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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30화 (130/130)

16669812801342.jpg130화

갑자기 마주친 시선에 발레린은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제르딘의 하늘빛 눈동자가 맑은 빛을 띠며 반짝였다. 

“전 웬만한 화살에는 죽지 않습니다.”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는 유난히 귓가를 자극했다. 발레린은 홀린 듯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매력적으로 올라갔다. 지나치게 차분한 태도는 그가 여태껏 위험을 가뿐히 넘긴 것 같았다. 여유로움이 보였다.

발레린이 멍하니 바라보자 제르딘이 발레린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배도스 공작이 저를 그렇게 죽이려 했는데 여태껏 살아남은 이유죠.”

제르딘은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왕실 친위대가 주변을 에워쌌다. 친위대 중 누군가 다가와 제르딘에게 속삭였다.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앞장섰다.

그때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무척이나 서러운 울음이었다. 발레린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친위대 때문에 보이지 않자 그들 사이를 비켜서 들어갔다.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우는 소리가 더 커졌다. 발레린은 소리에 집중하면서 여러 사람을 헤치며 나아갔다. 그저 무시하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발레린의 마음 한쪽을 자극했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였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버려서 우는 것 같은.

어릴 때 가장 아끼던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알았다. 특히 자신을 돌봐 주던 유일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슬픔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발레린은 빠르게 걸었다. 사람들이 놀라며 길을 비켰다. 그때 웬 아이가 하나 보였다. 그 아이는 쓰러진 사람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안타까운 듯 아이를 쳐다봤다.

“아까 급하게 나온다고 사람들에게 밟힌 것 같더군.”

“쯧쯧, 안타깝게 됐구먼.”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은 말을 하다가 서둘러 입을 닫고는 비켜섰다. 발레린은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발레린은 예전에 어머니의 관 앞에서 울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발레린이 할 수 있는 것은 아예 없었다. 그저 슬픔에 잠기며 관을 바라보는 것뿐.

“엄마, 일어나……. 제발.”

아이는 눈물을 닦지 않은 채 축 늘어진 손을 붙잡았다. 발레린은 손에 꼭 쥐고 있던 노란 튤립을 보았다. 어머니의 마력이 든 튤립은 여전히 생생했다.

제르딘을 구하기 위해 가져왔긴 하지만 제르딘은 멀쩡했다. 거기다 제르딘은 쉽게 죽지 않는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여태껏 그가 살아남은 것을 보면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배도스 공작이 그를 죽이기 위해 온갖 일을 했지만 제르딘은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 있었다.

발레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발레린을 바라봤다.

발레린은 무릎을 굽혀 앉아 아이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곤 노란 튤립을 내밀었다. 아이는 눈물을 닦지 않고 튤립을 보았다. 눈에는 여전히 슬픔이 가득했다. 아이는 훌쩍거리며 튤립을 잠시 보다가 의아한 듯 발레린을 바라봤다.

“튤립이잖아요.”

“튤립이긴 한데 강한 마력이 담긴 튤립이라서 어머니를 구할 수 있을 거야.”

“구할 수 있다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쉽게 믿지 못하는 듯 발레린을 쳐다보다가 다시 튤립을 보았다. 노란 튤립은 시든 흔적도 없이 싱싱했다. 발레린은 다시 튤립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이는 튤립을 받지 않고 그저 보기만 했다. 보다 못한 발레린은 노란 튤립의 꽃잎을 모두 떼었다. 어머니의 마력은 튤립 꽃잎에 가장 많을 것이다. 발레린의 독기 있는 입김이 닿아도 시들지 않은 꽃잎이었으니까.

발레린은 망설이지 않고 힘없이 누워 있는 사람의 입술에 꽃잎을 살짝 대었다. 그러자 노란 튤립이 스르륵 녹더니 그 사람이 눈썹을 찌푸렸다.

아이는 놀란 눈으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눈물이 여전히 맺혀 있긴 했지만 아이의 눈은 전보다는 밝아졌다. 발레린이 미소를 짓자 아이는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고맙습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하게 노란 튤립을 썼지만 마음속은 개운하고 상쾌했다.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벅차오른 듯 말했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

어딘가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로프가 고개를 이리저리 빼들다가 말했다.

“왕자 목소리 아닙니까?”

“그런 것 같아.”

