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검주, 머슴이 되다!(1)2019.02.02.
“어, 어서 일어나시, 아니. 일어나라. 오늘 출발해야 됩…… 아니 된다.”
만우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르 떴다. 그러자 만우에게 더듬거리며 말을 하던 설운이 흠칫 놀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아직도 설운의 얼굴에 그려진 알록달록한 그림은 완전히 빠지지 않았다. 만우가 심혈을 기울여 두드렸기 때문에 근골은 멀쩡했으나 피륙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인이 늦게 기상하다니. 기본이 안 되어 있군.”
만우는 혀를 쯧하고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운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는 만우야말로 아침 수련을 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난 다 끝냈어. 나도 이렇게 하는데 나한테 복날에 개만큼 두드려 맞은 너는 더 열심히 해야지.”
만우가 낄낄거렸다. 그러자 설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세자익위사 소속으로 고작 약관의 나이에 좌익찬이 된 그가 언제 이런 무시를 당해봤겠는가. 하지만 설운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만우에게 정말 개처럼 두드려 맞던 기억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아니, 투지를 일으키고 싶어도 몸이 그런 주인의 뜻을 무시했다.
“아함. 잘 잤다.”
만우는 태연하게 기지개를 쭉 켜면서 느릿느릿 일어났다. 다른 이들이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태평함이었다.
“어, 어서 나와라. 너 때문에 늦어지면 안 되지 않느냐.”
설운은 굉장히 어색한 티를 팍팍 내면서 만우에게 말했다. 그날 만우는 설미수의 조선사신단에 합류했다. 혼자 조선까지 가는 것이 심심하겠다고 느낀 만우가 요청했기 때문이다. 사실 강요를 가장한 요청이었다. 설미수가 그것을 거부할 힘이 없으니 당연했다.
‘권희달과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남자의 요청을 어찌 거절해.’
축 늘어진 설미수의 어깨가 설운의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사신단의 상전이 바뀌었다. 물론 설미수와 설운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상상도 못 할 테지만.
‘그런데 왜 저 인간을 저한테 붙여주신 겁니까!’
설운은 속으로 절규했다. 새로이 사신단에 합류한 만우는 관직이 없기 때문에 머슴으로 참여하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하사한 물건들을 조선까지 가져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미수는 만우를 정말 짐꾼으로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시종 같은 역할로 만우를 설운에게 맡겼다. 어차피 그는 호위대장으로 사신단의 맨 앞에 있으니 자신의 눈앞에서 만우를 치우기 위함이었다.
‘너무하십니다!’
설운은 어찌할 줄을 모르는 기색으로 서성거렸다. 만우는 고개를 저었다.
“야! 연기를 할 거면 똑바로 해! 그렇게 했다가는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히끅!”
만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설운은 딸국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설운이 울까싶어 만우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에휴. 한심한 놈.”
대놓고 자신을 무시했지만 설운은 목소리마저 크게 낼 수 없었다.
“여기서 한양까지는 얼마나 걸려.”
만우는 일어나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짐이라고 해봤자 피풍의밖에 없었다. 머슴이 되었기 때문에 삿갓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하, 한 한 달 정도 걸린다.”
설운은 애써 당당함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상당히 불편하고 힘들었다.
“한 달? 흐음. 심심하지는 않겠네. 가끔 대련도 하고. 어?”
만우가 웃으면서 주먹을 쥐었다. 설운이 움찔했다.
“야. 너 스무 살밖에 안 먹었다면서. 그러면 강적이라도 좀 싸워보고. 그래야 세자 전하를 지키지. 그렇게 담이 작아서야…… 쯧쯧.”
그의 주먹질 앞에서 버텨낼 수 있는 존재는 중원에도 거의 없음을 쏙 빼버린 만우는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설운은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대련이라는 소리에 이미 혼이 반쯤 몸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만우가 주먹을 쥐었을 때부터.
“어쨌든 갈 때는 조용히 갈 거야. 그러니까 괜히 쫄지 마. 마주칠 일도 별로 없을 테니까.”
만우는 검주라는 것을 온 사방에 광고하면서 가고 싶지 않았다. 설운은 오히려 그 말이 반가웠다. 그 말인즉슨 행군을 하는 와중에는 저 괴물의 얼굴을 볼 일이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아. 짐은 최소한만 들고 간다.”
