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검주, 조선으로 가다(1)2019.01.08.
홍무제의 셋째 아들인 연왕 주체가 정변을 일으켜 4년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삼대 황제인 영락제로 등극하였다. 조선은 태종 치세하에 접어들어 본격적인 개혁의 시기에 접어들어 한성부(漢城府: 한양)로 천도하고 저화를 새로 발행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쳤지만 왕자의 난 등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중원과 조선이 새롭게 뒤바뀐 황제와 왕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지만 그런 정치적인 세파에서 아예 자유로운 곳이 중원에는 존재했다. 강호무림(江湖武林). 원나라 치세 시절 강하게 탄압받았던 무림 방파들은 홍무제가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을 건국하는 데 힘을 보태 강호무림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당시 홍무제는 무림인의 힘이 없었다면 원나라를 몰아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며 무림인들을 크게 아꼈는데 평범한 일반인 이상의 힘을 내는 그들의 원리를 궁금해하여 명나라 건국 이후 금의위와 동창에 명령하여 무공에 대해 연구하게끔 독려하였다. 어쨌든 명나라 홍무제를 도와 건국공신이 된 강호 무림의 무림 방파들은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졌고 당대에 와서는 강호무림의 세가 절정을 이뤘다. 관과 무림은 상호불가침 계약을 맺었고 이로 인해 무림인들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무(武)를 겨루고 교류하는 무림인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각 방파들은 공개적으로 제자들을 모집했고, 영민하고 뛰어난 인재들이 구름처럼 무림 방파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최근 오 년간 무림을 뜨겁게 달궜던 것은 그런 무림 방파들의 성세가 아니었다.
“검주(劍主)! 검주! 정말 가시는 겁니까?”
약관까지 이 년이 남은 소령이 키가 훤칠한 장부의 소맷자락을 꼭 쥐고 간절하게 말했다. 두 눈은 호수를 담은 것처럼 반짝였고 가슴은 봉긋했으며 허리는 잘록했다. 아직 미녀라고 보기에는 아이의 태가 나는 미소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미소녀의 눈빛을 뿌리치는 건 남정네라면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내 중원을 원 없이 돌아봤으니 이제 갈 때가 되었구나.”
저잣거리 한복판에 미소녀가 간절히 장부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있으니 단연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쳐다보며 지나갔지만 크게 대놓고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두 남녀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 때문이었다. 남자는 얼굴을 가리는 삿갓을 쓰고 때가 잘 타지 않도록 검은 색으로 염색을 한 피풍의을 입고 있었지만 팔 다리가 길고 키가 훤칠했다. 그런 남자의 허리춤에는 다섯 척(尺: 150cm)의 긴 검이 매달려 있었는데 검집이 꼬질꼬질하고 손잡이에는 때가 잔뜩 타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계시면 안 돼요? 사형들이랑 사부님들이 보고 싶어 하실 텐데.”
여전히 장부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놔주지 않은 소령이란 소녀의 검에는 딱 소녀에게 걸맞은 앙증맞은 검이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길거리에서 대놓고 검을 패용하고 있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무림인. 주변 사람들이 둘의 실랑이에도 곁눈질로만 쳐다보는 이유도 이 둘이 무림인이기 때문이었다. [무림인은 길거리에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도륙을 낸다더라!] [저기 운남에는 벌레를 주식으로 먹고 독으로 얼굴을 씻는 무림인들이 산다더라!] [십만대산에 있는 무림인들은 인신공양을 하고 인간의 살로 만두를 해 먹는다더라!] 유명한 소림사나 무당파 같은 경우에는 무학(武學)만이 아니라 도(道)나 불(佛)에도 능통해 현실과 맞닿아 있었지만 그 외의 무림인들을 평민들은 뿔이 달린 도깨비나 살인마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들은 괴소문들도 실제로 존재하는 일들이긴 했다. 단지 그런 무림인들이 전부인 것처럼 소문이 난 것이 문제라 인식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네 사부께는 말씀 잘 드리거라. 언젠가 인연이 되면 보자고. 그래도 네 사부나 너나 조선까지 올 일이 있겠느냐?”
“정말 가셔야 돼요?”
소령은 울 기세로 검주라 불린 남자에게 말했다.
“응. 가야 된다. 조선에 가서 해야 할 일도 있고.”
해야 할 일이란 말에 소령이 눈을 반짝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검주의 말이 더 빨랐다.
“이곳에는 못 하는 일이야. 그러니까 너도 그만 따라오렴.”
“안 돼요! 어떻게 보내요!”
