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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21화 (1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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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티스 백작을 그냥 없애는 것보다는 배도스 공작과 관련된 모든 사건을 증언하게 하고 죗값을 받게 하는 게 저희 쪽에는 더 이득이라서요. 물론 공녀가 이에 관해서 잘 말씀해 주기도 했고요.”

달콤한 칭찬에 발레린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발레린이 밝은 얼굴로 보자 제르딘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루티스 백작이 제겐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공녀에겐 모두 밝힌 걸 보면 나름대로 공녀도 애쓰기도 했을 테고요.”

새삼 발레린은 제르딘의 말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 가벼워졌다. 그나마 제르딘이 알아줘서 고마웠다. 발레린이 그저 미소를 짓자 제르딘이 차분히 말했다.

“모두 공녀 덕분입니다. 주변에 다시 독살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루티스 백작이 남았으니 제대로 배도스 공작에 관한 사건을 마무리 지을 것 같습니다.”

“그럼 배도스 공작에 대한 재판은 언제인가요?”

“3일 뒤에 열릴 겁니다. 공녀의 독살 미수 사건도 함께 연결 지어서 열 것이기 때문에 결과는 금방 나올 겁니다.”

“무사히 잘 끝나겠죠?”

제르딘이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증거는 모두 모아 뒀고 재판 결과도 제가 승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도스 공작이 빠져나갈 구멍은 없을 겁니다.”

발레린은 간만에 제대로 상황이 나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제르딘은 발레린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자연스레 제르딘과 시선이 마주쳤다. 제르딘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주변의 빛이 모두 제르딘에게 쏠리는 듯 환했다.

순간 발레린은 봄바람을 스치듯 심장이 간질거렸다.

‘역시 잘생긴 왕자님이야.’

발레린은 넋을 놓은 듯 감탄했다.

20. 초록빛 행운

늦은 밤이었다. 왕궁 다음으로 가장 화려한 배도스 공작의 저택은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았다.

저택 앞에는 여러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하인들은 갑자기 없어진 공자를 찾으려 뛰어다녔다. 고풍스러운 집무실 안에는 배도스 공작의 중심으로 여러 귀족들이 앉아 있었다.

배도스 공작은 얼음을 아드득 씹으면서 탁자를 내려쳤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황금 마검도 없어지고 헬릭스까지 집을 나가고, 이게 대체…….”

그때 바로 옆에 앉아 있던 겔렌트 남작이 조심스레 말했다.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헬릭스 공자님은 조만간 돌아오실 겁니다. 원래 평소에도 늦게 다니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야. 황금 마검까지 사라졌다고!”

그 말에 겔렌트 남작도 입을 다물었다. 이미 황금 마검이 왕궁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분명 헬릭스가 황금 마검까지 들고 갔겠지. 그놈은 워낙 멍청하니.”

“하지만 공자님께서 정말 그렇게까지 하셨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배도스 공작님까지 위험해지실 텐데요.”

“그런 것까지 생각했다면 황금 마검을 왕자에게 갖다 주진 않았겠지. 멍청한 놈. 끝까지 괴롭히는군.”

배도스 공작은 주먹을 움켜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다른 귀족들은 그저 눈치만 보며 배도스 공작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이전에는 뜨지 않던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중 한 귀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배도스 공작님, 그러면 저희 쪽도 위험해지지 않습니까?”

그 말을 시작으로 다들 한 마디씩 던졌다.

“맞습니다. 안 그래도 왕자가 지난 일까지 들쑤시는 마당이니 왕자가 망하기 전에 저희가 망하게 생겼습니다.”

옆에 있던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왕자가 온갖 증거를 다 찾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애써서 독살했던 사람들도 오히려 그 증거를 토대로 지난 증거를 유추하고 있다고 하고요.”

다들 걱정 어린 표정이었다. 배도스 공작은 그들을 둘러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한자리씩 줄 땐 아무 말 하지 않더니 이젠 다들 제 자리가 위험해지니 발을 빼겠다?”

“그땐 적어도 배도스 공작님께서 저희를 보호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저희가 공격받고 있으니 이럴 수밖에 없죠.”

“맞습니다. 그러니 진작 적당히 했으면 저희가 이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배도스 공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날카로운 눈매로 쳐다보며 말했다.

“적당히 했으면?”

“적당히 왕자님과 권력을 견제했으면 이렇게까지 왕자가 발악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스 공작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들은 어느 누구보다 왕자를 욕하던 사람 아니었나? 그래서 나와 뜻이 맞았던 거고.”

