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발레린은 놀라서 손을 잡아 뺐다. 제르딘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벌게져 그저 아래만 쳐다봤다.
아직도 손등에 여운이 남은 듯 뜨겁기만 했다. 발레린은 제 손등을 쳐다봤다. 그저 입술만 닿았을 뿐인데 심장이 요동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명 가벼운 입맞춤일 뿐인데.’
이렇게 심장이 벌렁거리니 발레린은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거기다 입술에 직접 한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결혼식 때 입을 맞춘 것보다 더 화르르 불타오르는 듯했다.
발레린은 차마 제르딘 쪽은 보지 못하고 뚫을 듯 아래만 쳐다봤다. 제르딘의 시선이 느껴지긴 했으나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거기다 묘한 분위기가 주변을 에두르고 있었다. 순간 발레린은 탑에서 본 『아기의 탄생』 책을 떠올렸다. 여자와 남자 사이에 아기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적혀 있는 책이었는데 그림도 있어서 설명이 무척 자세했다.
발레린은 요란하게 뛰는 심장을 무시하고 재판장을 응시했다.
그때 헬릭스가 완전히 돌아가고 겔렌트 남작이 나섰다. 그는 배도스 공작을 보다가 관객석을 쳐다봤다. 모두의 시선이 겔렌트 남작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다 그는 루티스 백작 쪽을 쳐다봤다. 루티스 백작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는 모든 이야기를 다 한 듯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겔렌트 남작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말했다.
“루티스 백작님이 하신 말씀은 모두 맞습니다.”
그 말에 배도스 공작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리쳤다.
“배도스 공작을 당장 잡아가라!”
“나쁜 놈!”
발레린은 곧바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왕자님, 겔렌트 남작이 저렇게 말할 줄 알고 계셨나요?”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저렇게 할 줄 알았습니다. 마침 제가 심어 놓은 사람도 있고요.”
“심어 놓은 사람이요?”
“배도스 공작 주변에 있던 귀족이었는데 루티스 백작이 잡히자 마음이 많이 뜬 것처럼 보이더군요. 그래서 겔렌트 남작에게 진실을 말하면서 바람을 넣으라고 했습니다.”
제르딘은 겔렌트 남작을 보며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배신은 배신으로 돌아오는 법이죠.”
“그 말은 『천년 왕국사』에 나온 말이죠?”
“맞습니다. 이 상황에 잘 어울리는 말이기도 하고요.”
발레린은 겔렌트 남작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그나마 겔렌트 남작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네요. 그래도 저는 겔렌트 남작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왕자님께 모욕적인 말을 하고서 사과도 안 했잖아요.”
제르딘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배도스 공작을 처리할 때 한꺼번에 처리할 겁니다.”
꽤 여유로운 태도에 발레린은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한편 겔렌트 남작은 루티스 백작이 하던 말과 비슷하게 그동안 했던 일을 모두 말했다.
재판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적었다. 겔렌트 남작이 물러나자 병사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가 말하면서 그동안 제르딘에게 했던 모욕적인 말을 모두 밝혔기 때문이다.
병사와 함께 겔렌트 남작이 지나가자 배도스 공작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는 지나가는 겔렌트 남작에게 말했다.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어차피 여기에서 제가 살 구멍은 이렇게 말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겔렌트 남작은 굳은 얼굴로 병사와 함께 재판장을 나섰다. 배도스 공작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외쳤다.
“이 재판과 무관하게 할 말이 있습니다.”
제르딘은 보좌관에게 손짓했다.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재판관에게 달려갔다. 재판관은 보좌관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배도스 공작에게 증인이 하나 더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배도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르게 말했다.
“제가 지금 말하려는 것도 이 증인과 관련이 있습니다.”
배도스 공작은 곧장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만 울릴 뿐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발레린은 곧바로 제르딘을 돌아봤다.
“왕자님, 혹시 누가 오는지 아시나요?”
“제 아버지가 온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지금까지 안 나오는 걸 보면 안 온 것 같네요.”
“왕자님의 아버지요?”
발레린이 놀라며 묻자 제르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늑대 수인이라는 것을 밝히려고 배도스 공작이 데려오려 했는데, 막상 오면 오히려 공격당할 테니 안 온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쉽사리 말이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실제로 오면 왕자님께서 위험하잖아요.”
“어차피 그 사람이 와도 전 괜찮습니다. 제 목숨만 소중했던 사람이니 아무 말 하지 않고 돌아갔을 거고요.”
“…….”
