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배도스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발레린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은근한 살기가 묻어 있었다. 발레린은 그다지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안 갈 뿐이었다.
발레린이 눈을 피하지 않고 빤히 보자 배도스 공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곳이 선대왕이 죽었던 곳이란 건 아십니까?”
“선대왕이 이곳에서 돌아가셨다고요?”
배도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살기를 띤 미소가 피어올랐다. 발레린은 그 미소를 보며 어딘가 기시감을 느꼈다.
‘해인저 모녀가 어머니 관을 보고 그렇게 웃었는데.’
발레린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한마디 했다.
“배도스 공작님은 선대왕께서 돌아가신 게 기쁘신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까 웃으면서 말씀하셨잖아요.”
“웃다니. 누가 웃었다는 말입니까?”
“분명 봤어요.”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하자 배도스 공작은 코웃음을 쳤다.
“잘못 봤을 겁니다. 선대왕께서 돌아가신 게 제겐 얼마나 큰 슬픔이었는지.”
“지금도 배도스 공작님께서는 웃고 계세요.”
발레린이 진지하게 말하자 배도스 공작은 대번에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어느 누구보다 슬퍼하고 있는데 웃다니요? 왕자비님께선 뭘 보고 계신 겁니까?”
“공작님의 얼굴이요.”
발레린이 빙긋 웃었다. 배도스 공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왕자비님께서 이렇게 유치한 말장난을 좋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참으로 격이 떨어지는군요.”
“하지만 지금 유일하게 배도스 공작님이 제 말을 받아 주고 있는걸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그나저나 선대왕께선 왜 이곳에서 돌아가신 거예요?”
배도스 공작은 입술을 비틀더니 고개를 돌렸다.
“모두 왕자의 탓입니다.”
“왕자님이요?”
“왕자가 아니었다면 선대왕께서는 더 살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왕자가 선대왕을 이곳으로 모셔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대왕께서는 이곳에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제가 서 있는 이 지점이 정확히 왕께서 돌아가신 곳이지요.”
발레린은 배도스 공작이 서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는 딱히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정원수를 바라봤다.
“안 그래도 건강이 나쁜 왕을 억지로 이곳까지 모셨고 쉬셔야 하는데 산책까지 강제로 시켰으니 그 약한 몸이 남아나겠습니까?”
발레린이 대답하지 않고 바라보자 배도스 공작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국은 왕자의 무리한 결정이 여기까지 온 겁니다.”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최선을 다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선대왕께서 이곳으로 오고 싶다고 원했을 수도 있고요.”
그제야 배도스 공작이 고개를 돌려 발레린을 보았다.
“원했다고요?”
“네, 왕자님께선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분은 아니니까요.”
여태껏 제르딘이 한 행동에는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배도스 공작은 어이없는 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왕자비님께선 뭘 모르시나 봅니다.”
“뭘요?”
“왕자가 어느 누구보다 강압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걸 모르십니까?”
“제가 볼 땐 왕자님께서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렇게 행동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고 보면 배도스 공작님도 왕자님을 많이 곤란하시게 했죠.”
“제가요?”
“툭하면 왕자님의 말에 반대하거나 왕자님 주변 사람들을 독살로 위협하지 않았나요?”
“제가 생각하기에 납득되지 않아 반대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왕자의 주변을 독살했다는 것은 증거도 없는 헛소문이고요.”
“하지만 내일 재판이 열리지 않나요?”
배도스 공작이 쳐다보자 발레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내일 다 알려질 텐데 왜 모르는 척 발뺌하시나요?”
“발뺌이라니요?”
“그리고 전 다 들었어요. 루티스 백작과 겔렌트 남작이 이곳에서 왕자님의 뒷공론을 하면서 저를 안 좋은 쪽으로 몰고 가려는 거요.”
“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겔렌트 남작에게 부탁해서 왕자님께 사과하라고 하세요.”
“그걸 왜 저한테 부탁하는 겁니까?”
“두 분이서 친하잖아요. 참고로 루티스 백작님은 사과하셨어요. 그분께선 배도스 공작님에 대한 이야기도 아끼지 않고 이야기해 주셨고요.”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발레린은 시선을 놓치지 않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배도스 공작님께서는 왕자님에 대한 악의는 모두 부정하면서 왕자님을 위한 행동은 하지 않으셨으니, 이번에야말로 겔렌트 남작에게 부탁해 주세요.”
발레린이 빙긋 웃자 배도스 공작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왕자비, 장난은 작작 하십시오.”
