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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23화 (123/130)

16669812546253.jpg123화

발레린은 아침 운동을 하고 있었다. 요즘 제르딘은 바쁜 일 때문에 발레린이 잘 보지도 못했다.

배도스 공작 재판을 위한 준비 때문에 바쁜 탓이었다.

이제 내일이 배도스 공작의 재판 날이었다. 그와 동시에 재판 결과가 나오는 날이기도 했다.

발레린은 새삼 배도스 공작의 몰락이 다가온 것에 기쁘기도 하고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발레린이 힘차게 움직이다가 멈춰 서자 그로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

“조금 걱정되어서.”

“무슨 걱정이요? 혹시 재판에 관한 겁니까?”

발레린은 제르딘이 침실에 자주 들어오지도 못하고 열심히 재판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태껏 배도스 공작이 제대로 증거를 남겨 놓지 않았기에 제르딘은 그것을 찾는 것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발레린은 재판이 잘 끝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재판에 대한 걱정은 아니야.”

“그럼 무슨 걱정이 있길래 주인님이 걱정하시는 겁니까? 어쨌든 왕자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준비는 철저하지 않습니까? 여태껏 왕자가 허술하게 실패한 적은 없고요.”

“그렇긴 해. 그러고 보면 왕자님과 연관된 사건은 모두 잘 끝나기도 했었고.”

“그럼 대체 무슨 걱정인 겁니까?”

“왕자님 부작용 말이야. 분명 나랑 결혼 생활을 이어 가면 후사를 말할 텐데, 그것 때문에 왕자님의 부작용이 더 심해진다고 했잖아.”

발레린은 운동을 하다 말고 창가에 턱을 괴었다. 그로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발레린을 살폈다.

“그때 왕자는 부작용은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왕자가 그 부작용을 감수한다고 했고요.”

“그래서 더 걱정돼. 왕자님이 얼마나 부작용이 심한지 나는 직접 보기도 했잖아. 그런데 나 좋자고 왕자님 부작용이 더 심해지는 걸 보자니…….”

발레린은 고개를 푹 숙여 한숨을 내쉬었다. 제르딘이 좋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희생하지 않았으면 했다.

물론 제르딘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마음이 아프긴 하겠지만 응원할 생각은 있었다. 정말로 제르딘이 행복하게 잘되었으면 하고 바랐으니까.

발레린은 멍하니 창턱을 보다가 그로프에게 말했다.

“이게 맞는 일일까?”

“그래도 왕자가 납득한 것 아닙니까? 왕자는 이제 주인님을 어느 누구보다 좋아하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이 들어오라고 말하자 루네스가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왕자비님, 잘 주무셨어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는 아침에 들은 내용을 모두 발레린에게 전달했다. 그나마 좋은 소식이었기에 발레린은 기쁘게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께서 정찬실에서 아침을 같이 드시자고 하셨어요.”

발레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곤 정찬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가는 정찬실에 발레린은 잠시 심장이 뛰었다가 제르딘의 부작용을 생각하자 다시 심장이 차갑게 식는 듯했다. 그럼에도 정찬실에 들어서자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제르딘이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발레린이 들어오자 일어나서 반겨주었다. 발레린은 예법에 맞게 인사를 한 뒤 의자에 앉았다.

“왕자님, 먼저 와 계셨네요. 저도 곧바로 내려오긴 했는데.”

“그나마 지금 시간이 생겨서요.”

제르딘이 미소를 짓더니 하인에게 요리를 내오라고 명령했다. 곧 발레린의 앞에는 먹음직스러운 수프와 함께 노릇하게 구운 빵이 올라왔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그릇을 슬쩍 보았다. 흰 그릇에는 붉은 피가 있었다. 발레린은 내심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그때 제르딘의 말소리가 울렸다.

“가끔 도축장에서 나온 피가 신선할 때가 있어서요. 고기보다는 이런 피를 자주 먹기도 합니다.”

발레린은 괜히 제르딘을 훔쳐본 것 같아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아닙니다. 저라도 다른 사람이 이런 피를 먹고 있는 걸 보면 놀랄 겁니다.”

제르딘은 미소를 지으며 와인 잔을 들었다. 그는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시고는 와인 잔을 차분히 내려놓았다.

