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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19화 (11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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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먹을게!”

발레린은 잽싸게 탁자 앞에 앉았다. 발레린이 이것저것 먹고 있을 때 루네스가 말했다.

“그나저나 제가 아까 우연히 여기 오면서 들었는데요. 배도스 공작의 증거를 찾고 있던 조사관 중 몇몇이 독살로 죽었대요.”

발레린이 포크를 멈칫하자 루네스가 말을 이었다.

“거기다 배도스 공작에 대해 말하려던 사람들도 독을 먹고…….”

발레린이 벌떡 일어나자 루네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라봤다.

“왕자비님?”

“그럼 지금 배도스 공작과 관련된 사람들이 독살로 죽었다는 거야?”

“정확한 건 모르겠는데 어쨌든 소문으로는 그래요.”

“그럼 왕자님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

“그럴걸요.”

문득 발레린은 아까 급하게 나간 제르딘이 생각났다. 어쨌든 그는 이렇게 배도스 공작이 움직일 거라고 짐작했을 터였다.

발레린이 굳은 얼굴로 있는 사이 그로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배도스 공작이 그냥 왕궁에서 나갈 것 같지는 않았는데 기어코 일을 저지르는군요.”

“그러게. 이렇게 되면 왕자님만 더 곤란해질 텐데.”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네스가 급히 문을 열자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헬릭스 님?”

발레린은 빠르게 헬릭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요?”

“줄 게 있어서요.”

헬릭스는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거기다 그는 커다란 짐 가방까지 들고 있었다. 발레린이 의아하게 보자 헬릭스가 웃으며 물었다.

“시간 괜찮으신가요? 할 이야기도 있는데.”

발레린은 뒤를 돌아 남은 음식을 보았다. 아직 음식은 다 먹지 않은 상태였다.

“헬릭스 님, 그럼 응접실에 기다리고 계시겠어요? 전 아직 음식을 다 먹지 않아서요.”

“아, 그럼 거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발레린은 루네스에게 부탁했다.

“루네스, 헬릭스 님을 응접실로 안내해 드릴래?”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실을 나갔다. 발레린은 곧바로 탁자 앞으로 돌아와 음식을 빠르게 먹었다.

“주인님, 체하겠습니다.”

“걱정 마, 그로프. 체하면 독을 먹으면 돼.”

그로프는 빠르게 먹는 발레린을 보며 개꿀개꿀 울었다. 그렇게 발레린은 쏜살같이 식사를 마친 뒤 응접실로 걸어갔다.

저녁 이후의 시간이라 복도에는 하인이 거의 돌아다니고 있지 않았다. 응접실도 조용하긴 마찬가지였다.

루네스는 급히 차를 가지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헬릭스는 삐딱하게 앉은 채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발레린은 빠른 걸음으로 헬릭스에게 걸어갔다. 헬릭스는 발레린을 보자마자 미소를 짓고는 똑바로 앉았다. 발레린은 헬릭스의 앞에 앉은 채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내내 가만히 지켜보던 그로프는 발레린의 귀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갑자기 온 걸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건 분명합니다.”

발레린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헬릭스가 고개를 들어 발레린을 쳐다봤다. 갑자기 마주친 시선에 발레린이 의아해하자 헬릭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이걸 아시면 저를 죽이실 겁니다.”

“죽이다니요?”

헬릭스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조심스레 무언가를 꺼냈다. 그는 탁자에 자루에 휩싸인 무언가를 놓았다.

“이게 뭔가요?”

“황금 마검입니다.”

“황금 마검이요?”

“마침 아버지가 숨겨 놓은 것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걸 어디서 찾았나요?”

“제 침대 밑에 있더군요.”

“침대 밑이요?”

“네, 안 그래도 예전부터 아버지가 꼭 잘 때는 다른 곳에서 자지 말고 저택에 있는 침대에서 자라고 하셨는데 이것과 엮여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순간 발레린은 예전에 읽은 속설에 대한 책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명검을 침대 밑에 두고 자면 그 검이 휘두르는 방향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속설이 있긴 있었는데…….”

“속설이요? 그건 뭡니까?”

발레린은 차분히 설명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세속적인 이야기예요. 대체로 여러 사람의 염원이 담겨 있는 이야기가 많고요.”

“역시 공녀님은 뭐든지 저보다 잘 아시네요.”

헬릭스는 그 사실에도 기쁜지 웃음을 지었다. 발레린은 제르딘이 그토록 찾아 헤맨 황금 마검이 이제야 나타난 것이 좋으면서도 헬릭스가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찾으셨나요?”

“요즘 안팎으로 너무 시끄러워서 여행을 떠나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침대 밑을 뒤지다 보니까 나오더군요.”

발레린이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보고 있자 헬릭스가 말했다.

“요즘 저택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아버지는 당장이라도 왕자를 죽이려고 혈안이고 하인들도 제정신이 아니에요.”

