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아까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배도스 공작은 왕자님에 관해선 악의를 서슴없이 드러냈잖아. 그리고 왕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럼 정말 배도스 공작이 왕자를 죽이고 왕이 되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까?”
“아까 늑대 수인이라는 말도 흘린 걸 보면 그걸 가지고 재판에서 어떻게 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해 봤자 배도스 공작의 처지도 온전치 못한 것 아닙니까? 배도스 공작이 그렇게 말하는 마땅한 증거가 없으니까요.”
“어차피 내일이 되면 배도스 공작이 망하게 되는 건 분명하니까 위험해도 온갖 것을 다 던질 것 같아.”
발레린이 봐 온 『천년 왕국사』에서는 대개 낭떠러지에 몰린 사람이 온갖 것을 다 들고 와서 주변을 더럽혔다. 지금도 발레린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마력탄까지 발견되었으니까.
거기다 배도스 공작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그는 반성도 하지 않은 채 저만 맞는다고 우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발레린은 활기차게 왕궁으로 향했다.
어쨌든 발레린은 배도스 공작에게 얻을 것은 다 얻었다. 재판 날에 제르딘에게 해를 가할 것과 늑대 수인을 들먹이면서 자신이 왕이 되리라는 것.
발레린은 단단히 준비하기 위해 침실로 향했다.
제르딘은 일을 하다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발레린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이 강하게 마음에 남았다.
‘……공녀가 이 왕궁에 없으면 어떻게 해서든 제 곁에 있게 하고 싶습니다.’
너무 심하게 발레린에게 다그친 것 같기도 했다. 그동안 발레린의 의견을 존중했는데 이번만은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있던 말이 튀어나왔다.
제르딘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발레린이 없는 왕궁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여태껏 왕궁에 살면서 이렇게까지 한 사람을 생각하며 감정에 휘둘린 적도 없었다.
이해할 수 없던 제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 것도 그에겐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제르딘은 다시 집중했다. 어쨌든 내일은 배도스 공작의 재판 날이었고 아직 검토하지 못한 서류도 있었다.
하지만 서류에서 발레린이 실망한 얼굴이 떠돌았다. 제르딘은 다른 서류를 들었다. 그러나 발레린의 난처한 얼굴이 서류 속에 나타났다. 그것도 당황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었다.
제르딘은 서류를 움켜쥐었다. 그의 손힘에 의해 서류가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다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제르딘은 숨을 내쉬듯 말했다.
“들어와.”
질린 듯 낮은 목소리였다. 문이 벌컥 열리고 보좌관이 들어왔다. 그는 제르딘에게 다가오며 빠르게 말했다.
“배도스 공작이 왕궁 뒤쪽에 왔다 갔다고 합니다.”
“그 정원수 앞에 왔겠지.”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뻔하지. 내일 재판 날이니 마음이 복잡할 거고 나를 어머니처럼 죽이고 싶을 테니.”
“하지만 배도스 공작이 선대왕을 그렇게 했다는 증거는 없지 않습니까?”
“증거는 없지. 어차피 어머니도 배도스 공작이 아닌 그놈 때문에 마음의 병이 드셨으니까.”
보좌관이 굳은 얼굴로 있자 제르딘이 서류 하나를 던졌다.
“그런데 지금 보니 어머니께 그런 남자를 소개해 준 사람이 배도스 공작이 아닌가 싶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배도스 공작이 선대왕께 늑대 수인을 소개해 준 거란 말입니까?”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싫은 그놈은 배도스 공작의 돈을 받고 작정하고 어머니를 유혹했다고 하더군.”
보좌관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럼 배도스 공작이 왕자님의 아버지를 밝히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까?”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늑대 수인은 여태껏 배도스 공작에게 돈을 받고 있었어. 그리고 최근에 수도로 왔다는 소문이 있고.”
“그럼…….”
“내일 나타날 수 있겠지.”
제르딘은 차분히 말했지만 보좌관은 말문이 막힌 듯 멍한 얼굴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거슬린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배도스 공작이 왕궁 뒤쪽에 온 것 때문에 급하게 온 건가?”
낮은 목소리에 보좌관은 대번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늑대 수인이 재판 날에 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에 대해 말하겠지.”
“그럼 큰일 아닙니까? 늑대 수인이 입이라도 연다면 왕자님께서는…….”
“어차피 말 못 할 거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배도스 공작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제 이익만 생각하고 남을 생각 안 하는 거.”
제르딘은 미소를 짓더니 여유롭게 말했다.