“장난 아니에요. 왕자님에 대한 모욕적인 말을 제가 직접 들었는데 곧바로 처리하지도 못했어요. 혹시나 왕자님께 안 좋은 영향이 갈까 봐요.”
“그러고 보면 왕자비께서는 왕자를 꽤 많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네, 왕자님 아니었으면 탑에서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해인저 모녀가 그렇게 빨리 죗값을 치르지 못했을 것이고 또 그렇게 잘생긴 분을 보지 못했을 테니까요.”
배도스 공작이 어이없는 듯 인상을 굳히자 발레린은 신나게 말을 이었다.
“왕자님이야말로 이곳에서 가장 왕다운 분이라고 생각해요. 왕자님같이 똑똑하거나 잘생기고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은 분이 어디 있겠어요?”
발레린은 웃으며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배도스 공작은 주먹을 쥐며 눈을 부릅떴다.
“작작 하십시오.”
“뭘요?”
“왕자를 찬양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사실인걸요.”
배도스 공작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잔뜩 깔았다.
“왕자가 늑대 수인과 피가 반쯤 섞인 건 알고 계십니까?”
“네.”
간단한 대답에 배도스 공작이 잠시 당황한 듯 쳐다봤다.
“어차피 소문도 그렇게 돌기도 하고 실제로 왕자님이 부작용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걸 보기도 했어요. 그땐 마음이 너무 아파서 두렵기도 했고요.”
배도스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걸 다 알고 있는데도 그렇게 왕자를 찬양한다는 말입니까? 정말로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엄밀히 말하면 왕자님은 이곳에서 가장 높은 왕위 계승자잖아요. 그리고 다른 부분은 모두 왕이 될 자격에 부합하고요.”
“피가 문제라는 걸 끝까지 말하지 않는군요.”
“그건 어쩔 수 없잖아요. 왕자님이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래서 문제입니다. 애초에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이 왕위 계승 1위니까요.”
“그럼 누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그 말에 배도스 공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설마 배도스 공작님께서 왕이 되고 싶으신 건가요?”
“대체 그게 무슨…….”
“설마설마해서요. 『천년 왕국사』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거기선 왕위 계승에 밀린 왕족이 끝까지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은 제풀에 넘어져서 죽기도 했고요.”
배도스 공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발레린은 대답하지 않는 배도스 공작을 보며 끈질기게 물었다.
“정말 왕이 되기를 원하시는 건 아니죠?”
“그만 말하십시오.”
“왜요?”
“왕자가 이 왕국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아십니까?”
“왕자님 덕분에 오히려 왕궁 분위기가 더 좋아요. 괜히 위협하며 말하던 사람도 없어졌고 다들 자유로운 분위기예요.”
실제로 처음에 발레린이 왕궁에 들어왔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 왕궁의 분위기는 확실히 더 좋아졌다.
이제는 발레린을 보며 무섭다며 피하는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발레린도 바뀐 왕궁의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다.
“혹시 배도스 공작님은 남 뒷말을 하고 위협적으로 행동하는 하인이 많은 것을 좋아하시지는 않겠죠?”
배도스 공작은 입을 다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내젓더니 발레린을 보았다.
“대체 왕자비는 제게 원한이라도 있는 겁니까? 말끝마다 저를 물고 늘어지는군요.”
“배도스 공작님이 왕자님을 괴롭히셨잖아요. 저는 배도스 공작님도 왕자님께 사과를 하셨으면 좋겠어요.”
“왕자비, 정확한 증거도 없는 일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꼭 왕자와 같이 막무가내로 하는 게…….”
“그런 증거를 미리 말하면 김이 빠지잖아요. 어차피 내일 다 밝혀질 텐데요.”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배도스 공작은 코웃음을 치고는 물러났다.
“그나저나 저는 왕자비와 영 맞지 않나 봅니다. 사소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렇게 많이 부딪히니 말입니다.”
“왕자님을 그렇게 괴롭히시니 당연히 저와 사이가 좋을 수는 없죠.”
“공녀…….”
“내일 되면 꼭 왕자님께 사과는 하셨으면 좋겠어요. 왕자님께서 받아 주실는지 모르겠지만.”
배도스 공작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발레린이 빤히 쳐다보자 배도스 공작은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말했다.
“조만간 왕자도 선대왕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겁니다. 제멋대로 행동하면 그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요.”
“그러게요! 내일 어떻게 될지 기대돼요!”
발레린이 일부러 밝게 말하자 배도스 공작은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그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빠르게 몸을 돌렸다.
발레린은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로프, 들었지?”
“꼭 제 이야기처럼 말하던데요.”
“배도스 공작은 왕자님을 없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