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조선 사신(2)2019.01.26.
임수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동시에 임수미는 자신의 탁월한 선택에 대해 거듭 자화자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 분타주.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꿈은 아니겠지요?”
“…….”
임수미는 평소 같으면 그런 얼빠진 모습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부하의 감상에 적극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저것이…… 무림 사주(四主) 중 하나인 검주!’
조선 사신이라는 설미수의 창백해진 얼굴은 임수미에게는 안중에도 없었다. 임수미의 눈에는 오롯이 만우밖에 보이지 않았다. 휘몰아치는 폭풍에도 절대로 꺾이지 않는 버드나무의 가지처럼 만우는 고고한 자태로 도의 폭풍 안에서 움직였다. 그리고 만우의 손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요란하게 콩 볶는 소리와 함꼐 불꽃이 파바박하고 튀었다.
“아무리 검주라고는 하나 북경제일도의 도가 저렇게 어린아이의 도처럼 보일 것이라고는…….”
임수미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북경제일도(北京第一刀) 팽대수. 하북팽가의 일원이자 북경을 기반으로 군부에 탄탄한 세력을 구축해놓은 하북팽가는 정파무림에서 유일하게 구파일방에 버금간다는 오대세가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팽대수는 하북팽가의 절기인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를 극성까지 익힌 40대의 고수로 차기 삼존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그보다 열 살이 넘게 어린 검주 앞에서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이이익!!!”
콰차자자작!!! 도의 폭풍을 일으켜 자신의 기척을 숨긴 팽대수가 이를 악물었다. 하북팽가의 오호단문도는 극강의 패도를 추구하는 도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폭풍 안에서 팽대수가 호랑이를 일으킬 때마다 어마어마한 도격이 쏟아졌지만 검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맞아라!”
팽대수의 수양은 얕지 않지만, 물에 흘러가는 버들잎처럼 도저히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만우의 신묘한 보법에 서서히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본래 하북팽가의 사람들은 성격이 호전적이며 급하다. 대대로 태어나면서 신력(神力)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 근력을 바탕으로 호쾌하기 그지없는 도법이 그들의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집안 성격을 고스란히 가지고 태어난 팽대수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금방이다.
“내 갈 길이 머니.”
만우는 도의 폭풍 속에서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것이 팽대수에게는 분노를 넘어 공포로 다가왔다. 흡사 유령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팽대수가 북경제일도란 칭호를 얻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비무를 해왔고, 패배한 것도 수십 번이 넘지만 지금처럼 압도적인 적은 거의 없었다.
“이만 여기서 끝낼까 한다.”
쩡!!!
만우는 천천히 주먹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팽대수는 난생 처음 신기한 광경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도했다. 도의 폭풍이 만우의 주먹질 한 번에 와해되는 장관을. 툭.
“…….”
“좋은 도였다.”
만우는 팽대수보다 열 살이 넘게 어렸지만 그는 그 누구에게도 존대를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어(漢語)가 그의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어렵고 복잡한 존대를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적합했다. 다행히 무림인은 무(武)로 논하면 충분했기 때문에, 검주 만우의 그런 성격은 그의 개성이 됐다.
“졌소.”
팽대수는 도극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그는 패배를 인정했다. 안 그래도 북경제일도란 이름을 가지고 일개 장사치의 호위를 서는 것이 못내 불만이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 그 북경제일도도 검주란 이름 앞에서는 허명이었을 뿐이니, 팽대수에게는 이제 공식적으로 이 일을 때려칠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두 대행수.”
“팽 대협.”
만우는 팔짱을 꼈다. 팽대수는 도를 늘어뜨리고는 정중하게 두주와 만우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팽 모는 검주 만우 대협에게 패배하였음을 인정하였소. 이에 더 이상 두 대행수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점, 양해 바라오.”
팽대수는 하북팽가에서도 가장 예의를 차리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두주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가시오.”
“부디 보중하시길.”
팽대수는 두주에게 목례를 했다. 그러고는 만우에게 다시 한번 포권을 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만우는 고개를 꺾었다. 만우는 창백해진 얼굴이지만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 설미수를 힐끗 쳐다봤다. 만우가 용건이 있는 사람은 바로 설미수였다.
“임수미.”
