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조선 사신(3)2019.01.29.
두주는 그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리한 요구라는 것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두주는 상인이고, 조선 사신을 상대로 그런 말을 할 정도의 위치는 되었으니까. 그리고 겉으로만 듣기에는 주고받는 것이 충분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진상품으로 올릴 공물의 수량을 조작하자는 것이었고 공녀까지도 탐을 냈으니까. 만우가 그것을 눈치챌 만큼의 역량이 있다는 소리였다.
“끄응…….”
왕에 대한 것은 쉽게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되는 금어다. 과거의 일이라고 해도 그렇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그가 적절한 때 끼어든 것은 확실했다.
“그것이…….”
설미수가 입을 열려는 순간 만우의 몸이 풍차처럼 빙그르르 회전했다. 바로 앞에 있던 설미수의 얼굴에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만우의 옷이 펄럭이면서 강풍을 만들어낸 것이다.
“설 대인!”
콰작!!! 쩡!! 주르르륵. 그런 만우를 향해 천장에서 웬 검은 인형이 뚝하고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은빛 섬광이 번쩍하더니 허공에 불꽃이 튀겼다. 동시에 만우의 몸이 주르륵 뒤로 미끄러졌다.
“괜찮으십니까?”
“나, 난 괜찮네.”
바로 코앞에서 검이 번쩍였기에 설미수는 혼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만우와 팽대수의 싸움을 봤기 때문인지 아까보다는 나았다.
“웬 놈이냐!”
설미수는 자신의 앞을 커다란 등이 가로막는 것을 봤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은 조선에서부터 설미수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세자익위사 소속 군관이다. 세자익위사라면 세자와 동궁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관청으로 내금위보다는 못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뛰어난 무인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하. 검부터 휘두르고 보네?”
뒤로 밀려나긴 했지만 만우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거의 기습이나 다름없는 공격이었음에도 뛰어난 순발력을 발휘한 것이다. 만우가 자세를 풀면서 손목을 풀자 그가 만만치 않다 판단한 군관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난 좌익찬 설운이라 한다. 네놈은 누구냐!”
갑자기 사라진 설미수를 찾아 북경을 헤집고 다닌 설운이다. 궁에 입궐한 이후로 사신단의 호위라는 중책을 처음 맡은 터라 예민했는데, 사신 대표라 할 수 있는 설미수가 사라졌기에 설운은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북경을 뒤졌다. 다른 기루부터 시작해 투전판까지 훑고 돌아다녔다. 그러던 와중 북경제일루라 불리는 만향루에서 소란이 벌어졌다는 것에 곧바로 달려온 설운이었다.
“얼씨구. 이제는 암습한 놈이 이름도 밝히네.”
만우가 설운을 비꼬면서 검을 늘어뜨렸다. 순간 설운이 헛숨을 들이켰다. 거대한 태산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연체(自然體)라 불리는 상승무공의 경지였다.
“왜. 또 달려들어 보지.”
만우는 난폭하게 웃었다. 설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설미수에게 위협이 닥쳤다고 판단한 것이 옳았다. 이런 무지막지한 놈을 문관인 설미수가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
“설 대인. 제가 이놈을 상대할 테니 어서 피신하시지요.”
“어, 어디로 말인가.”
설미수는 만우가 가로 막고 있는 계단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설운은 곧바로 만우를 향해 뛰어들었다.
“지금!”
카앙!!! 설운은 장신이었다. 동시에 기골이 장대하고 팔다리가 길어 만우를 향해 달려드는 기세가 맹렬하고 사나웠다. 그 기세에 순간적으로 만우가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뿐, 만우가 보기에는 기교가 부족했다. 훙! 훙! 훙! 설운의 검에는 천년거력이 담겨있었다. 만우는 그것을 보면서 혀를 찼다.
‘힘만 따지면 팽대수보다도 더 위겠네. 차라리 도를 휘두르지.’
팽대수보다 더 흉맹한 소리가 검에서 뿜어질 정도였으니 설운의 힘을 가늠할 만했다. 게다가 40대 중반인 팽대수에 비해 설운은 이제 갓 약관의 나이였다. 설운의 힘이라면 검보다는 도, 혹은 장병기가 더 어울렸다. 만우는 그런 설운의 검을 유유히 피했다.
