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검주, 조선으로 가다(2)2019.01.12.
“여기가 북경(北京)이로구나.”
만우는 북경의 거리를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천도하기 전 명의 수도인 남경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도시였으나 현 황제인 영락제가 심혈을 기울여 옮긴 북경은 그 화려함과 크기가 남경에 비해 두 배는 더했다. 잘 닦인 길에서는 마차와 말이 따각거리며 돌아다니고, 삼 층, 사 층이나 되는 높은 건물들이 주변에 즐비했다. 골목 사이로는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활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한번 꼭 와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 흐흐.”
만우는 가벼워진 어깨를 붕붕 돌렸다. 검주라는 무거운 이름을 내려놓으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쓸데없이 관과 충돌할까 봐 검주일 적에는 북경에 올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무리가 없었다.
“북경에 만향루라는 기루가 그렇게 유명하다던데.”
만우는 호기심 충만한 눈을 굴렸다. 지난 오 년 간 무림인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 중 하나에 오른 만우에게는 부와 명예 그리고 여자가 따랐다. 하지만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유람하는 것을 즐겨 마지막 일 년 동안만 화산파가 있는 섬서성 화음현에 있었다. 그들이 무림 방파라고는 하지만 도를 수련하는 도가 계열의 문파였기에 지난 일 년간 만우는 의도치 않게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어쩌면 만우가 조선으로 돌아가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그 금욕적인 생활일 수도 있었다.
“소령이가 알면 펄쩍 뛰겠네. 하하.”
만우는 소령이를 떠올리며 삿갓 아래로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북경에서 섬서성까지 오는 데는 몇 달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원래 검은 피풍의였기 때문에 행색은 떠날 때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유람하듯 즐기고 돈을 내고 객주 같은 곳에 투숙하면서 왔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좋아. 비무하자고 달려드는 사람도 없고.”
만우는 일 년이나 화산파에 머물러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비무. 만우가 공식적으로 검주에 등극하자 그 자리를 탐내고 도전해 오는 도전자들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데서나 비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반드시 공증인이 필요했고, 비무를 할 넓은 공간도 필요했다. 그러던 찰나 만우는 친우인 매화극검 검인의 초대로 화산파의 식객이 되었다. 곤란한 만우의 사정을 들은 검인이 장문인을 꼬드겨 만우를 화산파에 머물 수 있도록 손을 써준 탓이었다.
“그 할아범이랑 가끔씩 노는 것도 재밌었는데.”
만우는 지난 일 년간의 추억을 반추하면서 씩 웃었다. 화산파는 재밌는 곳이었다. 술과 여자는 보기 귀했지만, 구대문파 중 하나인 화산파인 만큼 그곳에는 만우의 심장을 뛰게 하는 초강자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만우와 가장 죽이 맞았던 사람이 있었다. 화산파 태상장문인이자 무림의 기둥 중 하나인 검왕 청기진인. 올해 나이가 백 살이 훌쩍 넘은 그 할아범과 만우는 죽이 잘 맞았다. 물론 검을 섞어 서로의 실력을 확인한 이후에 피어난 우정이었다. 본래 무림인이란 무공으로 말하는 법. 그 자리에서 만우는 동이족이기 때문에 존이나 왕, 패의 별호를 받지 못했음을 증명했다. 칠주야. 칠주야의 비무 끝에 만우는 청기진인을 꺾었다. 그 사실은 화산파에 일대 파란을 불러왔지만 만우가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산파만의 비밀로 남았다. 어쨌든 만우가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아 화산파의 이름과 자존심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장문인인 무인진인은 기꺼이 만우가 식객이 되는 것을 찬성했고. 툭.
“응?”
복잡한 저잣거리 한가운데 서 있었지만 만우에게 감히 몸을 부딪치는 사람은 없었다. 무림인이어서다. 비록 이곳 북경에 자금성이 있기 때문에 변변찮은 변변찮은 무림 세가도 없고, 무림인이랍시고 소란을 피우는 일 또한 없다지만 그럼에도 일반인에게 무림인이란 존재는 여전히 공포스런, 귀신에 버금가는 존재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용감하게 만우의 몸을 건드리는 사람은 있었다.
