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검주, 머슴이 되다!(4)2019.02.12.
“헤헤.”
설미수의 얼굴이 시퍼렇게 죽었다. 한양에만 도착하면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만우가 뻗은 마수는 단순 감령과 필두에게만 간 것이 아니었다. 설미수와 설운도 마찬가지였다. 백 일 동안의 은밀한 세뇌 효과로 인해 설미수는 만우가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 봐도 맞은 것처럼 움찔거렸다. 그리고 설운은 실제로 맞기까지 했다. 물론 괴롭힌 것만은 아니라 설운도 백 일 동안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절정 초입에서 중간 정도까지는 다다른 것이다. 그게 전부 만우의 주먹에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한 눈물 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좌익찬 나리?”
만우가 이번에는 설운을 쳐다봤다. 하지만 설운은 이번만은 당당했다.
“나리께서 해주실 것이다. 나는 세자익위사 소속이니, 곧바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구나.”
이제 설운은 만우 앞에서 말을 더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게다가 그는 확실히 투사다운 측면이 있어서 만우가 그를 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오히려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맞으면 아픈 건 여전하지만, 그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흐흐흐. 어딜 벗어나려고?]
하지만 만우의 전음에는 그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세자익위사라고 해서 퇴청 안 하는 건 아니잖아. 왜 이래?]
만우가 씩 웃었다. 동시에 설운이 병사들을 쳐다봤다. 만우가 이런 사실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저들의 입을 통해서밖에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나리.”
“끄응. 아니다.”
하지만 그 병사들이 문제일 리 없다. 그들은 만우에게 호의적이다. 그리고 만우도 그들에게 호의적이다. 그러니 당연히 만우가 물어보는 것에 대답을 해줬을 것이다.
‘편해진 건 있으니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만우 때문에 오는 길이 꽤 편하기는 했다. 물론 설미수나 설운이 아니라 병사들이. 조선 사신의 깃발을 달고 있어도 달려드는 미친 마적떼들이나 산적떼들 대부분이 감령과 필두의 선에서 모두 도륙이 났기 때문에 병사들은 한 명도 다치지도 않고 무사히 조선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기다린다? 한양에 왔다고 해서 날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저기, 내가 못 들어갈 것 같아?]
설운이 고개를 떨궜다. 만우의 말이 맞았다. 그의 능력이라면 궁궐을 자신의 집처럼 드나들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내 기별을 주겠다. 그러나 나리 댁에 가서 기다리거라.”
설운의 말에 설미수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서로서로 만우의 처분을 미루고 있었지만 둘은 관직이나 나이에 상관없는 묘한 동질감을 쌓고 있었다.
“그, 그래. 북촌에 있는 내 집에 가 있거라.”
“예, 나리. 감령! 필두!”
아직 만우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조선에서 명으로 올 때는 없던 이가 갑자기 돌아가는 길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무림인이라는 소문도 돌았고, 명 황제가 붙여준 그림자 무사라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하지만 제일 유력한 건 설미수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붙은 비밀 무사라는 이야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가 설미수의 저택으로 간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병사들이 많았다.
“그럼 수고들 하십시오!”
“조심해서 가시게!”
“만 대협 덕분에 편하게 왔네!”
병사들은 만우를 만 대협이라 불렀다. 대부분 검주라 불렸기 때문에 자신의 호칭에 대해 딱히 생각하지 못 했는데, 감령과 필두가 만우를 그렇게 부른 것을 보고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곳이 한양.”
“동이족이라 하던데. 제법이잖아?”
만우는 사신단 일행에서 빠져나와 저잣거리 안으로 스며들었다. 한양의 저잣거리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이것도 만우의 기억 속에 있는 모습과 많이 달랐다. 그때는 고려의 최영 장군이 죽고 난 뒤, 민심이 흉흉해진 상태로 태조가 건국을 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행히 그들의 표정이 웃음과 활기로 바뀐 것을 보니 그때보다는 살림이 나아진 듯했다.
“진정 여기가 만 대협의 고향이오?”
감령이 만우에게 물었다. 감령은 산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멀끔하게 생겼다. 하지만 그런 멀끔한 모습 사이로 무림인 특유의 거친 기운이 풍겼기 때문에 지나가는 아낙네들이 한 번씩 그를 쳐다봤다.