타닥. 만우가 임수미를 부르자 만향루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임수미가 오 층 난간에 내려서며 공손하게 말했다. 만우는 그런 임수미를 보면서 풀썩 웃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공손해졌네?”
“무슨 말씀을. 소녀 처음부터 성심으로 검주 대협을 모셨나이다.”
“쓸데없는 소리 됐고. 저 양반이지?”
두주의 표정이 굳었다. 임수미의 얼굴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자신을 노린 것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누구냐! 누구기에 감히 북경에서 이런 무도한 짓을 벌이는 것이냐!”
“하.”
임수미가 코웃음 쳤다. 그런 그녀의 용옥에는 감출 수 없는 혐오감이 배어 있었다.
“황제 폐하의 앞마당인 북경에서 인신매매를 하고도 살아남을 성 싶었더냐?”
“뭐, 뭐라!”
두주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황룡상단이 인신매매를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막강한 금력을 바탕으로 전방위에 뇌물을 먹여온 두주였기에 그의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네, 네년의 정체는 무엇이냐. 동창이냐? 아니면 금의위?”
두주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창이나 금의위 중에 여자가 없다는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임수미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몸을 날렸다. 타다닥. 하오문에게 부족한 것이 무공이라고 하지만 전혀 무공을 배우지 않은 두주를 상대로는 임수미 정도면 차고 넘쳤다. 그녀가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면서 두주의 혈(穴)을 점했다.
“그럼…… 어떻게 지불해 드릴까요.”
만우가 임수미를 쳐다봤다.
“몰라서 묻는 것이냐 아니면 알면서 날 떠볼 셈이냐. 두 방법 다 별로 현명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가 조선으로 간다는 것은 주지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를 어떻게 지불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그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조선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 상단의 어음이나 조선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패물. 임수미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협. 그럼 정산이 되는 대로 곧바로 드리겠사옵니다.”
“내일 아침.”
“예, 대협.”
내일 아침까지 검주를 움직인 보상을 마련해야 한다. 그냥 일개 무림인도 아니고 중원에서 제일 강한 열 명 중 한 명인 검주를 움직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을 하루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준비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임수미는 토를 달지 않았다. 북경제일도를 상대하면서 검도 뽑지 않고 주먹으로 깨부순 그의 무위 때문이다.
‘검주는 신의 경지에 닿았다’
이 사실은 하오문에 의해 퍼져나갈 것이다. 하지만 말이란 것이 늘 변화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만큼, 이 사실이 중원의 끝까지 퍼지고 난 다음에는 이렇게 바뀔 것이다. [무공이 신의 경지에 닿은 검주가 우화등선하였다.] 꾸벅. 임수미는 만우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한 손으로 두주를 가볍게 든 채 다시 난간을 통해 바깥으로 사라졌다. 만우는 자리에 앉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설미수를 쳐다봤다.
“제법이시오. 무예를 하나도 할 줄 모르시는 것 같던데.”
설미수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만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한어(漢語)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선 사람인가?”
“그렇소.”
만우는 허공섭물(虛空攝物)로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브러진 물건들을 대충 치우고는 설미수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거침없는 행동에 설미수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나에게 볼 일이 있는 것인가?”
“그전에 하나만 물읍시다.”
만우는 설미수에게 말했다. 설미수는 유학자 특유의 고집스러움이 묻어나오는 얼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원래 조선에서 노비라는 것을 알면, 이 남자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조선에서 온 사신이 어찌 호위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거요.”
“흐음…….”
설미수는 슬쩍 다른 곳을 쳐다봤다. 원래 그도 함께 조선에서 이곳까지 동행한 사신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설미수를 보좌하는 호위도 있었다.
“사적인 일이라 밝힐 수 없네.”
그 호위를 떼어 놓고 나온 사람이 설미수다. 두주가 은밀하게 만남을 청해왔고 분명 무리가 있는 부탁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설미수가 가져가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호위를 데리고 올 수 없었다.
“콩고물이구려.”
“큼, 큼.”
치열한 무림에서 몇 년을 구른 만우의 눈치는 비상했다. 그리고 세력은 없다고 하지만 중원의 으뜸이라는 사주(四主)에까지 오른 만우다. 그가 멍청했다면 결코 그 자리에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사신 나리니 성의라고 해드려야 하나?”