“그, 그렇게 해라!”
상당히 어색한 경어를 쓴 설운이 몸을 홱하고 돌렸다. 만우는 빙글거리며 웃고는 그런 설운의 뒤를 따라 숙소에서 나왔다.
“이, 이걸 들어라.”
설운이 머슴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 특별히 작은 짐 하나를 가리켰다. 사신단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짐꾼들도 전부 병사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설운이 웬 머슴 하나를 데려오니 단박에 만우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안녕하세요, 나리들. 전 저기 산동 지역에 살던 사람인데 이번에 좌익찬 나으리 덕분에 조선으로 가게 됐습니다요.”
설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그런 것까지 생각한 것인지 만우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한 말에 조금도 빈틈이 없었던 것이다. 명나라에 온 사신단들이 가끔 명에 온 조선인 중 희망하는 자들을 다시 조선으로 데리고 가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군사들이 납득하고는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가. 너 때문에 더 주목받잖아.”
만우가 으르렁거리면서 낮게 말하자 화들짝 놀란 설운이 자신이 할 일을 하기 위해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불안한 것인지 뒤를 힐끔거리면서 사라진 설운을 본 만우가 피식 웃었다.
“제법 귀엽네.”
***
“채주. 꼭 가야겠습니까?”
“뭐 임마? 너 녹림 나갈 거야?”
“아, 아니요.”
“그럼 닥치고 따라와. 녹림의 의기는 식지 않는다! 우리 형제를 다치게 한 원수에 대한 복수도 식을 수 없지!”
상의를 호피로 만든 가죽옷으로 두른 남자의 손아귀에 멱살이 잡혀 있던 산적이 켁켁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의기는 무슨. 산적이 언제부터 의리가 있었다고!’
녹림이니 산군자니 그런 것들은 전부 산적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상인들의 노림수였다. 사람이란 것이 불리는 이름에 민감하기 때문에 그렇게 높여주면 함부로 나쁜 짓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웬만큼 숙련된 산적만 되도 그런 허명에는 신경을 쓰지 않지만, 문제는 그런 이름에 신경을 쓰는 것이 채주라는 것이 문제였다.
“꼴좋다. 내 말했지? 총채주가 들어먹을 리 없다고.”
“젠장. 그럼 이대로 가서 검주한테 꼬라박아야 된다고? 심지어 사신단이라고!”
호피 상의를 입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잘못했다가 멱살이 잡혔던 혈왕채 채주 소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명 황제가 총애하는 조선 사신이랜다. 그런데 검주가 그 틈에 끼어들어갔다는데 무슨 수로 한다고.”
“산적이 어쩌긴 뭘 어째.”
태연한 초산채 채주 한우의 말에 소후가 입을 떡 벌렸다.
“사신단을 상대로 검주를 내놓으라고 배짱을 부리겠다고?”
“응. 산적이 원래 그래야 되는 거 아니야? 길 딱 틀어막고 ‘검주를 내놓아라!’ 이러는 거.”
한우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소후는 이놈도 총채주와 똑같은 미친놈이란 것을 깜박 잊었다면서 그에게 말한 자신의 머리를 저주했다.
“아악! 총채주란 인간이 저딴 식으로 막가파면 어쩌자는 거야!”
