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검주, 머슴이 되다!(2)2019.02.05.
“휴식!”
“이 다경 간 휴식!!”
“휴식하시랍니다!”
만우는 귀가 간지러 귀를 후비적거리다가 휴식이라는 말에 그늘을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옷가지 몇 개를 넣어놓은 짐이 무거울 리 없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 부피가 컸다. 그리고 애초에 만우는 지금 들고 가는 크기만 한 쇠를 짊어 매고 하루 종일 신법을 펼쳐도 지치지 않는 체력의 소유자다. 집도 절도 없는 낭인 생활을 오 년이나 하면서 가장 많이 늘어난 것은 체력이었다.
“조선에 가면 집도 구하고 이쁜 처자도 구해서 오순도순 살아야지. 아. 대감마님 후손 없으면.”
만우는 여기저기 그늘을 찾아 망자처럼 어기적거리는 이들을 보면서 조선에 가서 할 일들을 생각했다.
“사신 정도면 높은 직책이겠지?”
이미 뿔뿔이 흩어진 김약항의 자손들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는데.”
생각해 보면 이건 인연 정도가 아니었다. 설미수와 설운 정도라면 조선에서도 방귀 깨나 끼고 다닐 것이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흐흐흐.”
자신과 한번 엮이면 쉽게 빠져나가지 못 한다는 것을 만우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이상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생각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가치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만우였기에 그는 그것을 적절히 사용할 줄도 알았다. 화산파도 만우와 화산파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식객처럼 일 년이나 머문 것이다. 화산파에서는 최고급 숙소와 매번 진수성찬을. 그리고 가끔 무공지도를 해주고 막대한 재산을 만우에게 지급하기로 했다. 그 대신 만우는 화산파의 이름을 빌려 그에게 덤벼드는 잔챙이들을 쳐냈다. 별의별 중소문파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만우에게 쉴 새 없이 비무 신청을 했기 때문에 거의 신경쇠약에 걸릴 뻔했다.
‘그런 걸 생각하면 하루만 마교인으로 살면 좋을 것 같은데.’
마교인이라면 그냥 다 죽이면 되니까. 만우는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히죽 웃었다.
“어지간히도 빨리 조선으로 가고 싶나 보네.”
만우는 퍼진 병사들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마 올 때는 이렇게 빠른 속도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의 행군 속도가 매우 빨랐다. 정예군이 퍼질 정도로.
“자기네만 힘들지 뭐.”
아마 설미수와 설운의 의지일 것이다. 그 둘은 어쨌든 이 사신단의 책임자였으니까. 행군 속도를 조절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아아. 평화롭고 좋다.”
만우는 간만에 찾아온 평화를 정말 온몸으로 만끽했다. 만우가 무림에 출두한 이후 투쟁의 길만 걸어왔기 때문에 이런 평화가 더욱 달가울 수밖에 없었다. 무림의 은원은 눈덩이가 구르는 것처럼 저절로 덩치를 키웠기 때문에 지난 오 년 동안 한 번도 마음 편하게 쉬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난생처음 거대한 나라를 내 발로, 가고 싶은 곳에 자유의지로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좋아 힘든 줄도 몰랐다. 솔직히 아직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단순히 ‘강함’을 논하기 위해 끝나지 않는 비무를 하는 것은 지겨웠다. 싸워서 얻는 것도 없고, 그 결과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도 모자라 사람들이 원하는 순위를 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되는 것에 염증을 느낀 것이다.
“계속 이렇게 쭉 갔으면 좋겠지만.”
만우는 혀를 끌끌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만우의 곁으로 다가와서 아는 체를 하는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만우에게서 느껴지는 기도 때문이었다. 투쟁의 길을 걸어온 만우의 몸에서는 은연중에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기도가 흘렀다. 그가 이룬 무예의 경지와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만우도 억지로 그것을 조종할 수 없었다.
‘아마 그것을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되면 진인에 들어설 수 있겠지.’
현재 만우의 경지는 기천의 도인이었다. 오 년 전 김약항의 죽음으로 4단계인 법인에 들어선 이후로 고작 한 단계가 올라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고작 한 단계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변화가 그 안에 숨어 있었다. 기천의 일곱 단계는 편의상 기천의 추상적인 부분들을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단계에 무수히 많은 변화들이 숨어 있었다. 4단계인 법인에서 5단계인 도인만 해도 만우가 넘어선 벽이 수십 개가 넘었다.
