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아니요. 그냥 이야기를 나눴어요. 왕자님께도 사과하라고 했는데 배도스 공작은 그럴 생각 없는 것 같더라고요.”
“저에게 사과를 하라고 말했다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어이없는 듯 웃었다. 이제야 그는 조금 풀린 얼굴이었다. 발레린이 환한 얼굴로 보고 있자 제르딘이 차분히 말했다.
“제가 괜히 걱정하면서 온 것 같습니다.”
“절 걱정했다고요?”
제르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스 공작은 말을 친절하게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제르딘이 여전히 굳은 얼굴로 있자 발레린은 활기차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는 전혀 상처받지 않았고, 오히려 배도스 공작이 어떤 일을 꾸미는지 알아 왔어요.”
“일을 꾸민다고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이 차분히 쳐다보자 발레린은 신나게 입을 열었다.
“배도스 공작은 지금 늑대 수인으로 협박한 뒤 왕자님을 없애고 왕이 되고 싶어 해요.”
제르딘은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무감정한 그의 얼굴에 발레린은 의아해서 물었다.
“혹시 알고 계셨나요?”
“대충 짐작은 했습니다. 배도스 공작이 그냥 당할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럼 만약 왕자님이 위험하게 되면…….”
“공녀가 제 걱정을 해 주는 겁니까?”
제르딘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 있었다. 발레린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잖아요. 배도스 공작은 왕자님 주변에 있던 사람을 독살까지 한 사람이니까요.”
“어차피 제 주변에 왕실 친위대가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들어도 발레린은 그다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배도스 공작은 어떻게든 제르딘을 죽이려고 작정한 듯 보였으니까. 선대 왕이 죽었던 정원수 앞에 온 것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발레린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자 제르딘이 말했다.
“공녀.”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응시했다. 그의 하늘빛 눈동자는 어느 곳에 내놓아도 밝고 아름다웠다. 발레린이 멍하니 바라보자 제르딘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아침 일은 괜찮습니까?”
“뭐가요?”
발레린이 미소를 짓자 제르딘은 괜한 걱정을 한 건가 싶어서 발레린을 빤히 바라봤다.
“제가 공녀에게 너무 심한 말을 한 건 아닌가 싶어서요.”
“전혀요! 예전에 아버지가 한 말보다는 나아요. 그럼 그 걱정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나요?”
생각보다 밝은 발레린의 얼굴에 제르딘은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가 차분히 말했다.
“네.”
발레린은 마음속이 벅차올라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르딘이 제 걱정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아침 일을 말하는 것 역시 그다웠다.
“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탑 안에 갇혀 있으면서 왕자님이 하신 말씀보다 더 심한 말도 들었는걸요.”
제르딘은 기분이 더 안 좋았다. 오히려 밝게 말하는 발레린에게 마음이 쓰였다.
“제가 그렇게 말했는데 정말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까?”
“사실 아침에는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는데 지금은 다 잊었어요. 그리고 더 급한 일이 있잖아요.”
“급한 일이요?”
“배도스 공작의 재판이요. 어쨌든 그 재판이 무사히 끝나야 하잖아요. 물론 왕자님께서 완벽하게 끝내시겠지만.”
그 말을 끝내고도 발레린은 배도스 공작과의 이야기를 더 떠들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이 활기차게 말하는 것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차분히 말했다.
“걱정 마세요. 잘될 겁니다.”
발레린은 굳게 믿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얼굴에는 변함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배도스 공작의 재판이 열리는 당일이었다. 발레린은 침실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봤다. 벽에 있는 보랏빛 드레스와 함께 발레린이 탑을 떠나면서 가져온 물건은 모두 그대로였다.
그중에서 발레린은 노란 튤립을 조심스레 챙겼다. 발레린의 어깨 위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정말 노란 튤립을 쓸 겁니까?”
“혹시 모르잖아. 왕실 친위대가 있다고 해도 배도스 공작이 그걸 모르진 않을 테고.”
“그래도 주인님이 어렸을 때부터 아끼던 식물 아닙니까?”
발레린은 노란 튤립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어머니가 물려준 유일한 유산이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의지가 되어 온 식물이기도 했다. 유일하게 독기에 죽지 않으니 발레린은 노란 튤립을 보며 그나마 희망을 가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노란 튤립을 보며 희망을 갖지 않아도 되었다. 원하는 대로 독기를 사용할 수 있었고 그토록 원하던 제르딘의 마음도 받았으니 괜찮았다.