만우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설미수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그리고 설미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날 나리라 부르는 것을 보면 양반은 아닐 터인데. 어찌 이리 방자한 것인가.”
설미수는 사대부다. 그런데 양반이 아닌 사람이 자신의 앞에 마주보고 앉아 농을 하고 있다는 것은 조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방자?”
만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방금 전 자신이 팽대수와 한 비무를 보고도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을 보니 기가 찼다.
“내가 양반인지, 상놈인지. 그게 중요한가?”
만우의 말에 설미수가 노성을 토해냈다.
“감히 한낱 무부 따위가 지엄한 반상(班常)의 도에 왈가왈부를 따진단 말인가!”
“하.”
만우는 고개를 꺾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게 바로 조선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신분으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신분으로 평가받는 바로 그런 나라. 중원도 마찬가지지만 만우가 살아온 무림이란 세상에서는 신분이 소용없었다. 오로지 실력. 물론 명문정파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는 재수 없는 놈들이 있었고 만우도 조선인, 동이족이란 것 때문에 손가락질 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모두 만우의 검 아래 꺾였다. 그리고 얻은 검주라는 이름. 그것이 정면에서 신분이라는 벽 때문에 부정 당하는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장사치에게 불려나와 그 앞에서 말이나 듣고 있던 사대부가 반상의 도를 입에 담는다?”
만우의 조롱에 설미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까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살갗을 따갑게 하는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선의 법도를 나에게 강요하지 마라.”
만우의 몸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설미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구길래 한낱 무부 따위가 이런 기세를 뿜어낸단 말인가. 조정에서 기라성 같은 무관들을 만나봤지만 이 정도의 기세를 뿜어내는 이들은 없었다.
‘조선제일검 정도는 돼야…….’
설미수의 눈이 커졌다. 조선제일검이라 함은 조선의 최강자를 말한다. 태조를 도와 조선을 세운 현 왕과 함께 끝도 없는 수라길을 거쳐 나온 그자가 떠올랐다.
‘권희달.’
그는 금군 소속으로 현재 왕을 지근거리에서 지키는 조선 최고의 무사다. 오직 현재 왕에게만 충성을 받쳤기에 태상왕(太上王)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아 옥에 갇혔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대전에서 조회를 할 때면 그를 마주치곤 했는데 마치 커다란 호랑이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가끔 받곤 했다. 권희달에게서 받았던 압박감과 비슷했다.
‘무예에 대해 모르나 무림이라는 곳의 유명인사로구나.’
설미수는 문관이기에 무예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원에 무림이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룡상단 두주의 호위무사인 팽대수의 기도에는 그도 감탄했는데, 그조차도 설미수의 눈앞에서 가볍게 꺾이지 않았던가.
‘범의 아가리로구나.’
설미수는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상대가 조선인이니 조선의 법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고집스런 생각은 여전했다. 그는 애써 허리를 곧추 편 채 만우의 기세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제법이시오.”
만우는 풀썩 웃으면서 기운을 풀었다. 여기서 더 했다가는 이 약해빠진 조선 사신이 뒤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나를 보러 왔으면 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니오. 말하시오.”
설미수는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평민인 만우에게 반공대를 하는 것만으로도 만우는 그가 평정을 가장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광산군.”
“광산군?”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오자 설미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광산군에 대해 아시오?”
“광산군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때 만우는 어려서 미처 알지 못 했지만 조선 유림에서 그를 모르는 선비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명에 붙잡혀 돌아오지 못 했을 때 그의 구출을 가장 주장했던 사람이 바로 삼봉 정도전이었다.
“삼봉이라는 사람과 정안군이라는 대군에 대해서는 아시오?”
“그 이름을 대체…….”
설미수는 말을 아끼고는 만우를 살폈다. 만우는 나이를 많이 쳐줘야 이립(而立: 30세)이다. 하지만 정안군은 현재 왕의 대군(大君) 때의 이름이다. 그가 알기에는 예전의 일이다. 설미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왜 물으시오.”
“나에게 묻지 마시고 그대는 답만 하면 되오. 그대를 곤란함에서 구해준 대가라고 칩시다.”
“…….”
설미수의 얼굴색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