 계신 것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어지는 충녕대군의 어마어마한 잔소리. 세자가 그렇게 기를 쓰고 숨으려고 한 이유가 있었다. 결국은 제대로 숨지 못하고 들켜서 더 긴 잔소리를 듣는 것 같았지만. 설운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말 한마디에도 조리가 있는 것이 모두 타당한 말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아이가 말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재라 하였나?’
생각해 보니 충녕대군의 천재성에 대한 소문은 일찍부터 떠돌았다. 아마 세자가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셋째인 충녕대군은 천자문을 네 살에 띄고 책을 읽기 시작한 반면, 세자 양녕은 공부보다는 바깥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 둘을 보고 왕이 둘이 바뀌었어야 했다고 탄식했다는 것은 궁인들 모두가 알고 있는 일화였다.
‘과연. 천재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다.’
설운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공자의 문구들을 들먹이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충녕대군의 잔소리는 어마무시했다. 웬만한 세자빈객(세자를 가르치기 위해 초청한 학자)보다 더 엄한 잔소리였다.
“그만하거라! 충녕, 너는 명나라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느냐?”
세자는 더 이상 듣지 못 하겠다는 듯 명나라 이야기로 충녕대군을 꼬셨다. 명나라란 소리에 충녕대군의 눈이 반짝였다.
“궁금합니다.”
“그럼 어서 가자꾸나. 내 설운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 달라 할 참이었다. 어서.”
세자는 성공적으로 화제를 바꾼 것이 다시 잔소리로 돌아갈까 봐 두려운 것인지 충녕의 옷자락을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두 형제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설운이 잔잔히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
“만 대협.”
“안다. 쯧. 적당히 손보라고 했더니 일을 크게 만드네.”
행랑채 중 한 칸의 방을 받은 만우가 머리 뒤로 꼈던 손깍지를 풀었다.
“잘 외우고 있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필두는 지금 조선말을 배우기 위해 공부 중이었다. 평생을 공부와 멀리 떨어져 살아온 수적 총채주가 조선말을 배우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는 모습은 한 편의 희극이었다.
“오 년이나 살아야 하는데, 조선말을 못 하면 너희들만 답답하다. 그리고 언제까지 산적질이나 수적질만 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조선말을 배우면 무역도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사실 만우가 불편해서 조선말을 배우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런 사실 따위는 만우에게 중요치 않았다,
“계속 보고 있어. 괜히 나오지 말고.”
“아, 아닙니다, 대협. 제가 잘 해결을…….”
“됐어. 물어볼 것도 있고.”
만우의 말에 필두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핑계를 대고 이 공부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필두는 조선말을 외우기 위해 인상을 쓰고 끙끙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걸 못 외우면 오늘 또 대련이라고 했으니까.
‘오늘도 맞을 수는 없어.’
그것도 조선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개처럼 맞고 싶지는 않았다. 머슴에게 고개를 숙이고 굽신거린 것도 모자라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절대로 사절이었다.
‘기필코 피한다. 오늘은 기필코 피할 거야!’
필두가 그렇게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사이 만우는 행랑채 바깥으로 나왔다. 행랑채 바깥에는 작은 마당이 있었고 옆으로는 길게 펼쳐진 좁은 마루와 방들이 일렬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곳은 머슴들이나 행상인들이 머무는 행랑채였다. 이 행랑채를 보면 설미수의 집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웬만한 양반들의 저택에 행랑채라고 있는 것이 고작해야 다섯 칸 정도인 반면 설미수의 집은 행랑채만 스무 칸이 넘었다. 북촌에서도 99칸인 집은 드물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설미수의 집이었다.
“흐음. 보는 사람 없지?”
만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동시에 만우가 발끝으로 땅을 가볍게 박찼다. 그러자 만우의 몸이 둥실 깃털처럼 떠오르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파다닥.
“응?”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만우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무언가 후다닥거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당 한 쪽에 놓인 곳에 닭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