소령은 끝까지 검주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칭얼거렸다. 검주는 막내 여동생 같은 소령의 태도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 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검주는 소령과 눈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소령의 반짝거리는 눈과 삿갓 아래 검주의 깊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소령이 몸을 베베 꼬기 시작했다. 어언 그녀도 낭랑 18세. 남자에 대한 관심이 많을 나이였다. 그런 소령에게 사연을 담은 검주의 깊은 눈은 치명적이었다. 붉어진 소령의 얼굴을 보며 눈높이를 맞춘 검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매화검의 화후가 5성에 닿으면 사부에게 말해 조선으로 한번 오거라. 그때 보면 되지 않느냐.”
“5성이요? 힝…….”
매화검이라면 무림에서도 일절로 알아주는 화산파의 매화이십사검(梅花二十四劍)을 뜻한다. 통칭 매화검수라 불리는 화산파의 일대 제자들만이 배울 수 있는 검법이기도 했다. 그렇다는 말은 검주라는 남자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있는 이 미소녀가 무려 화산파의 일대 제자라는 뜻이었다.
“그 정도는 해야 네 사부도 널 데리고 다닐 수 있지 않겠느냐?”
“알겠어요!”
소령은 어렸지만 다섯 살부터 검을 잡았다. 일찍 화산파에 입산하여 검을 닦았고 그녀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형제들과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랬기 때문에 소령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생각이 깊고 성숙했다.
“어차피 하산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 되니까요.”
동그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빛낸 소령이 귀여운 듯 삿갓 아래 입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소령이 소맷자락을 놓자 검주는 마지막으로 소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만약 조선에 날 보러 오게 된다면 한양으로 오거라.”
“네! 꼭 갈게요!”
소령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령과 일별한 검주는 피풍의를 휘날리며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금세 사라진 그의 모습을 찾기 위해 소령은 까치발을 들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매정하게도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힝…….”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으로는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소령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을 때, 그녀 주위로 새처럼 하늘에서 사람들이 떨어져 내렸다.
“소 소저. 검주는! 검주께서는!”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붓으로 칠해놓은 것 같은 검은 눈썹과 흑구슬 같은 눈으로 뭇 여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살아가는 괴검(怪劍) 문형일이 소령에게 말했다.
“가셨어요.”
“가셨다고? 아이고…….”
그러자 그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중원 사람은 아닌 듯 새하얀 피부와 벽안에 노란 머리를 한 괴권(怪拳) 마익후가 하품을 쩍 했다.
“내가 뭐라 그랬어. 검주 성격이라면 말 안 하고 그냥 간다니까?”
“시끄러 이 곰탱아! 네놈이 안 일어나는 바람에 늦은 거잖아!”
둘 다 중원인이라고 보기에는 색다른 생김새였다. 문형일은 천축국(인도) 출신이고 마익후는 대진국(로마) 출신이다. 그래서 그 둘은 쌍괴(双怪)라 불렸다.
“우릴 진짜 놓고 가시다니. 잡히기만 해봐.”
“잡히면 뭐.”
마익후가 불퉁하게 묻자 문형일은 더듬거렸다. 감히 검주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중원에 없다.
“그, 그냥 하소연 좀 하겠다는 거지.”
“우리가 좋아서 쫓아다니는 건데 뭐.”
마익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검주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검주는 쌍괴를 거둬들인 적 없다. 그냥 쌍괴가 따라다닌 것뿐이다. 검주는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그 어떠한 소속에도, 세력에도 속하지 않았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도 잡지 않았다. 하지만 쌍괴처럼 그런 그의 인격에 반한 사람들은 수두룩했다.
“대체 어떤 남자가 검주께 반하지 않을까!”
“흐흐. 찾았다.”
“잠깐만. 그냥 쫓아가면 정말 안 받아주실 텐데?”
“……그럼 내게 방법이 있다!”
문형일이 검주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으려던 찰나 마익후가 흔적을 찾아낸 듯 거대한 체구를 움직여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문형일은 재빨리 그런 마익후의 뒤를 따라가며 소령에게 말했다.
“소 소저. 나중에 봅시다. 나중에요.”
“됐어요. 내가 그쪽을 왜 봐요.”
소령은 찬바람이 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힝. 검주, 아니 만우 오라버니가 떠나셨으니 이제는 무슨 재미로 산담.”
“재미는 무슨 재미. 안 그래도 검주 때문에 요즘 수련이 부족하지 않았더냐. 썩 올라가서 무공 수련이나 하거라.”
소령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소령은 객잔 이 층 창문으로 보이는 사부를 보고서는 반색했다.
“어? 사부님! 언제 오셨어요?”
“아까 전부터. 네가 검주 손 붙잡고 앵앵댈 때부터.”