“그렇긴 하지만…….”

“그럼 내가 자네들을 밀고하면 되겠군. 왕자를 모욕한 죄로 말이야.”

배도스 공작이 웃으며 말하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반발했다.

“공작님!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니, 아무리 지금 급하다고 하셔도 그렇게 저희를 모욕하셔야겠습니까?”

여기저기 터지는 말에 배도스 공작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모욕이라니? 난 지금 어느 누구보다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데.”

“그럼 배도스 공작님도 저희가 밀고하면 되겠습니까? 여기에 있는 어느 누구보다 배도스 공작님이 왕자님을 가장 오랫동안 모욕하신 분 아닙니까?”

그 말에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배도스 공작은 일그러진 얼굴로 탁자를 내려쳤다.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해?”

“그런 말이라니요. 배도스 공작님께서 먼저 저희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배도스 공작이 주먹을 쥐며 노려보자 다른 귀족이 한마디 했다.

“저희도 그동안 많이 참았습니다. 솔직히 내키지 않는 일도 배도스 공작님이 하셨으니 가만히 있었고요. 그런데 지금은 선을 넘으신 것 같습니다.”

배도스 공작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내가 선을 넘어?”

“네, 전 황금 마검까지 배도스 공작님이 훔치신 줄 몰랐습니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웅성거렸다. 배도스 공작은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날 배신이라도 하겠다고? 이 상황에서?”

“못 할 게 뭡니까? 어차피 먼저 자백하면 죄라도 깎을 수 있다고 합니다. 뭐, 지금 왕자가 하는 것을 보면 언젠가는 다 밝혀질 것 같지만.”

배도스 공작은 어이없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자백하면 죄를 깎을 수 있다고?”

배도스 공작은 실성한 사람처럼 낄낄거렸다. 의자에 앉은 귀족들은 모두 어이없는 얼굴로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그중에서 한 귀족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3일 뒤에 배도스 공작님과 관련된 재판이 열린다고 합니다. 왕자 측에서는 공작님이 그래도 왕족의 일원이라 따로 감옥에 가두지 않고 재판을 한다고 하지만, 저희는 일개 귀족일 뿐이니 배도스 공작님보다는 벌을 더 받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먼저 자백이라도 해서 죄를 깎는다고 말하는 거죠.”

주변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그때 겔렌트 남작이 말했다.

“그래도 상황은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태껏 지켜봤지만 지금만큼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루티스 백작도 이미 다 자백했고 독살 위험이 있어서 방까지 옮겼다고 하니까요.”

겔렌트 남작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곧바로 물었다.

“루티스 백작이 자백했다고요?”

“제가 듣기론 왕자에게 직접 말한 것은 아니고 왕자비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겔렌트 남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왕자비요?”

“네, 오히려 그렇게 말하면서 왕자비와 친해졌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때 귀족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왕자비가 참 희한한 사람입니다. 왕궁에서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기도 했고.”

“맞습니다. 왕궁에 만연하던 독살도 왕자비 때문에 사린 것 아닙니까? 거기다 왕자비가 온 이후로 왕자가 세력을 넓혀 갔으니까요.”

그 말에 동의하는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어느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 없이 다들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때 귀족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저는 지금이라도 왕자에게 자백할 겁니다. 루티스 백작님까지 자백한 마당에 저희가 살아날 구멍이 있습니까?”

그러곤 그 귀족은 곧바로 집무실을 나갔다. 배도스 공작은 곁에 있는 병사 한 명을 불렀다. 병사는 명령을 받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몇 분이 지난 뒤에 병사가 들어왔다. 그는 곧바로 배도스 공작에게 고개를 숙여 무언가 속닥였다.

배도스 공작은 씨익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귀족들을 둘러봤다. 그들은 무언가 예감한 듯 굳은 얼굴이었다.

“글렌 남작이 저택을 나가기도 전에 심장에 무리가 와서 쓰러졌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놀란 귀족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당장이라도 의사를 불러야 하지 않습니까?”

배도스 공작은 지나치게 여유롭게 대답했다.

“의사가 와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이미 숨이 끊어졌다고요.”

주변에는 얼음이 낀 듯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어느 누구 하나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을 때 배도스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자에게 자백하겠다고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어차피 이 저택을 나가지도 못할 테니.”

주변은 찬물이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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