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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28화 (128/130)

16669812729734.jpg128화

제르딘은 쳐다보자 재판관이 제르딘의 눈치를 보더니 외쳤다.

“그만 앉아 주십시오.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기사들이 다가가자 서로 핏대를 세우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 발레린의 관심 있게 보자 제르딘이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자리 때문에 생기는 소란일 겁니다. 간혹 이런 곳에선 자리 때문에 싸움이 있거든요.”

처음 보는 광경이었지만 발레린은 꽤 생소했다. 그때 깨끗한 옷을 갖춰 입은 배도스 공작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재판관이 나무 봉으로 내려치자 모두들 조용해졌다.

발레린은 혹시 몰라서 주변을 둘러봤다. 왕실 친위대는 제르딘의 주변에 서 있었다. 딱히 의심할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제르딘을 보자 그는 무감한 눈빛으로 아래를 보고 있었다. 재판에 그다지 흥미가 없고 절차상 참석한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새삼 발레린은 제르딘이 그동안 배도스 공작의 재판을 위해서 고생한 것을 생각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재판관은 배도스 공작에게 말했다.

“배도스 공작은 그동안 왕자님의 주변을 독살로 위협하고 심지어 왕자님을 살해하려는…….”

재판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모두 배도스 공작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제르딘은 그저 가만히 지켜봤다. 배도스 공작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앞만 보고 있었다.

소란스러워진 광장에 재판관은 다시 나무 봉을 들었다. 그러자 나서서 욕을 하던 사람들은 입을 닫고 화난 얼굴로 지켜봤다.

재판관은 다시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혐의와 함께 왕자비님을 독살하려는 건과 관련하여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관이 말이 끝나자마자 배도스 공작이 말했다.

“저는 왕자님을 독살하려는 생각은커녕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까? 제가 알기론 증언을 할 사람도 모두 없다고 들었습니다.”

발레린은 발끈 화가 났지만 제르딘은 침착하게 보고 있을 뿐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할 수 없이 발레린은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한 채 재판관을 보았다.

재판관은 서류를 들어 올렸다.

“왕자님께서 제출하신 증거가 있습니다. 특히 현재까지 발견된 독살 정황에서 모두 비슷한 양상이 발견되는 것은 물론이고 루티스 백작의 증언까지 있으니 증거는 충분합니다.”

배도스 공작이 굳은 얼굴로 재판관을 보았다.

“루티스 백작은 저를 죽이려던 자이니 증언을 들어 봤자 기울어진 증거에 불과할 겁니다.”

“아니요. 왕자님이 제출하신 정황과 더불어 루티스 백작의 말이 거의 일치합니다.”

재판관은 곧바로 병사에게 손짓했다. 병사는 누군가를 끌고 나왔다. 옷이 완전히 해진 루티스 백작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제르딘과 발레린에게 인사를 하고는 재판관에게 말했다.

“증언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재판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배도스 공작이 날카롭게 노려봤지만 루티스 백작은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제가 배도스 공작님과 함께한 세월이 거의 10년이 넘습니다. 그간 배도스 공작님은 저와 귀속 관계를 맺으면서 저에게 많은 재산을 주셨습니다. 배도스 공작님의 일을 대신 처리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에서 말소리가 퍼졌다. 그러다 재판관이 지적하자 소란이 차츰 가라앉았다. 루티스 백작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그동안 배도스 공작님께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왕자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독살하라는 목록도 받았고, 배도스 공작님이 시키신 일은 모두 했습니다.”

배도스 공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노려보자 루티스 백작은 재판관을 보며 말했다.

“이 모든 자료는 이미 왕자님께 제출했고 그 서류 중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배도스 공작님은 제가 이런 자료까지 넘길 줄은 몰랐겠죠. 이 자료를 넘긴다면 저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까요.”

재판관은 서류를 넘겨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증언과 일치합니다.”

루티스 백작이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배도스 공작이 외쳤다.

“저도 증인을 신청하겠습니다.”

재판관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전에 신청한 증인 외에 다른 증인이 있는 겁니까?”

“아니요. 이미 신청한 증인입니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누구입니까?”

“겔렌트 남작입니다.”

