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발레린은 제르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저 바라만 봤다. 제르딘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관심이 가긴 했습니다.”
“뭐가요?”
“공녀요.”
“네?”
“마침 결혼 서약서를 대신전에 제출했습니다. 정통성에 맞게 완전한 서류를 갖춰서요.”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르딘을 쳐다봤다.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는 듯하다가 발레린은 토해 내듯 말했다.
“왕자님, 그러니까…….”
“공녀를 좋아한다고요.”
“네?”
제르딘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까 제발 이기적으로 좋아해 주세요. 조금도 힘들지 않으니.”
발레린은 순간 머릿속이 아득했다. 이기적으로 좋아해 달라고? 발레린은 제 귀가 어떻게 되었나 싶어서 귓가를 만져 보았다. 하지만 귀는 멀쩡했다.
발레린은 멍한 눈빛으로 제르딘을 보며 말했다.
“왕자님.”
“네.”
“진심이세요?”
“진심입니다.”
발레린은 넋을 놓은 채 중얼거렸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꿈 아닙니다. 제가 공녀를 보고 있는데 꿈이라니요?”
발레린은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제르딘을 보았다. 그는 발레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발레린은 서둘러 시선을 돌려 그로프를 봤다.
“그로프, 이거 진짜 꿈 아니지?”
그로프는 발레린의 팔에 혀를 내었다가 쳐다봤다.
“주인님의 팔에 혀가 닿으니 저도 꿈이 아닌 건 마찬가지입니다.”
발레린은 그로프의 혀가 닿은 팔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도 닿은 느낌이 있긴 있는데…….”
말을 채 끝마치지 않고 발레린은 다시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발레린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맑은 유리 같은 하늘빛 눈동자와 더불어 흠잡을 데 없는 콧대, 그리고 매력적으로 올라간 입꼬리.
분명히 발레린이 봐 온 왕자님이 맞았다. 탑 위에서 봤던 왕자님, 한눈에 반했던 왕자님.
발레린이 말없이 넋을 놓고 있자 제르딘은 발레린의 앞에 음식을 이것저것 갖다 주었다.
“점심부터 제대로 먹지 않았으니 저녁은 꼭 드셔야 합니다.”
발레린은 그저 제르딘을 보고만 있었다. 실제로 봐도 믿기지 않았다. 정말로 꿈속에 있는 것 같았다.
발레린이 가만히 있자 제르딘은 시선을 들어 발레린을 보았다. 그는 멍한 발레린의 눈빛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공녀를 좋아하는 마음은 변치 않을 테니 어서 저녁을 드세요.”
발레린은 아까보다 눈을 크게 뜬 채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이 그대로 눈을 맞추자 발레린은 서둘러 말했다.
“왕자님, 정말 진심이세요? 농담하시는 거 아니죠?”
“전 이런 일로 농담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긴 한데 정말로 믿기지 않아서요.”
발레린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제르딘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왕자님은 저같이 저주를 받았던 사람과의 아이도 원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리고 처음부터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시기도 했고요.”
“물론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공녀를 좋아할 줄 몰랐으니까요.”
좋아한다는 말에 발레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발레린이 볼을 살짝 가렸지만 제르딘은 미소를 지으며 발레린을 바라봤다.
발레린은 슬쩍 제르딘을 쳐다봤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왕자님, 괜찮으세요?”
“뭐가요?”
“그러니까…… 만약에 말이에요.”
발레린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해서 냅다 말했다.
“제가 너무 앞선 생각을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저와 결혼을 유지한다면 후사도 생각하셔야 할 것 같은데…….”
발레린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제르딘은 어느 누구보다 심각한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평범한 사람과 아이를 원한다고 했었다.
발레린은 너무 부끄러웠지만 제르딘의 대답이 궁금해서 뚫어지게 바라봤다.
제르딘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제 부작용이 커지긴 하겠지만 아이는 문제없다고 합니다.”
“그럼 왕자님의 부작용만 커진다는 건가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잠시 들떴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그가 어떻게 부작용을 겪는지 보았기에 지금 더 심해진다면 발레린은 마음이 더 안 좋을 것 같았다.
발레린이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보고 있자 제르딘이 말했다.
