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발레린이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헬릭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이번에 단단히 죗값을 치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죗값이요?”
“네, 공녀님을 만나기 전에 실없이 여러 여자를 만났거든요. 제가 관심 없으면 일방적으로 무시했는데 이제는 제가 공녀님께 관심을 바라고 그 관심은 영원히 얻을 수 없으니…….”
헬릭스는 급기야 손수건을 꺼냈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여 눈가를 닦다가 이내 차분히 말했다.
“죗값을 받는 겁니다.”
그러곤 헬릭스는 눈가를 더 닦다가 손수건을 넣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면서 말했다.
“그래도 헬릭스는 아버지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황금 마검까지 돌려줬으니까요.”
발레린은 탁자 위에 있는 황금 마검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헬릭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공녀님,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발레린도 함께 일어나자 헬릭스는 손을 내저었다.
“저 혼자 가고 싶습니다. 아직 전 마음 정리가 덜 되었거든요.”
그러면서 헬릭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짐 가방을 어깨에 멨다. 발레린이 더 말하기도 전에 헬릭스는 응접실을 나갔다.
발레린은 헬릭스의 감정이 무척이나 잘 이해되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안 좋은 찰나였다. 루네스가 찻잔을 들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발레린이 혼자 있자 루네스는 황급히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왕자비님, 헬릭스 님이 벌써 가셨어요?”
“못 봤어? 아까 가셨는데.”
“못 봤어요. 그나저나 이건…….”
루네스가 놀란 눈으로 황금 마검을 보자 발레린은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루네스는 다소 믿기지 않는 듯 멍하게 중얼거렸다.
“헬릭스 님이 이렇게 행동하실 줄 몰랐어요. 그분은 배도스 공작님의 아들이잖아요.”
“그렇긴 해도 그동안 배도스 공작이 어떤 일을 꾸미는지 내게 말해 주기도 했었어.”
“말씀까지 했다고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는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헬릭스 님이 이렇게 바뀔 줄은 몰랐어요. 소문으로 듣기에는 헬릭스 님은 무척이나 여성 편력이 심하고 가벼운 사람이었거든요.”
발레린도 사실 믿기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헬릭스가 황금 마검까지 찾아 줄 줄은 몰랐다. 물론 침대 밑에 있었다고 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때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면서 말했다.
“주인님, 이렇게 된 마당에 제르딘에게 이 황금 마검을 가져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발레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배도스 공작 때문에 고생하는 제르딘에게 기쁜 소식이었다.
거기다 동굴에서 찾던 황금 마검도 찾았으니 이제는 완벽히 왕실의 보물이 돌아온 것이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황금 마검을 챙겼다. 어쨌든 가능성이 없던 일이 해결되었다. 황금 마검이 두 자루라는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마침내 찾아냈고 없어졌던 황금 마검도 찾았다.
발레린은 벅찬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네스, 왕자님은 집무실에 있지?”
“아마 그럴 거예요. 오늘은 왕정 회의가 없거든요.”
발레린은 응접실을 나오자마자 계단으로 가기 위해 빠르게 걸었다. 그렇게 침실을 지나치던 찰나였다. 마침 제르딘이 반대쪽 복도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루네스는 발레린에게 나직이 말했다.
“왕자비님, 저는 그럼 가 볼게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제르딘에게 다가갔다. 그는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발레린은 빠른 걸음으로 제르딘에게 다가갔다.
“왕자님, 안 그래도 왕자님께 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만나네요!”
“저에게요?”
“네, 헬릭스 님이 황금 마검을 가져왔거든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제르딘의 얼굴이 굳었다. 아까와 다른 분위기에 발레린은 조심스레 자루에 담긴 황금 마검을 내밀었다.
제르딘은 천천히 받고는 자루를 벗겼다. 곧 찬란한 빛을 띤 황금 마검이 드러났다. 제르딘은 놀라운 기색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내 그는 황금 마검을 자루에 담고는 옆에 있던 보좌관에게 내밀었다.
“왕궁 보물 보관함에 갖다 놔.”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인 뒤 황급히 물러났다. 발레린은 궁금해서 다급히 물었다.
“황금 마검은 맞는 거죠?”
“맞습니다. 왕궁에서 도둑맞은 황금 마검.”
“다행이네요.”
발레린이 활짝 웃자 제르딘은 빤히 보다가 문득 물었다.
“그나저나 헬릭스가 가져왔다고 했습니까?”