“으아아아. 아직 중원이어서 그런가. 쉴 수 있게 놔두지를 않네.”
만우는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휘적휘적 걸어 한 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설운에게 다가갔다.
[나 좀 보지?]
“허억!!!”
하늘거리는 버드나무 잎 아래 앉아 여유롭게 과일즙을 먹던 설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흡사 거대한 곰이 두 발로 일어나는 것 같았다.
“무, 무슨.”
귓가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공이 일정 경지에 도달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이었지만 무림인이 아닌 설운이 그에 대해 알 리 없었다.
[이쪽.]
만우가 피식 웃으면서 재차 말하자 설운이 두리번거리다가 만우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러고는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무, 무슨 일이냐.”
여전히 설운은 만우를 보면 한 번씩 말을 더듬었다. 길을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여전했다.
‘하루에 한 번씩 맞아봐.’
하지만 설운도 그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일주일 동안 총 일곱 번을 비무를 하며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처럼 그렇게 무자비한 구타는 아니었지만 좌익찬의 신분으로 누군가에게 얻어맞는 경험이 유쾌할 리 없다. 게다가 때리는 사람이 초장부터 자신을 가지고 논 검주라면 당연했다. 그런 설운의 투덜거림과는 달리 검주라는 강자와 함께 비무를 한 설운의 실력이 일취월장했지만 얻어맞는 건 똑같았기 때문에 정작 당사자는 체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나갔다 오다니 어딜?”
“씁!”
설운의 말이 짧아지자 설운이 움찔했다. 그러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딜 말씀이십니까. 혀, 형님.”
그랬다. 만우는 평민, 아니 노비의 신분으로 무과 급제를 한 설운에게 형이라 부르도록 한 것이다. 자신에게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설운은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만우를 형님으로 모셨다. 아니, 설미수의 말을 들어보면 저 넓은 중원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라니 그렇게 생각하면 또 손해는 아니었다.
‘그래도 맞는 건 싫어. 너무 무섭다고!’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성격이 개차반이어서 별로 기쁘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만우가 흐뭇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날 찾아온 손님들이 있어.”
“손님이요?”
“그래. 불청객이긴 한데…… 내가 좀 은원을 많이 쌓고 다녀서.”
설운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본 만우의 성격이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아마 너희들도 노릴 거니까 사신 나리 잘 지켜. 그리고 짐꾼들이나 병사들은 원진(圓陣)으로 배치시키고.”
“무림인입니까?”
사신단을 수행하는 병사들은 정예군이다. 하지만 만우가 그런 병사들을 원진으로 배치시키라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로 대적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이다.
“더 수가 많으면 모를까. 이 정도 숫자로는 부족해.”
무림인과 군대가 붙으면 그 숫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그 수가 소수일 때는 무림인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군대의 숫자가 늘어나면 군대가 압도적으로 무림인들을 찍어 누른다. 사람인 이상 체력의 한계와 내공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사신단의 병사라고 해봤자 백 명 남짓이기 때문에 그들로 무림인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삼류나 이류면 모를까.
“지금 오는 놈들은 최소 절정이야.”
“……?”
설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만우는 상대가 무림인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만우가 다시 고쳐 말했다.
“전부 최소한 네놈 정도 실력은 된다고.”
만우가 판단하건데 설운의 실력은 딱 절정고수 수준이었다. 그것도 절정의 초입 정도. 약관의 나이에 절정의 초입이란 것은 중원의 내로라하는 후기지수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경지다. 미약하나마 자신의 무기에 기를 두를 수 있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어서.”
휙. 까앙!!!! 만우가 긴 피풍의 속에 숨겨놨던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설운의 바로 코앞까지 날아온 화살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왔다. 그것을 본 설운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화살이 날아오는 것도 설운은 몰랐기 때문이다.
“무음시(無音矢)?”
만우가 코웃음을 쳤다. 소리 소문 없이 날아가는 화살을 쓰는 놈은 무림에 한 놈뿐이다.
“이놈! 역수교어 필두가 검주의 명줄을 따러 왔다!!!”
배에서 내린 수적들이 검주를 향해 저쪽에서 우르르 달려왔다. 하지만 만우는 그쪽이 아니라 다른 쪽을 쳐다봤다. 그쪽에서도 뿌연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미꾸라지 놈들은 꺼져라! 검주의 목은 나 옥면산군 감령의 것이니라!!”