“공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저는 어렸을 때부터 부작용을 겪어서 어떤 아픔인지 잘 알고 있고 견뎌 냈습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견뎌 내야 할 수도 있잖아요.”
제르딘이 웃었다.
“벌써부터 저와의 2세를 생각하는 겁니까?”
발레린은 당황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저는…….”
“그럼 2세는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겁니까?”
“그것도 아닌데…….”
발레린은 당황하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제르딘은 피식 웃더니 발레린에게 그릇을 더 갖다 주었다. 그러다 그는 그릇을 만져 보더니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식었네요. 제가 곧바로 음식을 다시 데우도록…….”
“아니요. 먹을게요!”
발레린은 포크를 쥐고서 이것저것 입 안에 집어넣었다. 얼굴이 벌게져서 다른 것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제르딘은 음식을 먹지 않고 발레린을 보기만 했다. 그의 얼굴에는 은근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그릇을 슬쩍 보고는 말했다.
“왕자님은 안 드시나요?”
그제야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는 확실히 왕족답게 칼질도 우아했다. 별것 없는 동작이었지만 품위가 느껴질 정도였다.
심지어 피가 뚝뚝 흐르는데도 그걸 먹는 모습에는 야만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소스를 입힌 고기를 먹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발레린이 멍하니 관찰하자 제르딘이 문득 말했다.
“앞으로는 이런 음식은 안 먹는 게 낫겠습니까?”
발레린이 의아해하며 보자 제르딘이 그릇에 있는 고기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보는데 안 좋을 수 있으니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괜히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정말 괜찮은 겁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이 개구리를 먹지 않는 이상 발레린은 그의 식습관을 존중했다. 심지어 발레린은 제르딘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그동안 날고기 같은 음식을 먹어야 했을 텐데 괜히 제게 불쾌한 기억을 줄까 싶어서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었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럼 왕자님은 원래 이렇게 음식을 드셨나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꽤 많이 먹는 겁니다. 원래는 육포 몇 개만 먹으면 배고픔은 해결되거든요.”
“그렇게 드셔도 되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먹어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럼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셨나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발레린은 제르딘의 식습관이 신기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울린 소리에 발레린은 잠시 멈칫했으나 제르딘은 이미 이 시간에 사람이 올 것을 알고 있었는지 차분히 말했다.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제르딘은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탁자를 떠나기 전에 문득 말했다.
“참고로 내일 루티스 백작은 재판 결과를 받고 죗값을 치르게 될 겁니다.”
발레린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에 대해선 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제르딘은 잠시 발레린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더 할 말은 없으십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사를 하고 침실을 나갔다. 발레린은 닫힌 문을 잠시 보다가 곧바로 그로프를 보았다.
발레린의 눈은 절로 커졌다.
“그로프, 이거 꿈 아니지?”
“아까 분명 주인님의 팔이 느껴졌으니 꿈은 아닙니다.”
발레린은 탁자에서 곧바로 일어나서 침대로 몸을 던졌다. 침대가 발레린의 몸을 둥실둥실 띄워 주었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그로프에게 말했다.
“왕자님이 나를 좋아하다니! 이게 믿어져?”
“저는 당연한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주인님 정도면 왕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테니까요.”
“고마워, 그로프. 그래도 왕자님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난 정말 좋아!”
발레린은 마음속이 벅차올라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활기차게 외쳤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하인과 함께 루네스가 들어왔다. 루네스는 탁자에 남아 있는 음식을 보다가 침대에 누워 있는 발레린을 보고는 서둘러 다가왔다.
“왕자비님,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건가요?”
“아니, 왜?”
“평소와 다르게 음식을 많이 남기셔서요.”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래.”
그 말에 루네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에요. 저는 왕자비님이 혹시라도 몸이 안 좋으신가 싶어서 걱정했거든요. 점심에도 기운이 없으셨잖아요.”
“루네스, 난 이제 괜찮아.”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지금 해인저 모녀가 살아 돌아와 탑에 갇히게 해도 발레린은 웃으며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지금 일은 발레린이 살면서 어쩌면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추억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순간이었다.
발레린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이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나저나 음식은 더 안 드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