“…….”

“거기다 아버지는 계속 저한테 왕자를 죽여야 내가 산다고 말하니 제가 멀쩡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배도스 공작이 저택에서도 그런 말을 하나요?”

“네, 아버지는 솔직히 왕궁에 있는 것보다 저택에 있는 모습이 더 악랄합니다. 생각만 해도 질려요.”

헬릭스는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내젓더니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저는 아버지보다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굳이 일을 저질러서 제 삶을 방해받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서 짐을 싸서 잠깐 수도를 떠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헬릭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이제 이곳은 공녀님이 아니면 재미가 없어서요. 아니, 그래서 혼자라도 떠날까 싶어서 짐을 정리하다가 이 황금 마검을 발견한 겁니다.”

헬릭스는 탁자 위에 천으로 감싸여 있는 것을 가리켰다. 발레린은 잠시 보다가 헬릭스에게 물었다.

“확인해 봐도 되나요?”

“네, 확인해 보세요. 처음에 이걸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헬릭스의 작은 감탄을 뒤로하며 발레린은 황금 마검에 감싸인 천을 조심스레 벗겨 냈다. 그러자 말 그대로 황금에 휩싸인 검이 나왔다.

분명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한데 스스로 빛이 새어 나오는 듯 밝고 찬란했다. 발레린이 눈을 떼지 못하자 헬릭스가 말했다.

“아마 아버지가 저보다 먼저 발견했으면 다른 곳에 숨겼을 겁니다. 아버지는 충분히 그럴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헬릭스 님은 괜찮으세요?”

“저요?”

“네.”

발레린이 걱정스레 쳐다보자 헬릭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데없는 웃음에 발레린은 약간 의아해하며 헬릭스를 쳐다봤다.

헬릭스는 아까보다 눈을 빛내며 말했다.

“공녀님이 이제 제 걱정을 해 주시다니. 앞으로 잊지 못할 경험일 겁니다.”

“그래도 배도스 공작님은 헬릭스 님 아버지잖아요.”

“그렇긴 해도 아버지와 함께 엮여서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기에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발레린은 의문이 들어 물었다.

“그럼 이 황금 마검은 왕자님께 가져다줘야 하지 않나요? 왜 저에게…….”

“그야 공녀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죠.”

헬릭스는 환하게 웃었다. 발레린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이 상황에는 어떤 말을 해도 헬릭스에겐 그저 마음 없는 말일 것이다.

발레린도 그 입장을 너무나 잘 알기에 선뜻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황금 마검만 보고 있던 때 헬릭스가 말했다.

“공녀님, 어쨌든 제 나름대로 아버지의 나쁜 짓을 막으려고 했지만 이게 최선입니다. 그리고 그때 아무 말씀 하지 않았던 거 고맙습니다. 덕분에 아버지가 뒤통수 맞을 시기가 더 앞당겨졌습니다.”

“정말요?”

“네, 제르딘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쨌든 이제 아버지는 뒤통수는 물론 이마까지 모두 왕자에게 맞을 것 같습니다. 이미 왕자는 알고 있죠?”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헬릭스가 말했다.

“그렇다니까요. 어쨌든 왕자가 저보다 똑똑한 건 맞으니.”

헬릭스는 씁쓸한 듯 입맛을 다시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제가 이렇게 행동하면서 좋아한 사람은 공녀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니다.”

꽤나 직접적인 말에 발레린이 놀라며 보자 헬릭스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 원래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뭔가 끈덕지게 하지도 못하고 그저 흥미가 있으면 한번 건드려 봤다가 질리면 버리고.”

“…….”

“그런데 이번만은 정말 제 진심이었습니다. 어쨌든 공녀님 덕분에 제가 책을 읽었다니까요.”

헬릭스는 낄낄거리다가 이내 다시 표정을 굳혔다. 그는 한숨을 내쉰 뒤 차분히 물었다.

“혹시 왕자가 아직도 공녀님을 좋아하지 않나요?”

발레린이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헬릭스가 설명했다.

“뻔하잖아요. 제르딘은 여태껏 다른 누군가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거든요. 물론 공녀님은 특별해서 제르딘이 관심을 가진 것 같긴 한데, 혹시 아직도 제르딘이 말하지 않았나요?”

“아니요. 말했어요.”

그 말을 하면서도 발레린은 얼굴이 벌게졌다. 발레린의 얼굴을 헬릭스는 잠시 말없이 빤히 보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쉽네요. 만약 지금까지 왕자가 아무 생각 없으면 공녀님께 부탁할까 생각했거든요.”

“무슨 부탁이요?”

“같이 수도 외곽으로 여행을 떠나자고요.”

여행이라는 말에 발레린은 심장이 두근거렸으나 이내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렇다고 해서 헬릭스와 같이 여행을 떠날 순 없었다. 이제 제르딘의 진심을 알았는데 무시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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