“왕국법상 늑대 수인이라고 밝혀진다면 그동안 받지 못했던 조사를 받을 것이고, 선대왕을 그렇게 만들었으니 죽음은 당연한 거고.”
“그럼 내일 늑대 수인이 안 온다는 말씀입니까?”
“겁쟁이가 아닌 이상 배도스 공작이 돈을 줬으니 올 거야. 다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목숨은 날아갈 거고.”
“그럼 그 늑대 수인은 이곳에 오긴 하지만 말은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제 목숨이 소중하면 별말은 안 하겠지.”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배도스 공작은 돈은 주지만 뒷일까지는 말해 주지 않은 것 같더군.”
“그럼 그 늑대 수인도 배도스 공작에게 속았다는 말입니까?”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스 공작도 그 늑대 수인을 죽일 생각이었겠지. 안 그래도 계속 돈을 가져가고 있었으니 눈엣가시였을 테고.”
보좌관이 말없이 멍한 얼굴로 보고 있자 제르딘이 눈썹을 찌푸렸다.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건가?”
날카로운 목소리에 보좌관은 고개를 숙였다.
“아까 제가 미처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습니다.”
제르딘이 예민한 얼굴로 쳐다보자 보좌관은 급히 말을 꺼냈다.
“배도스 공작이 있던 곳에 왕자비님도 함께 있었습니다.”
“함께?”
“네. 그런데…….”
제르딘이 일어나자 보좌관은 말을 멈추고 제르딘을 쳐다봤다.
“어디 가십니까?”
“배도스 공작이 발레린을 만났다며.”
“하지만 별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혹시 몰라. 배도스 공작이 심한 말을 해서 발레린이 상처를 받았을지.”
안 그래도 제르딘은 발레린에게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보좌관은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며 말했다.
“배도스 공작의 성격이 그렇긴 하지만…….”
제르딘은 보좌관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집무실을 나갔다. 보좌관이 뒤늦게 불렀지만 이미 제르딘은 집무실을 나간 뒤였다.
발레린은 침실에 오자마자 탁자 앞에서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그로프는 탁자에 앉은 채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아까 일을 되새기며 정리했다. 제르딘을 늑대 수인으로 협박한 뒤 죽이고 왕이 되려는 배도스 공작.
발레린은 인상을 찌푸린 채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 아무리 생각해도 배도스 공작은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사람이야. 이미 왕위 계승에도 밀려났고 지금 왕이 되기에도 늙어서 영 맞지 않는 사람인데.”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이 될 재목이 아니야. 그렇게 남을 제 이익대로 죽이고 제 세력을 넓힐 생각만 하는데 왕국을 제대로 돌볼 수나 있겠어?”
“주인님의 말이 맞습니다. 배도스 공작 같은 사람이 왕이 된다면 나라가 1년 안에 망할 겁니다.”
발레린은 한숨을 푹 쉬며 탁자에 팔을 괸 채 창문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재판 날이 되면 배도스 공작이 왕자님을 어떻게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왕자는 일반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해도 나같이 독에 강한 사람은 아니잖아. 나는 위험한 상황일 때 독을 먹으면 되지만 왕자님은 독을 먹지 못하니까.”
“생명수는 있지 않습니까?”
“그건 아무리 왕궁이라도 구하기 어려울 거야. 내가 본 책에서도 생명수는 거의 사라졌다고 했어. 무분별하게 다 퍼 가서.”
발레린은 순간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깊은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이 막강했다. 거기다 완전히 죽지 않은 사람에겐 생명을 부여할 만큼 마력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비록 그 능력을 스스로에겐 쓰지 못하는 게 단점이었지만.
문득 드는 그리움에 발레린은 협탁에 있는 노란 튤립을 바라봤다. 그 순간 발레린은 아버지가 한 말과 함께 어머니의 마력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의 마력이 노란 튤립에 있다고 했잖아.”
“저도 그때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인님의 마력에도 노란 튤립이 시들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은 기분 좋게 외쳤다.
“들어와.”
곧바로 문이 열리고 뜻밖의 사람이 들어왔다.
“왕자님?”
제르딘은 꽤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발레린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습니까?”
“뭐가요?”
“배도스 공작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분명히 제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요즘 왕궁 주변이 흉흉해서 항상 기사들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왕궁 뒤쪽도 소홀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고요.”
새삼 듣는 말에 발레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왕궁에 보안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발레린이 말없이 가만히 있자 제르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발레린 앞에 앉았다.
“배도스 공작이 심한 말을 한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