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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22화 (122/130)

16669812507506.jpg122화

귀족들은 서로 눈을 굴리며 눈치만 볼 뿐 먼저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몇 분 뒤, 겔렌트 남작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배도스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님,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전에 말한 것처럼 본격적으로 왕자를 죽여야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서는 헛기침을 하며 배도스 공작의 눈을 피했다. 겔렌트 남작은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하지만 왕자를 죽이시면 헬릭스 공자님이 왕이 되시는 겁니까?”

“헬릭스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 멍청한 놈이 왕이 되게 할 수는 없지.”

“그럼 대체…….”

“이왕 왕이 될 거면 차라리 내가 왕이 되는 게 낫겠지.”

“배도스 공작님이요?”

“왜, 불만인가?”

“아니요. 그런데 배도스 공작님이 만약 왕이 되시면 다음 왕은…….”

“그것만은 확실히 해 두지.”

“뭘 말입니까?”

“내가 왕이 된다면 다음 왕위는 이 중에서 물려주겠다고.”

귀족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겔렌트 남작도 놀란 눈으로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하지만 원로원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원로원 귀족들은 어차피 그때가 되면 자연히 해산할 텐데 뭐가 걱정인가? 어차피 지금은 늙은 귀족밖에 없으니.”

겔렌트 남작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귀족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때 한 귀족이 말했다.

“그럼 왕자는 어떻게 없앨 작정이십니까?”

“맞습니다. 이제 왕자비가 옆에 있으니 독살도 쉽지 않고…….”

배도스 공작이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왕자는 독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지.”

“독이 통하지 않다니요?”

“왕자가 늑대 수인과 섞인 피라는 건 못 들었나? 전에도 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걸 입증하려면 공작님께서 선대왕을 죽였다는 증거까지 내밀게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벼랑 끝까지 왔으니 어쩔 수 없이 이걸 꺼내야 하는 순간이 온 거지. 나 혼자 죽을 수는 없으니.”

배도스 공작이 비릿하게 웃자 잠시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때 겔렌트 남작이 물었다.

“그럼 재판장에서 그걸 입증하고 왕자를 죽이는 겁니까?”

“확실하게 하기 위해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보는 눈이 많을 텐데요.”

“그전에 내가 왕자가 늑대 수인과 피가 섞인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면 사람들은 별말 하지 않을 테지. 마침 입증할 사람도 있고.”

배도스 공작이 비열한 미소를 짓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한결 풀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배도스 공작님이십니다.”

그 말이 여기저기서 나오자 배도스 공작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그때 귀족 중 하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데 만약 그 방법도 안 통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마력탄을 준비해 두었어.”

“마력탄이라면…….”

배도스 공작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누이처럼 혼자 외롭게 죽을 수는 없지.”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배도스 공작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둘러보았다.

“그러니 이번 일이 잘되도록 모두 노력해 주면 좋겠군.”

귀족들은 그저 눈치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배도스 공작은 개의치 않고 외쳤다.

“그럼 3일 뒤에 보도록 하지. 모두 좋은 구경거리 꼭 놓치지 마시고.”

배도스 공작이 일어서자 귀족들은 모두 일어나 배도스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배도스 공작은 곧장 집무실을 나갔다.

다른 귀족들도 모두 집무실을 나가며 말했다.

“그래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배도스 공작님이 나서 주니 고맙군.”

“하지만 나는 아까 글렌 남작이 그렇게 당한 건 잊지 못할 것 같네.”

“그렇긴 해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어쨌든 다른 귀족들이 모두 자백하면 내 자리도 위험해지는 건 마찬가지인데.”

“하긴, 그나저나 만약 배도스 공작님이 왕이 된다면 그 이후로는 누가 왕이 되겠는가?”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겔렌트 남작을 슬쩍 쳐다봤다.

“정말 겔렌트 남작에게 왕위를 이어 주겠는가?”

“지금 루티스 백작처럼 옆에 붙어 있으니 한자리는 주겠지.”

“난 솔직히 장담하지 못하겠네. 루티스 백작을 그렇게 내친 분인데 겔렌트 남작에게 주다니. 차라리 지금 사라진 헬릭스 공자가 더 신빙성이 있네.”

“하긴 배도스 공작님의 아들인데 설마 내치시겠는가?”

“그럼 지금이라도 우리가 헬릭스 공자님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헬릭스 공자님이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니까.”

“그 말도 일리가 있네. 겔렌트 남작보다는 낫지. 어쨌든 그분은 겔렌트 남작처럼 배신할 분은 아니니까.”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서가는 겔렌트 남작을 보며 헬릭스의 행방에 대해 몇 마디 나누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대다수의 귀족들이 배도스 공작의 저택을 나설 때였다. 그중 한 귀족이 마차에 타려는 겔렌트 남작에게 다가갔다.