“이, 이런.”
반면 설미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자신이 보기에도 흉맹한 기세로 설운이 달려들었지만 만우는 계단을 막고 선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압!!”
설운은 그런 만우에게 기합을 내지르면서 뛰어들었다. 하지만 설운의 얼굴은 어두웠다. 강맹한 그의 기세와는 달리 설운은 냉정하게 만우와 자신의 실력을 비교했기 때문이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세자익위사의 좌익찬 자리는 종6품의 높은 벼슬이다. 그것도 약관의 나이에 그 정도에 오를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높았던 설운은 짙은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모래알처럼 많다더니!’
설운은 이를 악물었다. 기인이사라고 하기에는 만우가 중원에서 너무 유명했지만 조선에서 온 그가 검주라는 이름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놈 참,’
만우는 입맛을 다셨다. 설운의 검을 피내해고 있었지만 사실은 이렇게 싸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불붙은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설운을 말릴 방법이 딱히 없었다.
“아니. 난 답만 얻으면 됐다고.”
설미수에게 해를 입히거나 그럴 생각은 없었다. 설미수와 말을 섞으니 그놈의 사대부 타령 때문에 열이 뻗치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원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이 이 곰 같은 놈!!”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자 열이 뻗친 만우의 주먹이 설운의 얼굴에 작렬했다. 뻐억!
“커억!!”
설운은 쇠망치가 자신의 얼굴을 때린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하지만 설운은 뒤로 쓰러진 만큼의 속도로 벌떡 일어났다.
“설 대인은 건드리지 못 한다!!!”
“아니, 건드리려는 게 아니라고!”
만우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설운의 발을 걸었다. 동시에 설운의 목을 손날로 쳤다. 퍼억! 우당탕!! 설운이 바닥을 굴렀다. 그러느라 화려하게 꾸며놓은 만향루의 기물들이 우수수 부서졌다. 척 보기에도 값나가 보이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설운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그 한 방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덩치만큼이나 얼마나 맷집이 좋은지, 충분히 기절할 정도로 때렸다고 생각했는데도 일어섰다. 그런데 만우는 다시 한번 놀라야만 했다.
“으으으. 어딜 가!!”
설운이 또다시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만우는 분명히 경동맥을 손날로 쳤다. 잠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분한 힘을 실어서. 후들후들. 비록 설운의 다리는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어난 것이 대단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맷집이었다.
‘맷집에 신력이라. 선봉장으로 적격이겠군.’
만우는 설운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앞으로 나이를 먹고 저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 선봉장으로 뛰어들어 적의 사기를 꺾는데 최적의 무인이 될 것이다.
“그래도.”
만우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말 안 듣는 곰은 결국 매가 약이었다.
“나에게 먼저 검을 휘두른 대가는 치러야지. 날 오해해서 나에게 입힌 정신적인 피해도 보상을 해야 하고. 그리고 내 시간도 잡아먹었잖아?”
만우는 고개를 틀어 사납게 웃으며 설미수를 바짝 얼어붙게 만들었다. 동시에 비틀거리는 설운에게 다가간 만우가 목을 뚝뚝 소리가 나게 이완시키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자. 맞자 곰탱아.”
“꽤에에에엑!!!”
곰이 울부짖는 소리가 아니라 돼지 멱따는 소리가 만향루 오 층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
“이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대협.”
황금으로 치장해 놓은 것 같은 번쩍거리는 방 안을 둘러본 만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쓸 만하군. 앉으시오.”
설미수는 이제 더 이상 놀랄 겨를도 없었다.
‘명의 황제의 자금성보다도 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곳이 있다니.’
털썩. 만우는 어깨에 들쳐 메고 온 덩어리를 땅바닥에 털썩 내려놨다. 땅바닥이 아니라 비단 금침으로 된 보료 위에서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호오. 대단한 맷집이야. 그렇게 맞고도 움직일 수 있다니.”
움찔. 만우의 감탄에 설미수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아까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서운 놈이다.’
만우는 설운을 아낙네들이 냇가에서 빨랫방망이로 두들기는 것처럼 아주 늘씬하게 패버렸다. 복날 개도 저렇게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만우는 설운을 패면서 설운의 신체구조에 대해 조사하듯 나중에는 숫제 국자감 학자들처럼 설운의 몸을 때렸다.