“그래. 내가 열 살 때 떠난 곳이지.”
“왜 떠나셨소?”
만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감령이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내 만 대협에게 패해 머슴이 되었으나 반드시 당신에게 복수를 하고 떠날 것이오. 그러려면 성공을 해야 하는데, 한 가지라도 더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겠소?”
감령은 능글맞았다. 동시에 거칠고 호탕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만우에게 패배한 것을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이길 거니까. 그때가 되기 전에 산적 출신으로 강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왜 이야기에도 많이 나오지 않는가. 기세 좋게 상대방의 짐과 돈을 노리고 나타난 산적이 알고 보니 엄청 강한 주인공에게 고개를 숙이고 목숨을 구걸하는 거. 살기 위해 산적질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한테 말해주겠냐?”
만우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감령의 뒤통수를 때렸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직선적이고 단순했다.
“하나도 남자답지 않아.”
그리고 저렇게 말하면 굉장히 남자답다고 착각하는 병이 있었다. 능력도 없으면서 솔직한 것은 남자다운 것이 아니라 그냥 호구였다. 호구.
“너도 마찬가지지?”
“아니오! 난 그런 비겁한 짓은…….”
“웃기고 있네. 얼마 전에 해우소에서 내가 분명 살기를 느꼈는데.”
만우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필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걸 느꼈단 말이오?”
도저히 공략할 틈이 보이지 않는 만우 때문에 딱 한 번 그런 비겁한 생각을 하기는 했다. 화장실에 있을 때 가장 무방비해지는 것이 사람이니 그때 공격하면 될까하고. 그런데 그 잠깐의 생각을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뭐? 똥? 에이. 멍청한 놈. 하긴. 장강물이 똥물처럼 더럽기는 하지. 킬킬.”
“뭐라? 이 무식하기만 한 산적놈이! 감히 동오의 핏줄인 나에게!”
“동오? 그게 뭐야. 먹는 거냐? 망해버린 왕조의 핏줄이란 게 뭐 그리 자랑이라고!”
감령과 필두는 수시로 으르렁거렸다. 본래 산적과 수적이 친하지 않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같이 다른 사람 물건 갈취해서 살아가면서 뭐 그리 편을 가리고 따지는 것인지 만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는 똑같이 때려죽일 놈들이니까.
“시끄러워!”
만우가 버럭 목소리를 높이자 둘이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만우의 주먹은 초절정 고수인 그들이라고 해도 속이 상하는 것처럼 아팠다.
“머슴이 어디서 감히 목소리를 높여!”
“…….”
“…….”
둘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개기면 두 배로 아프게 맞게 된다. 하지만 지금 입을 다물면 때리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백 일 간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둘이다.
“딱 오 년. 오 년만 버티면 보내준다니까.”
만우는 둘을 보면서 씩 웃었다. 감령과 필두가 고분고분하게 만우를 따라 조선까지 온 이유가 바로 오 년이란 시간 때문이었다. 오 년. 만우의 시중을 들면서 딱 오 년만 살면 된다. 그게 아니면 당장 멱을 따버리겠다고 살벌하게 협박을 했으니 힘이 없는 둘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북촌이 어디지?”
설미수가 북촌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 가라고 했다. 하지만 만우는 십오 년만에 돌아온 한양의 지리를 전혀 몰랐다.
“저기 아저씨. 북촌이 어딥니까.”
“응?”
만우가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여리꾼에게 물었다. 장사도 안 되는데 물어본 터라 버럭 짜증을 내려던 여리꾼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만우와 감령은 아니었지만 필두는 현직 수적 총채주에 걸맞는 험상궂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 북촌 말인가?”
“네.”
허름한 갓을 쓴 여리꾼이 손가락으로 말했다.
“구, 궁의 동쪽으로 가면 고래 등 같은 기와집들이 보일 걸세. 그곳이 북촌이야.”
“아. 감사합니다.”
만우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감령과 필두는 멀뚱멀뚱하게 여리꾼의 옆을 지나쳤다. 만우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조선말을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야. 너네.”
“예. 만 대협.”
만우가 말하자 필두가 재빨리 대답했다. 멀끔하게 생겼지만 딱 전형적인 산적의 성격인 감령과는 달리 필두는 눈치가 빨랐다.