“내일 배도스 공작의 재판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침실을 손볼 예정입니다.”

“침실이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실은 왜요?”

“침대 두 개를 하나로 합칠까 합니다.”

“합친다고요?”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르딘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혹시 그대로 두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럼 따로 침대를 쓰는 것보다는 한 침대가 낫지 않습니까?”

발레린은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제르딘의 후사에 대해서 고민을 하긴 했지만 생각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거기다 발레린은 아직 완전히 마음이 서지도 않았다.

“왕자님.”

뜻밖에 발레린이 말하자 제르딘이 차분히 시선을 맞췄다. 발레린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왕자님은 괜찮으세요?”

“뭘 말입니까?”

“만약 저와 후사를 생각하시면 아이는…….”

“그때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 상관없다고.”

“하지만 저 때문에 왕자님이 부작용으로 고생할 수도 있잖아요.”

제르딘이 웃었다.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괜찮다는 듯 대하는 제르딘의 태도에 발레린은 더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왕자님은 부작용을 겪으실 때 괜찮지 않잖아요. 제가 분명 봤어요. 왕자님이 무척 힘들어하시는 거.”

“공녀. 전…….”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분을 알아보면 어떨까요?”

제르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전 왕자님이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요. 오히려 그렇게 왕자님께서 저를 좋아해 주시니 만약 왕궁을 나가더라도…….”

그때 제르딘이 단호히 말했다.

“제가 그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뭘요?”

“이기적으로 좋아해도 된다고.”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왕자님께 더 폐만 끼치는 것 같아요. 어쨌든 후사를 생각하면 왕자님만 더 아프신 거잖아요.”

“…….”

“만약 제가 아프고 왕자님이 멀쩡하면 전 왕자님 곁에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라서…….”

“그래서 지금 왕궁을 나가겠다는 말입니까?”

발레린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로프를 슬쩍 보자 그로프는 발레린에게 다가와 나직이 속삭였다.

“전 주인님이 뭐라고 결정을 내리셔도 따르겠습니다. 주인님이야말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분이니까요.”

발레린은 제르딘이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땐 정말이지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했다. 죽기 전까지 그 상황을 떠올리며 웃으며 추억할 수 있을 정도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후사 문제에선 발레린은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물론 제르딘과 가족을 이루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그사이 제르딘의 부작용이 더 심해진다면 발레린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런 것 모두 발레린의 탓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그때 제르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녀, 정말 왕궁을 나갈 생각입니까?”

발레리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빠르게 말했다.

“왕자님만 동의하시면 나갈게요. 어쨌든 내일은 배도스 공작의 재판 날이고 배도스 공작이 몰락할 건 분명할 테니까요.”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네?”

“허락하지 않겠다고요.”

“하지만 왕자님…….”

“이번만은 공녀의 생각을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발레린은 잠시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옆에 있던 그로프도 고개를 들어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이기적으로 공녀를 좋아합니다. 공녀가 이 왕궁에 없으면 어떻게 해서든 제 곁에 있게 하고 싶습니다.”

“왕자님.”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당신이 아닌 사람과는 결혼할 생각 없으니까.”

제르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예법에 맞게 인사를 하고는 정찬실을 나갔다. 발레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그로프를 보았다.

“그로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왕자가 주인님께 단단히 빠진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아까 왕자가 주인님께 당신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

발레린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제르딘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발레린이 의아해하자 그로프가 말했다.

“분명 당신이라고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무척이나 기뻤겠지만 발레린은 그다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기적으로 좋아해 달라니.

그건 발레린이 내키지 않았다. 발레린은 그저 제르딘이 아프지 않고 왕이 되고 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물론 그가 좋아해 준 것만으로도 발레린은 기뻤다.

‘그것만 해도 됐는데.’

더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발레린은 차라리 왕궁을 나가는 게 더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발레린이 포크를 쥐지 않고 가만히 그릇만 보고 있자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그래도 음식은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일은 배도스 공작의 재판이 열리는 날이니 기운을 차리셔서 재판을 보셔야죠.”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고, 배도스 공작의 몰락은 꼭 보고 싶었다.

“광장에서 재판이 열리니까 왕자님도 참석하시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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