“대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음. 들어와.”
문이 열리고 임수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조신한 몸놀림으로 약재를 한가득 들고 시비들과 함께 들어섰다.
“의원은?”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호. 무화가 의술도 할 줄 아나?”
설미수는 임수미의 저런 공손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미수도 공손해지려는 자신의 몸을 다잡는데 고생 중이었으니까. 압도적인 무력. 거의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구타 실력만으로도 설미수는 충분히 기가 질렸기 때문이다.
‘무림에서 가장 강한 열 명 중 한 명이라니.’
설미수는 오면서 임수미에게 은근슬쩍 만우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모래알처럼 사람이 많은 명에서도 열 명 안에 들 정도의 무인이라니,
‘그래서 그렇게 당당했던 것인가.’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설미수를 압도한 기백을 떠올리니 그의 무위가 이해가 갔다.
‘사대부나 반상의 법도나. 우스워 보일 수밖에 없지.’
설미수는 유학자였다. 조선에서 관직에 들기 위해서는 유학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자세를 바꿀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신의 대표가 되지 못 했을 것이다. 유학자들 중에서는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외교관으로 낙점이 된 것이다.
‘사대부니, 양반이니 하는 것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만우가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적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광산군과 그가 무슨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관련된 것들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삼봉과 전하라니. 무슨 관련이 있길래.’
그런데 명에서 비명횡사한 광산군을 알고 있는 이자가 삼봉과 정안군에 대해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윽, 스윽. 임수미의 손이 파랗고 붉게 물든 설운의 온 몸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만향루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곳이 아니라 판단한 만우가 임수미를 불러 하오문의 북경 안가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안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했다. 사실은 안가가 아니라 하오문에서 고관대작이나 유명인사와 은밀한 대화를 주고받기 위해 만든 곳이다.
“생각이 많은 것 같소?”
만우는 툭하고 한마디 했다. 설미수는 만우가 아무렇게나 말하는 저 한마디가 의표를 정확히 찌르고 들어온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긴장의 고삐를 조였다.
“아까는 내가 너무 흥이 돋았소. 걱정 마시오. 내 사신 나리에게 그렇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만우가 사납게 웃었다. 그게 흥이 돋아서 한 짓이라니. 설미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좋아. 이제는 말해주시오. 내가 궁금한 건 딱 그 두 가지요.”
은월루에 대해서 만우는 말을 아꼈다. 처음 보는 설미수에게 많은 정보를 줄 필요 없다.
“말씀 드리겠소.”
눈앞에 있는 주먹에 설미수는 굴복했다. 아니, 정확히는 눈앞의 주먹과 날을 세워서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다니 선 것이다. 그런 설미수의 태도가 한순간에 부드럽게 변했지만 만우는 이해한다는 듯 사나운 웃음을 유지한 채 설미수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만우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왕?”
“그렇소. 삼봉은 죽었고, 정안군께서는 현재 전하가 되셨소.”
“허…….”
만우는 고개를 저었다. 왕이라니. 만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거물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광산군, 김약항은 자신의 복수를 부탁하지 않았다.
“광산군, 그분의 자식들은 어떻게 되었소?”
설미수는 만우의 표정을 살폈다. 광산군과 무슨 인연이 닿아 있음은 확실했다. 문제는 광산군이 죽었다고 알려진 시기와 만우의 나이를 비교해보면 만우가 지나치게 어리다는 것이다.
‘알아봐야겠군.’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강한 무인이 조선인이라는 것은 큰 정보다. 그가 광산군과 연이 닿아 있다는 것이니 그에 대해 알아봐서 나쁠 것은 없었다.
“알려진 바가 없소. 솔직히 광산군은 대국(大國)에서 그렇게 유배를 가신 후 잊힌 존재가 되었으니까. 대국과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광산군이란 이름을 내려주는 것이 고작이었소.”
“끄응…….”
만우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훨씬 막막했다.
“하는 수 없지.”
하지만 막막해도 어쩔 수 없었다. 막막한 채로 시작하는 수밖에. 만우는 끙끙거리고 있는 설운을 돌아본 후 설미수에게 물었다.
“그래 사신 나리. 언제 조선으로 돌아가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