“너네 조선말부터 배워.”
“예? 저희가요?”
감령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곧바로 만우의 주먹이 감령의 이마에 작렬했다. 쾅! 웬만한 타격으로는 초절정 고수인 둘에게 고통을 느끼게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굉음이 일어나자 놀란 주변 사람들이 만우를 쳐다봤다.
“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하하하하.”
굉음과는 달리 감령이 꿀밤을 맞은 것처럼 이마를 문지르고 있자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럼. 오 년 동안 여기 살 건데 벙어리로 살 거야? 그리고 길 찾는 것 정도는 너희들이 해야지. 그런데 너희가 조선말을 모르니까 내가 물어보고 해야 되잖아. 어? 그게 머슴이야? 주인이지?”
“예.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만우의 표정이 사나워지려고 하자 필두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자 치켜 올라가던 만우의 눈꼬리가 멈춰 섰다.
“씨. 공부를 하라니. 한자 배우는 것만 해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
하지만 감령의 푸념에 멈춰 섰던 만우의 눈꼬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치? 공부하기 싫지? 하긴. 나도 한어 배울 때 힘들었는데.”
필두가 슬금슬금 옆으로 비켜섰다. 하지만 눈치 없는 감령은 멀끔하게 생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죠. 만 대협께서도 그렇게 힘들었던 것을 아시면서 조선말을 배우라고 하시면…….”
“그래. 공부로는 어려우니까 몸에 새겨줄게.”
만우가 주먹을 뚜둑거렸다. 그러자 감령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자신이 만우의 심기를 거슬렀음을 그제야 눈치챈 것이다.
“하루에 한 번씩 시험해 보고, 틀리면 넌 맞는 거야. 하나 틀릴 때마다 백 대씩.”
“왜, 왜 하나 틀릴 때마다 한 대가 아니라 백 대…….”
“천 대 맞으면 죽으니까.”
만우의 상식을 벗어난 계산에 감령이 입을 떡 벌렸다. 필두는 숨소리가 들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하지만 그때 감령을 수렁에서 건져주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 이놈들아! 이걸 가져가면 우리는 뭐 먹고 살라고! 아이고! 아이고!!!
“무,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단순무식한 감령이지만 지금이 위기를 회피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란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감령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만우가 고개를 꺾었다.
“흠. 어쨌건 맞는 건 그대로고.”
필두는 옆에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는 불똥이 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 필두.”
“네, 만 대협.”
검주 만우는 지금 감령과 필두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대적할 수 없는 상대다. 거기에 지난 백 일 동안 지속적으로 정신교육을 빙자한 폭력이 이어졌으니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만우의 성격이 지랄 맞을 정도로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넌 북촌에 그 사신 나리 저택 어딘지 찾아놔.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갈 테니까.”
곡소리가 여기까지 나고 요란하게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간단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만 대협.”
만우에게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에 필두가 나는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사라지는 필두의 귓가에 만우의 전음이 울려 퍼졌다.
[도망가면 명나라 끝까지라도 쫓아간다.]
부르르. 처음이라면 코웃음을 치거나 반신반의라도 했을 테지만 백 일 동안 겪은 만우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필두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끄덕이고는 사라졌다.
‘오 년이야. 오 년만 참으면 돼!’
필두가 그런 희망을 품은 채 사라졌다. 만우는 그런 필두를 보고서는 피식 웃고는 감령이 사라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락호겠지.”
시전에서 벌어지는 소란은 딱 하나였다. 자릿세나 보호세를 받겠다며 돌아다니는 파락호들. 시전 전체에 관청의 영향력이 끼칠 수는 없었다. 한양은 넓지만 관청에서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자연스럽게 파락호 같은 세력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파락호들은 관청에 그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의 일정한 부분을 상납할 것이다. 한마디로 이중과세. 시전의 상인들은 파락호에게도 돈을 내야 하고 관청에도 돈을 내야 한다. 그러니 법적으로 적시된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시전 상인들로부터 뜯어가는 것이다.
“십오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만우는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에 반가움마저 느껴졌다. 자신을 빼고 한양이 전부 다 바뀐 것이 아닌가 걱정했는데 같은 것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