이젠 발레린의 삶 자체가 희망이었다. 굳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발레린은 노란 튤립을 꼭 안으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이젠 네가 없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발레린은 그렇게 노란 튤립을 다시 내려다봤다. 노란 튤립은 말없이 있었지만 어쩐지 발레린의 마음속은 조금은 시원한 기분이었다. 마치 어렸을 때의 아픔을 완전히 치유한 것처럼 머릿속이 상쾌하기도 했다.
발레린은 밝게 미소를 지으며 침실을 나섰다. 마침 제르딘이 방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왕자님!”
제르딘은 발레린을 보자마자 빠르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도 발레린과 비슷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발레린에게 차분히 말했다.
“재판이 끝나면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제르딘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으나 더 묻지 않고 그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 배도스 공작이 몰락하는 것은 뻔한 결과였다.
발레린은 힐끗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때 스르륵 손이 잡혔다. 부드러운 온기에 발레린이 놀라며 고개를 내리자 제르딘이 나직이 말했다.
“긴장되어서요.”
“긴장이요?”
제르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여전히 의아했다. 여태껏 봐 온 제르딘은 긴장은커녕 두려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늘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여유로웠고 실제로 아는 게 많기도 했다.
하지만 발레린은 더 말하지 않고 피어나오는 웃음을 겨우 삼켰다. 생각지도 못한 제르딘의 온기는 꽤 따뜻했다. 그래서 더 놓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발레린은 제르딘과 손을 잡으며 왕궁을 나섰다. 마차는 미리 대기하고 있었는지 여러 사람과 함께 앞에 서 있었다.
제르딘이 왕궁을 나오자 왕실 친위대 중 배지를 화려하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제르딘에게 몇 마디를 한 뒤 물러났고 보좌관도 몇몇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 사이에도 제르딘은 발레린의 손을 놓지 않았다. 발레린은 싱글싱글 웃으며 제르딘과 맞잡은 손을 바라봤다. 그때 보좌관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발레린은 할 수 없이 제르딘과 손을 놓고 먼저 마차에 탔다. 마차는 얼마 달리지 않고 멈춰 섰다. 왕궁에서 광장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광장에는 벌써부터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새삼 많은 사람들에 발레린은 감탄하며 마차 창밖을 구경했다.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공녀?”
발레린이 돌아보자 제르딘이 손을 내밀었다. 발레린은 조심스레 제르딘의 손을 잡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이 모두 환성을 내지르며 몰렸다. 발레린은 지나친 사람들의 관심에 활짝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탑 안에 갇혀 있을 땐 이렇게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었다.
무시와 멸시를 받았을 뿐 이렇게 환한 얼굴로 마주 보지도 못했다. 새삼 발레린은 바뀐 상황에 벅차올라 미소를 지었다. 이젠 다들 피하는 기색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어 왕실 친위대가 나섰다. 그들의 보호에 발레린은 왕족이 앉는 곳까지 뒤섞이지 않고 갈 수 있었다. 그래도 발레린은 사람들의 관심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로프도 사람들이 무척이나 열광하자 의아한 듯 말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발레린이 작게 속삭였지만 옆에 앉은 제르딘이 말했다.
“공녀가 그만큼 훌륭하게 일을 잘한 겁니다.”
“제가요?”
“못 들으셨습니까? 왕궁 밖에선 공녀가 독을 모두 찾아 독살을 줄어들게 한 데다 제대로 된 왕권 확립에 기여한 사람이라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처음 듣는 사실에 발레린은 잠시 넋을 놓고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발레린에게 상체를 숙였다.
순간 닿는 숨결에 발레린은 숨을 들이켰다. 제르딘은 발레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모두 공녀 덕분입니다. 제가 이렇게 배도스 공작의 재판을 열게 된 것도 공녀 덕분이고요.”
발레린은 머릿속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짝 닿은 제르딘의 숨결은 무척이나 생경하고 뜨거웠다. 발레린이 멍하게 있자 제르딘은 발레린과 눈을 마주치며 웃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때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발레린은 꿈을 꾸는 듯 있다가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제르딘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재판관을 보고 있었다. 발레린은 아까 제르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재빨리 말했다.
“왕자님께서 훌륭하시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예요. 만약 왕자님이 저를 무시하시고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면 여기에 앉아 계시지 않았을걸요.”
그로프도 개꿀개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공녀 덕분입니다.”
“아니에요. 왕자님이 잘하셔서…….”
그때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소란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