딸랑딸랑!!
요란한 방울 소리와 함께 산사태처럼 감령이 산 위에서 뛰어내려왔다. 그런 그의 뒤로는 채주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하. 환송회가 너무 거창한데?”
만우는 산적과 수적들의 면면을 보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네놈들의 머리를 다 합치면 대체 얼마냐.”
산적과 수적들의 머리에는 관에서 걸어놓은 현상금이 걸려 있다. 그리고 그것이 녹림십팔채나 장강수로이십팔채의 총채주와 채주 정도라면 그 액수가 어마어마하다.
“잘됐네. 돈은 많을수록 다다익선이니까.”
화산파에서 한몫 챙긴 만우지만 굴러들어오는 돈주머니를 제 발로 걷어찰 리가 없다. 현상금이 걸린 놈들이 제 발로 다가온다는 것은 말 그대로 호박이 넝쿨째 들어오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우웅-! 초절정 고수만이 뿜어낼 수 있는 화려한 내기의 파도가 만우를 노리고 양쪽에서 덮쳐들었다.
“크하하하하!”
만우가 자신에게 몰려드는 내기의 파도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치켜든 채 광소를 터뜨렸다. 꽈앙!!!! ***
“검주가 조선으로?”
“예. 하오문을 통해 얻은 정보입니다.”
“무화 그 아이 말인가?”
“예. 비싼 값을 주고 샀습니다.”
“비싼 값이라.”
마교의 교주이자 무림에서 일패(一覇)라고도 불리는 혈세천마가 끌끌거리며 웃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는 마군자 마원이 빙긋 웃었다.
“마교의 살림꾼이 비싼 값을 다 줬다고? 예끼 이놈아.”
혈세천마는 퉁퉁하게 나온 배를 두드리면서 웃었다. 한 판 붙자고 십만대산까지 찾아왔던 검주 만우를 피해다닌 바로 그 천마였다.
“그럼 시작해도 되겠구나.”
“예, 천마시여. 모든 준비가 끝났나이다.”
“끌끌. 좋구나. 그럼 시작해라.”
“예. 반드시 중원의 모든 눈을 조선으로 돌리겠나이다.”
마군자는 끝까지 점잖은 웃음을 지었다. 혈세천마도 기껍다는 듯 끌끌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 콰자자작!!!
“크억!”
감령의 입에서 피분수가 솟아올랐다. 감령의 독문병기인 풍월부는 만우의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철검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크흐흐. 검주. 이 괴물 같은 놈.”
감령은 클클거리며 웃었다. 만우는 철검을 휘리릭 돌려 다시 검집에 꽂았다. 끄으으으. 으아아아. 놀랍게도 만우를 노리고 달려든 녹림 산적들과 장강 수적들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최소 절정고수인 각 채의 채주라는 점을 봤을 때 엄청난 사건이었다. 통상적으로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몇 배는 더 힘들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심지어 가장 기세 좋게 달려들었던 역수교어 필두는 채 십 초를 견디지 못하고 그가 애지중지하는 각궁과 함께 정신을 잃고 대자로 뻗었다.
“흐흐흐. 무화. 그 귀여운 계집애가 내 정보를 팔았다 이거지?”
만우의 몸은 조선으로 가는 길에 있었지만 그는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 녹림십팔채와 장강수로이십팔채의 채주들이 그를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 바로 하오문을 통해 정보가 흘러나간 것이리라. 산적과 수적이지만 이들의 복수심은 정평이 나있어서 어딜 가든 산과 물을 만날 수밖에 없는 중원에서는 그들과 척을 지면 상당히 괴로워졌다.
“그래도 잘됐다.”
만우가 씩 웃으면서 땅에 쓰러져 파들파들 떨고 있는 감령과 필두를 쳐다봤다.
“내가 짐 매고 가기도 귀찮았는데. 가서 내 수발들 놈들도 필요하고.”
조선으로 가면 좀 편하게 살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그러기 위해서는 몸종이 필수였다. 비록 그가 비천한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능력이 있으면 뭐든 못 하겠는가. 만우의 마수(魔手)가 감령과 필두를 뒤덮었다. 부르르르.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감령과 필두가 원인 모를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