“겔렌트 남작, 잠깐 이야기 좀 하세.”

겔렌트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자 귀족이 말을 이었다.

“배도스 공작님을 너무 믿지는 말게.”

“무슨 말입니까?”

“루티스 백작이 그렇게 된 걸 보면 모르겠나? 배도스 공작님은 자기가 위험해지면 가까이 있는 사람을 먼저 내치시는 분이네.”

“그건 루티스 백작이 멍청해서 그렇습니다. 왕자도 있는 대회의실에서 그렇게 막무가내로 말을 꺼내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루티스 백작은 오랜 시간 동안 배도스 공작님 옆에 있었네. 온갖 일을 다 겪기도 했었고. 그런데 단번에 루티스 백작이 그렇게 되는 걸 보면 모르겠나?”

“무슨 말입니까?”

“왕자가 일부러 그렇게 움직이고 있네. 지금은 아예 배도스 공작님이 기울어졌다는 거고, 가망이 없어.”

“그럼 저보고 지금 배도스 공작님을 배신이라도 하라는 말씀입니까?”

“배신보다는 각자 살길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루티스 백작이 그렇게 된 걸 보고 나도 많이 대비하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배도스 공작님의 재판 날이 되면 왕자에게 늑대 수인의 피가 섞인 것으로 말이 많아질 겁니다. 그럼 왕자는 왕이 되지 못할 거고요.”

“왕자가 그런 대비 못 해 뒀을 것 같은가? 이미 벌써 배도스 공작이 이렇게 나올 걸 알고 대비해 뒀을 걸세.”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그저 여태껏 왕자를 잘 관찰한 것뿐이네.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왕자는 배도스 공작님에게 질린 척 행동하긴 해도 챙길 건 다 챙겼네. 지금 왕실 친위대가 여느 때보다 강력해진 걸 아는가?”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다른 일로 시끄럽긴 하지만 왕자는 벌써부터 온 사방에 왕실 친위대를 배치하고서 왕실의 권력을 키우고 있어. 이전에는 귀족들의 사병 축소도 강행하지 않았는가?”

겔렌트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스 공작이 손을 쓴다고 했지만 어쨌든 지금 바로 앞에 배도스 공작의 목에 칼날이 들어와 사병 축소에 대해서 반박하는 건은 진척도 없었다.

“왕자가 일부러 사건을 크게 키우고 다른 중요한 논쟁은 뒤로 몰래 하면서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거네.”

“그럼 왕자가 왕실 친위대를 키워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안 그래도 원로원 귀족들과 배도스 공작님이 툭하면 변방의 사병들이 고생한다고 하면서 왕자를 협박하지 않는가? 이젠 그런 협박이 왕자에게 통하지 않겠지. 왕실 친위대가 지키고 있으면 우리 같은 귀족들이 변방에 있는 사병에 관해서 왕자에게 할 말이 없어질 거고 그럼 우리는 왕자에게 한마디도 할 수 없겠지.”

겔렌트 남작이 말없이 가만히 있자 귀족이 툭 내뱉듯 말했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배도스 공작님만 믿고 있다간 뒤통수를 맞을 수 있으니 조심하게.”

“제가 지금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배도스 공작님을 모시는데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리고 제가 배도스 공작님께 이 사실을 말할지 누가 압니까?”

“루티스 백작이 생각나서 그러하네. 그리고 나는 조만간 이 왕국을 뜰 예정이야. 루티스 백작이 감옥에 간 이후로 여기 있기 싫어서.”

“…….”

“그러고 보면 자네가 루티스 백작과 많이 친하지 않았나?”

겔렌트 남작이 말없이 쳐다보자 귀족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배신은 배신으로 돌아오는 법이지. 아무튼 조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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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시드 왕국의 수도에는 커다란 벽보가 붙었다. 하나는 배도스 공작의 재판 일정이었다. 갑자기 잡힌 일정이었지만 사안이 중대해서 광장에서 재판이 열린다고 했다. 그의 죄는 다양했다.

황금 마검을 함부로 훔친 것도 모자라 이전에 숱하게 만연했던 독살 사건과 왕자비의 독살 미수 사건 등. 벽보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배도스 공작을 욕했다.

그리고 그나마 즐거운 소식은 황금 마검이 원래 두 자루로 만들어진 것이며 두 자루가 온전히 왕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이에 왕자에 대한 여론은 꽤 좋아졌다. 내내 왕자의 심신이 미약해서 여러 귀족에게 숨은 듯 살았다는 소문과 다르게 왕자가 강경하게 나오자 이전에 떠돌던 괴소문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이 소식을 누구보다 빠르게 들은 루네스는 다급히 발레린의 침실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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