“그래. 잘 됐다. 만향루가 어딨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만우는 씩 웃었다. 품속에 매어둔 전낭이 끈만 남아 달랑거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귀신처럼 파고들어 전대(錢帶)치기를 해간 것이다.
“흐응. 그쪽이구나.”
하지만 만우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이내 산책이라고 가듯 뒷짐을 진 채 사람들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잣거리를 메우고 있었지만 만우는 거의 무인지경이었다. 그가 움직이는 곳에는 항상 틈이 있었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만우의 발걸음을 붙잡아 세우기에 많이 부족했다.
“저긴가?”
만우는 점점 저잣거리에서 빠져 뒷골목으로 향하는 흔적을 보면서 씩 웃었다. 이런 거대한 도시인 북경에는 절대로 평범한 소매치기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어딘가 세력에 속해야 했고, 실력이 뛰어나야 했다. 북경은 항상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우는 뒷골목의 풍경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남경이나 여기나 다 비슷하구만.”
겉모습은 삐까번쩍할지 몰라도 뒷골목의 풍경은 남경이나 북경이나 똑같았다. 술 취해 쓰러진 이들. 힘없이 비척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이들과 떳떳하게 햇빛을 받으며 살 수 없는 범죄자들까지.
“황제가 사는 곳도 별수 없네.”
짧게 평가를 내린 만우는 오물을 피해 발을 내디디며 사람들 사이를 걸어갔다. 만우가 걸을 때마다 만우에게 날아와 꽂히는 시선이 많아졌다. 뒷골목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면 예민하게 반응한다.
“여기.”
만우는 일다경(一茶頃) 정도를 더 걷고 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재빠른 쥐새끼인지 발이 빨랐다.
“흐응. 저런 걸 새겨놓으면 다 알지 않나?”
만우는 뒷골목에 깔린 수많은 다른 건물들과 똑같이 생긴 건물의 문 앞에서 팔짱을 꼈다. 만우는 그 문의 한 구석에 아주 작게 새겨진 문양을 보고 있었다. 은병과 낫이 교차되어 있는 문양. 무림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하오문의 문양이었다.
“하오문이네.”
만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북경에서 전대치기를 할 수 있는 간 큰 놈들이라면 이놈들밖에 없었다. 하오문은 개방에 버금가는 정보력을 가진 정보 단체다. 하지만 그 근간이 거리에 떠돌아다니는 전대치기 하는 놈들이나, 기루의 기생들과 기둥서방 그리고 한량과 파락호들이었기에 개방보다 지저분했다. 무림 방파라고 하기에는 가지고 있는 무력이 조금 뒤떨어졌지만, 워낙 머릿수가 많아 질 대신 양으로 승부를 했기 때문에 척을 보면 피곤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여럿 박살 났지.”
만우는 과거를 반추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끈질기고 독심으로 무장한 하오문이지만 만우 앞에서는 복날 개처럼 거침없이 털렸다.
“그런데 또 건드렸다 이거지?”
만우의 눈이 짓궂은 아이처럼 씩 휘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깽판은 정신건강에 좋았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속이 시원해졌기 때문이다. 꽈앙! 만우는 냅다 하오문의 문을 걷어찼다. 그러자 자욱한 아편 냄새가 훅하고 코로 밀려들어왔다.
“아. 참. 이놈들.”
만우는 고개를 저었다. 하오문은 돈이 되는 일이면 다 건드렸다. 도박장부터 시작해 아편방까지. 은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면서 돈을 받는 것이다.
“자, 자.”
만우가 갑자기 문을 빵 차고 들어오자 아편을 하면서 도박을 하던 사람들이 놀라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하던 도박들 계속하세요.”
만우는 손을 까닥거리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때 거대한 덩치들이 만우 앞을 가로막았다.
“뒈지고 싶나. 어딜 들어와.”
“이 새끼. 따라…….”