“그래서 여태껏 나타나지도 않고 도망 다니면서 살았을 겁니다.”
그때 재판관이 한 소리 했다.
“증인이 없으면 재판은 여기서 마무리 짓고 잠시 후에 재판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재판관 몇 명이 머리를 맞대며 의논했다. 발레린은 저들이 이상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쳐다봤다.
간혹 『천년 왕국사』에서 매수당한 재판관들이 이상한 판단을 내려서 재판 결과가 엉망이 된 적이 있었다. 100년 전 전쟁 영웅의 재판이었는데 그땐 재판관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려서 그 사람은 억울하게 죽고 말았다.
물론 그때는 왕이 주도하기도 했었다. 최종적으로 재판 결과를 승인하는 것은 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발레린은 재판관들이 납득하지 못할 결과를 내놓을까 싶어서 뚫어지게 보았다. 그때였다.
“발레린.”
귀를 기분 좋게 울리는 목소리에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 제르딘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까지 안 봐도 재판관들이 결정을 잘 내릴 겁니다.”
발레린은 새삼 자신을 내려다봤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상체를 길게 뺀 채 아래를 보고 있었다.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마침내 재판관들이 고개를 들었다. 발레린은 손에 땀을 쥐며 재판관을 쳐다봤다. 그들은 제르딘의 보좌관에게 서류를 전달했다. 보좌관은 급히 제르딘에게 뛰어와서 서류를 내밀었다.
제르딘은 서류를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좌관은 서류를 들고 다시 재판관에게 가져다주었다.
재판관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배도스 공작은 왕자님과 왕자비님을 죽이려 한 죄와 왕궁에서 여러 사람을 매수해서 함부로 돈을 주며 제 이익을 위해서 활용하고 인장을 함부로 복사해서 왕자님의 권력을 함부로 이용하면서…….”
재판관의 말은 길게 이어졌다. 발레린은 배도스 공작을 내려다봤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넋을 놓은 채 앞을 보고 있었다. 그때 배도스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어딘가 영혼이 나간 듯 살기를 띠었다. 발레린이 의아하게 보는 사이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때 그로프가 외쳤다.
“주인님!”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 급하게 왕실 친위대가 몰려들었다. 발레린은 제 품에 있는 노란 튤립을 꼭 쥐고서 옆을 바라봤다. 순간 발레린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르딘이 팔을 잡고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찌푸린 얼굴로 피를 확인했다.
“왕자님.”
발레린이 멍하게 말하자 제르딘이 차분히 시선을 돌렸다.
“별일 아닙니다. 주변이 어수선한 것 같으니 자리를 피해야겠습니다.”
발레린은 서둘러 일어났다. 관객석도 다들 놀랐는지 빠져나가기 바빴다. 발레린은 겨우 눈물을 참고서 제르딘을 따라갔다.
배도스 공작이 제르딘을 위협할 줄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그때 제르딘이 발레린을 돌아봤다.
“그런데 공녀는 괜찮습니까?”
발레린은 속에서 올라오는 울분을 겨우 참고서 대답했다.
“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제르딘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때 왕실 친위대 한 명이 급히 달려왔다.
“왕자님, 아까 화살을 쏜 사람을 붙잡았습니다.”
“당장 지하 감옥으로 데리고 가.”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사라졌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돌아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우선 왕궁으로 돌아가죠.”
제르딘이 발레린의 손을 살짝 잡았다. 하지만 발레린은 뒤로 물러나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이 의아하게 보자 발레린은 겨우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왕자님, 병원부터 가 봐야 하지 않나요? 왕자님 팔에서 피가 나잖아요.”
발레린이 거의 울 것처럼 제르딘의 팔을 보자 제르딘이 웃었다. 난데없는 웃음에 발레린은 당황스러웠다. 거기다 제르딘은 정말로 기쁜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왕자님?”
발레린이 조심스레 말하자 제르딘이 눈을 맞추었다. 아직 그의 얼굴에는 묘한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그냥 잠깐 스친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화살을 맞아 줘야 배도스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마지막까지 사람들이 잘 알겠죠.”
“하지만 자칫하면 왕자님이 잘못될 수도 있잖아요.”
“제가 그때 말하지 않았습니까?”
“뭘요?”
“제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요.”
발레린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왕실 친위대가 감싸 주고 있긴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발레린은 제르딘에게 다가가며 작게 속삭였다.
“그렇긴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그때 제르딘이 무릎을 살짝 굽히며 발레린과 시선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