발레린은 황급히 이름이 들린 곳으로 뛰어갔다. 여러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면서 왕실 친위대 옷이 언뜻 보였다. 그때 제르딘이 발레린을 보고는 다가왔다. 그답지 않게 머리가 살짝 헝클어졌다. 그는 발레린을 보자마자 말했다.

“어디 갔었던 겁니까?”

꽤 다급한 목소리였다. 제르딘의 눈동자는 걱정스러운 듯 발레린을 살폈다. 발레린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져 가벼이 말했다.

“노란 튤립을 주고 왔어요.”

“노란 튤립이요?”

“네, 사실 왕자님을 살리기 위해서 가져왔는데 뜻하지 않게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더라고요. 어차피 저는 뭘 먹어도 멀쩡하고 이제 이루고 싶은 것도 다 이루었고 왕자님도 멀쩡하니 노란 튤립을 그 사람에게 주고 왔어요.”

아까 본 아이의 얼굴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발레린은 그 사람에게 희망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발레린이 늘 마음속에 품어 왔던 희망은 이제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서 싹을 틔울 것이다.

발레린이 빙긋 웃자 제르딘은 차분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발레린을 와락 안았다. 그때 그로프가 불쾌한 듯 발광했다. 형광기가 섞인 붉은빛이었다. 그로프는 곧바로 발레린의 어깨 위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개꿀개꿀.”

발레린은 돌이 된 것처럼 몸이 굳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왕자님?”

제르딘은 발레린을 더 파고들 듯이 안으며 말했다.

“앞으로 어디 갈 땐 말을 하고 가세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발레린은 뛰는 심장을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제르딘이 천천히 상체를 뗐다. 그의 하늘빛 눈동자는 옅게 일렁였다.

“발레린.”

분명 아까 들었던 이름인데도 발레린은 마음속이 울렁거렸다. 발레린이 대답하지 않고 쳐다보자 제르딘이 차분히 말했다.

“계약은 파기된 것 아시죠?”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급하게 나온다고 제대로 못 보긴 했지만 배도스 공작은 분명히 병사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거기다 제르딘이 다치기까지 했으니 죽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배도스 공작은 이제야 완전히 몰락했다.

제르딘은 발레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 주었다. 그는 발레린을 잠시 보더니 말했다.

“그리고 제 부작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요? 저 때문에 부작용이 더 심해진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니요. 오히려 부작용은 없어졌습니다.”

“부작용이 없어졌다고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가 보름달이 뜨던 날이었습니다.”

발레린은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르딘 걱정에 보름달이 뜨던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로프도 멍하게 제르딘을 보았다.

발레린이 놀란 얼굴로 말을 하지 않자 제르딘이 차분히 설명했다.

“안 그래도 그동안 부작용이 나타나는지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제 부작용이 완전히 나오지 않아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말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갑자기요? 이전에는 엄청 고생하셨잖아요.”

“아마 공녀의 독기 때문일 겁니다.”

“제 독기요?”

제르딘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의 독기가 제 몸속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요소를 다 죽인 건지도 모르죠.”

발레린이 차마 말을 못하는 사이 제르딘이 고개를 살짝 숙여 속삭였다.

“그때 동굴에서 공녀가 입을 맞춘 이후부터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발레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때…… 알고 계셨어요?”

“제가 그때 깨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왕자님이 너무 달라 보이셔서…….”

“어쨌든 저는 같은 사람입니다.”

발레린은 순간 제르딘의 눈동자에서 짙은 빛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의 눈동자는 다시 하늘빛이었다.

“당신 남편이기도 하고요.”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르딘이 미소를 지었다. 발레린은 다시 보았다. 사람을 홀릴 듯 환하게 비추는 빛이었다. 제르딘의 주변에 별이 둥둥 떠다니면서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해 주었다.

발레린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미소를 짓고는 발레린을 다시 안았다. 그는 발레린의 귓가에 나직이 말했다.

“이제 제 곁에 계속 있어 주세요. 영원히.”

발레린은 눈물이 나오려던 것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히’라는 말은 정말이지 감미로웠다. 거기다 제 독기 덕분에 제르딘의 부작용이 사라졌다고 하니 발레린은 무척이나 감격스러웠다.

분명 태어났을 땐 초록빛 저주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또 발레린에겐 초록빛 행운이 되었다.

결국 어머니 말이 맞았다. 발레린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더없이 행복한 미소였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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