만우를 덩치로 찍어죽일 셈이던 덩치 두 명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만우가 유유히 지나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만우가 여유롭게 움직이는 것과는 달리 덩치들이 우뚝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이놈들?”
만우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웃으면서 검집을 들어올렸다. 툭, 툭. 꿍! 꿍! 만우가 검집 끝으로 덩치들을 살짝 밀자 정신을 잃고 게거품을 문 덩치들이 땅바닥에 요란하게 쓰러졌다. 그런 그들의 인중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언제 움직였는지도 모를 속도로 만우가 두 덩치의 인중을 후려친 것이다.
“하던 것들 하시라니까.”
후다다닥!!! 만우가 도박장을 쳐다보면서 인상을 쓰자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런 곳은 하오문도가 나가는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함부로 나갈 수도 없는 구조다. 그렇다고 덩치 둘을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쓰러뜨린 만우가 있는 쪽으로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야, 야.”
만우가 언 것처럼 바짝 굳어 있는 전주(錢主)한테 다가갔다. 놈은 창살로 얼굴만 겨우 보이는 좁은 방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나와 봐.”
“…….”
전주는 도박하는 사람들에게 고리대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다.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시궁창으로 만들어 버린 주범이기도 했다.
“나오라고!”
쾅!! 전주가 움직이지 않자 만우가 쇠창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러자 쇠창살이 구부러졌다. 전주가 히익하고 바람이 새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나, 나가겠습니다. 나갈게요.”
끼익. 기겁한 전주가 만우의 눈치를 보면서 문을 열었다. 만우는 그런 전주에게 주먹을 휙 들어보였다.
“죽을라고. 빨리 열라고 할 때 열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여기, 북경분타주 있지?”
“예?”
전주는 모르는 척했다. 이곳이 하오문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것은 하오문도가 아니라면 알 수 없다.
“문 앞에 표식 다 봤어 이 새끼야. 낫이랑 은병 그거.”
“헉.”
전주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었다. 그러고 보니 만우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이 눈에 들어왔다. 무림인이다.
“어, 어느 고인이신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연락을…….”
무림인 앞에서는 모른 척을 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다. 여차하면 검을 뽑아 칼춤을 추는 것이 이들의 특기다. 그러다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더 낫다. 괜히 성격이 모나서 자신만 피해를 보기 전에.
“아 새끼. 말 많네.”
만우의 말투는 길거리의 삼류 파락호와 비슷했다. 검주라는 거창한 별호를 달았지만 만우는 오 년 동안 낭인 생활을 했다. 세력도, 소속도 없으니 그것밖에는 먹고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돌아가신 전 주인이 어릴 적 가르쳐 준 기천(氣天)이 있었기에 낭인이 되어 먹고 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빨리 부르라니까.”
만우는 귀찮다는 듯 전주의 얼굴을 잡고 휙 던졌다. 그러자 전주가 죽는 소리를 내면서 나무로 된 탁자를 부쉈다. 그러건 말건 만우는 전주가 나온 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여기에 있나…… 어디에 있나.”
만우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 좁은 방 안을 살폈다. 그 안에는 은병과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담보로 맡긴 물건들이다.
“저기다.”
만우는 하오문과 척을 지고 하오문과 이 년 동안을 치고받았다. 그랬기 때문에 하오문에 대해서 웬만한 것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 때문에 만우는 전주의 방 안에 숨겨진 비밀 장치를 찾았다. 끼기긱, 킥! 만우가 그 비밀 장치를 당기자 도박장 한 켠에 벽인 줄 알았던 곳의 문이 열렸다. 쩍하고 열린 문 안쪽을 슬쩍 바라본 만우가 허리를 붙잡은 채 골골대고 있는 전주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들어가.”
“……예.”
전주는 만우를 속이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비밀 통로까지 알고 있으니 하오문이란 것을 숨길 수도 없게 됐다.
“가다가 뒤돌아 보이거나 다른 생각하는 거 들키면 뒈진다. 어?”
“예! 예!”
전주는 만우의 스산한 목소리에 바짝 군기가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전주는 생각했다.
‘총타에 도착하기만 하면 넌 죽은 목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