호피 상의를 입은 남자. 산적이라면 다들 수염이 덥수룩하고 덩치가 크며 잔혹하고 호색한일 것이라는 대중의 편견을 깨는 멀끔하고 깔끔한 모습의 준수한 미중년인 총채주. 녹림제일채(綠林第一寨)인 옥면대채(玉面大寨)의 대채주이자 중원 녹림들 중 으뜸인 열여덟 개의 산채를 모아 만든 녹림십팔채의 총채주 옥면산군(玉面山君) 감령의 선포에 녹림십팔채가 들끓었다. 사실상 옥면대체에서 감령의 수하로 십 년간 복무한 후 한 세력 잡아 그에게서 독립하여 만든 산채들이 녹림십팔채 중 절반이 넘었기 때문에 감령의 권위는 무소불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십만 녹림이 감령의 한 마디면 불에 섶을 지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충성심이 강했다. 그리고 그의 별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멀끔한 얼굴과 산적답지 않은 깔끔한 산적행으로 상인들에게서도 인정을 받았다. 필요 없는 살상이나 필요 이상의 산적질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면에 있어서는 관의 힘이 미치지 않는 주(州)와 주(州) 사이의 치안을 담당하는 효과도 일궈냈다. 하지만 그런 감령도 잊을 수 없는 원한이 하나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원한(怨恨)이라고 하기보다는 자존심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가 녹림에서 한창 떠오르는 신성일 때, 그러니까 불과 오 년 전에 감령은 검주를 만났다. 그때는 검주란 이름을 얻기도 전이었고, 그의 존재가 무림에 알려지기 전이었는데 산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검주는 감령에게 달려들었다. 당시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던 감령도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감령은 만우와 하루 밤낮을 싸웠다. 그리고 그 싸움 끝에 그의 성명절기인 풍월부법(風月斧法)이 검주의 신묘한 검법에 의해 개박살이 났다. 그렇게 패배한 감령은 그로부터 하루 동안을 더 얻어맞았다. 무릎을 꿇고 빌기를 또 빌기를 수차례.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검주는 이제는 더 이상 때리기도 피곤하다며 가버렸다.
“크으!”
그때를 생각하면 감령은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치욕으로 인해 감령은 자신의 풍월부법을 극성까지 끌어올렸고, 그 이후로 녹림에서 그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던 산적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검주로 인해 지금의 감령이 탄생한 것이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녹림의 대채주인 그가 나선 것이 아니다. 녹림은 검주에게 분명히 혈채가 있었다. 호왕채. 검주의 손에 의해 한 명도 살아남지 못 한 호왕채의 일이 있었다. 물론 그 안에서 인신매매나 성노예 같은, 감령이 알았어도 단박에 쳐죽였을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긴 했다. 하지만 그들을 벌해야 하는 것은 녹림대채주인 감령이 돼야지, 제삼자인 검주가 되어서는 안 됐다. 그런데 그런 검주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해서 감령을 비롯한 녹림십팔채는 심히 당황을 했다. 그에게 혈채를 받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라진 검주가 몇 달 동안 발견되지 않자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하오문을 통해 정보가 들어왔다. 사라진 검주가 북경에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그 검주의 목적지가 조선이라는 것.
‘조선에 가기 전에 나와의 승부는 보고 가야지 검주!’
그래서 감령은 소수 정예로 북경으로 단박에 뛰어갔다. 조선으로 가는 검주와 마지막으로 승부를 보기 위해서. 그래서 자신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서!
“어서 가자! 그 미꾸라지 놈들이 먼저 따라잡기 전에 우리가 먼저 도달해야 한다!”
산을 타는 감령과 그의 뒤를 따르는 채주들의 신법이 한층 더 빨라졌다. ***
“수룡채의 복수를 위하여!”
장강수로이십팔채(長江水路二十八埰)의 총채주인 역수교어(逆水鮫魚) 필두가 무식하게 큰 박도를 휘두르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평소라면 그의 대선단이 필두의 뒤를 받쳐주었을 테지만, 그는 웅장한 그 대선단의 자태를 드러낼 수 없었다. 바다. 장강에서 활동해야 하는 그들이 바다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채주! 군선이오!”
“……눈에 띄지 않게 틀어라!”
바다는 명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적 출신인 그들이 바다로 나와 북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군선들이 본다면 아마 대추격전이 펼쳐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두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최소한의 인원을 끌고 북경으로 향했다.
“검주!”
검주. 필두의 동생이지만 원수나 다름없는 수룡채주 필소를 죽인 장본인. 필소 역시도 총채주인 필두의 이름을 등에 업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여 평민들의 등골을 빨아먹다 죽어 잘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처분은 형인 자신에게 맡겼어야 한다. 검주의 손에 필소가 죽었다는 소식에 필두의 칠순 노모가 시름시름 앓다 죽었으니 검주는 필두의 가족을 두 명이나 죽인 것이다.
“죽었다 복창하거라 이놈!”
그는 교어(상어)라는 칭호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난폭하게 검주의 이름을 씹고 또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