“네, 침대 밑에서 발견하셨대요.”
“이상하네요.”
“뭐가요?”
“여태껏 침대 밑에 있었는데 이제야 발견된 거요.”
발레린이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자 제르딘이 말했다.
“혹시 헬릭스가 이곳을 떠난 겁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제 생각에는 도망친 것 같습니다.”
“도망이요?”
“아무리 생각해도 황금 마검이 이제야 발견된 게 의심스러워서요.”
그러곤 제르딘은 옆에 있는 친위대에게 무언가 말했다. 발레린은 황급히 제르딘의 팔을 잡았다. 제르딘이 멈칫하자 발레린은 서둘러 말했다.
“헬릭스 님은 황금 마검을 직접 가져왔을 만큼 왕 자리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어요. 오히려 그런 자리는 질색하는 것 같았고요.”
제르딘은 대답하지 않고 발레린을 빤히 봤다. 발레린은 제르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가 좋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발레린은 얽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헬릭스 님은 배도스 공작만큼 머리를 쓰지도 않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만약 헬릭스 님이 배도스 공작 같은 분이었다면 황금 마검을 돌려주지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다른 곳에 숨겼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왜 굳이 공녀에게 준 겁니까?”
“그건…….”
발레린이 말하기도 전에 그로프가 말했다.
“헬릭스는 주인님을 한 번 더 보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화를 참고 있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가 이내 주위에 있는 하인과 병사를 물렸다.
이윽고 주변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제르딘은 발레린에게 차분히 말했다.
“우선 침실로 가시죠.”
발레린은 그 말이 왠지 모르게 뜨겁게 다가와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제르딘이 한 발자국 다가오자 발레린은 황급히 침실로 먼저 들어갔다.
잠시 후 제르딘이 차분히 침실 문을 닫고 들어왔다. 발레린은 괜히 제르딘을 힐끗 보았다. 제르딘은 재킷을 벗고서 탁자 앞에 앉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발레린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아까보다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지친 듯하면서도 은근히 집요해 보였다.
“잠시 여기에 앉으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발레린이 어깨를 움찔거리자 제르딘이 차분히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제르딘 앞에 앉았다. 발레린이 앉자마자 제르딘은 말했다.
“이걸 공녀에게 설명하는 것 자체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발레린이 궁금해하며 쳐다보자 제르딘이 말을 이었다.
“헬릭스는 저에게 한참 못 미치는데 그놈에게 드는 악감정이 요즘 상상을 초월합니다.”
“왜요? 헬릭스 님이 혹시 왕자님께 이상한 일이라도 꾸몄나요?”
“아니요.”
“그럼 왜…….”
“질투가 나니까요. 그놈이 자꾸 공녀에게 집적거리니까 죽이고 싶을 정도입니다.”
발레린이 놀란 눈으로 보자 제르딘이 한발 물러났다.
“방금 한 말은 죄송합니다. 괜히 공녀에게 날것으로 말한 것 같네요.”
“아니에요. 오히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발레린은 벅찬 심정으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약간은 의아한 듯 발레린을 보았다. 발레린은 거세게 뛰는 심장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왕자님은 질투하시는 거죠?”
제르딘은 잠시 발레린을 보았다. 발레린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자 제르딘은 단호하게 말했다.
“네.”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발레린은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어차피 헬릭스 님은 이제 떠났어요. 그리고 당분간 찾아오지도 않을 것 같고요.”
“그건 모릅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유난히 낮은 목소리가 거슬리긴 했지만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미소를 지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공녀가 원한다면 헬릭스에게 죄는 더 묻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황금 마검을 찾아온 건 왕국법상 정상 참작할 만한 상황이니까요.”
그 말에 발레린은 의문이 들어서 물었다.
“그럼 헬릭스 님이 정말로 죄를 저질렀던 건가요?”
“엄밀히 말하면 공녀에게 관심을 드러냈으니 모반죄와 비슷합니다.”
“모반죄요? 그건 아예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죄 아닌가요?”
“공녀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드러냈으니 제겐 그런 의미입니다.”
발레린은 자신이 들은 말이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심지어 제르딘은 장난으로 하는 말 같지도 않았다. 발레린이 멍하게 보는 사이 제르딘이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내일 루티스 백작의 재판은 잠시 미뤘습니다.”
“왜요?”
“아무래도 루티스 백작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게 나을 듯해서요.”
“증인이면 배도스 공작과 관련된 사건인가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