재판관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겔렌트 남작은 지금 나와 주십시오.”

사람들이 술렁이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그때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배도스 공작에게 다가왔다.

겔렌트 남작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억지로 끌려나온 듯 얼굴에는 근심이 한가득했다.

재판관이 말했다.

“겔렌트 남작, 배도스 공작의 증인이 되어 주겠습니까?”

겔렌트 남작은 배도스 공작을 한번 쳐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배도스 공작 옆에 서십시오. 루티스 백작의 증언을 다 들은 뒤 듣겠습니다.”

그때 배도스 공작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지금 증인 신청을 하면 바로 증언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직 증언과 증거가 일치하지 않는 서류가 있습니다. 그러니 루티스 백작이 모두 증언해야 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어느 귀족 하나가 외쳤다.

“그동안 공작님께서도 이런 재판에 자주 참석했을 텐데 규칙 하나 모르는 게 말이 됩니까?”

“맞습니다! 자기편인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지 않고 그냥 넘기니 재판 과정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비꼬는 말까지 들리자 배도스 공작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관객석을 바라봤다. 여기저기서 야유가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루티스 백작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저는 배도스 공작님의 명령을 받으면서 왕궁에서 일하는 여러 사람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그 목록도 모두 제출했고요.”

재판관은 서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분도 일치합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일하던 요리사가 그동안 감옥 안에서의 독살을 주도했다는 사실도 일치하고요.”

사람들은 모두 배도스 공작을 욕하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이제야 사람들이 배도스 공작의 악행을 알게 된 것 같아서 통쾌한 심정이었다.

그동안 제르딘에게 악행만 저지르다가 욕을 먹는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때 배도스 공작이 외쳤다.

“이건 저를 향한 명백한 음해입니다. 그 자료 모두 루티스 백작이 저를 나쁘게 몰기 위해서 조작한…….”

“저도 옆에서 봤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내리자 헬릭스가 서 있었다. 발레린은 입을 막고서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무감하게 말했다.

“배도스 공작은 한 번도 뒤통수를 맞아 본 적이 없으니 이번에야말로 자식 된 도리를 해야겠다고 말하더군요.”

“헬릭스 님이요?”

제르딘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활짝 웃는 얼굴로 헬릭스를 쳐다봤다. 엇나가는 아버지를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하다니.

새삼 발레린은 헬릭스가 누구보다 배도스 공작을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것이 참된 자식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헬릭스가 말했다.

“저는 뒤늦게 아버지의 집무실에서 회의에 참석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아버지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지시를 내리는지 봤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왕자비님을 많이 거슬려하셨고 그에 따라 많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재판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뒤적거렸다. 헬릭스는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왕자님을 죽이겠다고 말씀하기도 했고요.”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헬릭스는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숙이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쨌든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긴 하나 아버지가 자꾸만 헛된 욕심을 부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아버지가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네요.”

배도스 공작은 금방이라도 화가 터질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헬릭스는 힘없이 몸을 돌리곤 고개를 들어 위를 살폈다. 마침 헬릭스는 발레린을 발견했다.

발레린이 웃으며 보자 헬릭스도 마주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제르딘이 발레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발레린이 놀라며 보자 제르딘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헬릭스는 배도스 공작의 아들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제르딘은 말을 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스스로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발레린은 갑자기 말을 하지 않는 제르딘이 의아해서 물었다.

“혹시 헬릭스 님이 다른 일을 저지른 건가요?”

“아니요.”

“그럼 왜…….”

제르딘은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의 태도는 꽤 단호했다. 어딘가 묘하게 심기가 거슬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제르딘은 발레린의 손은 놓지 않았다.

발레린은 맞잡은 손이 너무나 좋아서 손을 꼭 잡았다. 그때 제르딘이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의 표정은 아까보다 살짝 풀린 얼굴이었다. 발레린이 미소를 짓자 제르딘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발레린과 맞잡은 손을 천천히 들어 발레린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마자 발레린은 화들짝 놀라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오히려 의아한 듯 발레린을 보았다.

“왕자님.”

“왜요?”

“손등에…….”

발레린이 더 말하기도 전에 제르딘은 다시 발레린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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