“씨이. 그런데 인사도 안 하세요? 조선에 가면 다시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조선은 아주 멀고 먼 나라다. 게다가 한족이 동이(東夷)라 부르며 경시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검주가 동이족이란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이미 중원에서 최정점에 올라있는 사내다. 그런 검주가 중원에서의 모든 명성을 버리고 조선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런다고 단념할 놈도 아니고. 저놈이 가야 중원이 좀 조용해질 것 같아서.”
“하긴……. 그래도 장문인은 좋아하시던데요. 화산파가 북적거려서 좋으시다고.”
“하하.”
소령의 사부이자 화산파 제자들의 수련을 총괄하는 무공 교두인 매화극검(梅花極劍) 검인은 아침 소면을 후루룩 먹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떠나겠다는 사람의 발을 어떻게 잡겠느냐.”
“하긴. 그건 그래요.”
소령은 검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소면과 만두를 시켰다. 아침부터 뜻하지 않은 외식을 하게 되었지만 검인은 떠나가는 검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잘 가시게. 내 유일한 친우여.’
*** 검주(劍主). 타인에게 불리는 별호(別號)가 있다는 것은 최소한 일류 이상의 고수라는 소리였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이류와 삼류 무사는 계곡 자갈돌만큼이나 많아서 스스로 별호를 만들지만 남들이 모른다. 그리고 이 검주는 지난 오 년간 무림을 가장 뜨겁게 달궜던 별호였다. 모든 검의 주인, 검주. 검을 독문병기로 쓰는 무당파나 천하제일세가 남궁세가, 북방제일세가 모용가와 매화검으로 유명한 화산에서 들으면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별호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것이 가능했다. 오 년 전 혜성처럼 등장한 사내는 연달아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격파하면서 단 오 년 만에 검주라는 별호를 꿰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금의 무림은 최고의 성세를 유지하고 있어서 곳곳에서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배출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정파뿐 아니라 사파와 마교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것을 놓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순위를 만들어 떠들고 다녔다. 바로 열 명의 최고수들을 뽑아 누가 더 강한지 토론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그 호사가 중에는 이 세상 모르는 무공이 없다는 만박자(萬博子)와 이 세상 모르는 정보가 없다는 천이개(千耳丐)가 껴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신빙성 있는 순위가 되었다. 일 패(覇) 이 왕(王) 삼 존(尊) 사 주(主). 무림십좌(武林十座)!
가히 한 명 한 명이 산을 가르고 물을 가르며 신선처럼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 평가 받은 열 명의 극강고수들. 그중 사주(四主)의 일인이 바로 검주였다. 검주는 강호 출두 일 년차에 호북 지방의 일류 검객인 비검(飛劍) 철륜을 꺾어 이름을 알렸고 곧바로 그다음 해에 무당파의 일대제자인 무당일검 진해진인을 꺾어 무림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검주의 이름이 드높아졌지만 그의 사문이나 독문무공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낭인이라 칭하였고, 그런 검주의 유명세를 꺾기 위해 부나방처럼 무림 전역의 고수들이 검주를 찾아와 비무를 신청했다. 그래서 이 년차에는 절정고수로 무림맹의 청룡단의 최고단원이 된 점창파의 일검탈명 오령을 꺾었으며 삼 년차에는 사파의 고수로 유명한 비정검 단모를 꺾었다. 그리고 사 년차에는 화산파의 매화검수 스무 명을 단신으로 꺾는 기염을 토해냈고 마침내 마교에서도 그에게 관심을 가져 검이라면 중원제일을 다투는 검마(劍魔) 이정학과 겨뤄 승리했다. 삼 일 밤낮 동안 만 초가 넘게 공수를 교환한 끝에 검마 이정학은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만우는 그 이후 당당하게 검주란 별호를 차지했다. 그 이후에도 검주는 홀로 장강수로이십팔채 소속인 수룡채와 녹림의 호왕채를 깨부쉈다. 염왕채로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던 흑룡회 역시 회주와 부회주를 비롯한 일류 고수 수십을 잃어 하룻밤 사이에 망했고 명문정파의 제자라는 이름으로 양만들을 괴롭히고 부당하게 이득을 취득하던 강남파도 그의 손에 의해 멸문했다. 이렇듯 검주의 검은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았다. 그에 의해 피해를 입은 많은 이들이 이를 갈았지만 그를 꺾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검주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화산파에 눌러앉아 도전해 오는 이들을 상대로 비무행을 벌이던 검주가 100승 고지를 앞에 두고 99승만을 달성한 뒤 갑자기 사라졌다. 그런 그의 행적에 대해 누구에 의해 죽었다, 살았다 말이 많았지만 그런 그들의 관심사는 금세 새로운 것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렇게 검주에 대한 이야기는 가끔씩 호사가들의 입에서만 나올 뿐, 무림인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