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물론 제르딘이 직접 청혼서에 인장을 찍은 것은 아니지만 언제든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제르딘은 발레린 같은 사람을 원하지 않으니까.
발레린은 이젠 뻔한 사실에 더 생각하지 않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와 다르게 발레린의 걸음은 한결 힘이 빠져 느릿하기만 했다.
발레린은 저녁이 될 때까지 벽에 걸린 보랏빛 드레스를 보았다. 그로프도 발레린과 같이 보며 개꿀개굴 울다가 이내 지친 듯 발레린을 관찰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들어와.”
그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곧바로 루네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발레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왕자님?”
그것도 여러 하인과 함께였다. 하인들은 제르딘이 고갯짓을 하자 서둘러 탁자에 식기를 놓았다. 마침내 식기를 모두 놓자 그들은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갔다.
제르딘은 곧장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발레린은 사실 지금 배가 고팠다. 하지만 점심에는 정말로 먹을 생각이 없었기에 차분히 말했다.
“생각이 없어서요.”
“그래도 저녁은 드세요. 제가 그때 했던 말은…….”
발레린은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하늘빛 눈동자가 발레린을 세심히 보고 있었다. 발레린은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제게 더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제르딘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금 물러나서 식탁을 가리켰다.
“저녁은 같이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같이요?”
“네, 공녀도 이 자리를 피하기도 했고 저도 그동안 바빴으니 이번만은 같이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발레린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동안 발레린이 식사 자리에 핑계를 대며 같이 안 한 것을 제르딘이 피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니 당황스럽기도 했다. 물론 배가 고프긴 했지만 아무래도 제르딘과 같이 앉아서 음식을 먹기가 껄끄러웠다.
발레린이 가만히 있자 제르딘이 발레린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혹시 이 자리가 불편한 겁니까?”
너무나 마음을 콕 찌르는 말에 발레린은 당황하며 외쳤다.
“아니요.”
“그럼 저와 같이 먹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그때 공녀가 제 식사 자리를 거절했을 때 서운했습니다.”
발레린은 놀란 눈으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서운하셨다고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괜히 미안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잔뜩 뻗친 머리가 등 뒤로 흔들렸다. 발레린은 뻗친 머리를 빠르게 손으로 정리하곤 탁자 앞에 앉았다.
제르딘은 천천히 의자에 앉아서 포크를 잡았다. 그의 그릇에는 피가 줄줄 흐르는 생고기가 있었다.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르딘이 차분히 말했다.
“제가 주로 먹는 음식입니다.”
“그럼 여태껏 이렇게 음식을 먹은 건가요?”
“원래는 이렇게 많이 먹지 않는데 오랜만에 준비하라고 시켰습니다.”
“왜요?”
제르딘이 천천히 눈을 맞추었다. 발레린은 묘한 기분이 물씬 들어 눈을 깜빡였다. 제르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동안 하지 못한 제대로 된 식사를 같이하고 싶어서요.”
제르딘은 발레린의 잔에 와인을 부어 주었다. 발레린은 새삼스럽게 와인 잔을 잡고는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천천히 와인 병을 내려놓고는 발레린을 보았다.
발레린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차마 포크를 쥐지 못하고 있자 제르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다른 음식을 준비하라고 할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조금이라도 드세요.”
제르딘은 발레린에게 직접 포크를 주었다. 발레린은 마지못해 포크를 잡고서 물었다.
“혹시 오늘 무슨 날인가요?”
“아니요.”
“그럼 갑자기 왜…….”
“제가 아무래도 낮에 공녀에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서요.”
“…….”
“생각해 보니 제가 공녀에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공녀도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한 걸 테니까요.”
발레린은 그나마 제르딘이 그 사실을 알아주니 고마웠다.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헬릭스를 만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헬릭스 님이요?”
“어차피 배도스 공작의 아들이고 공녀가 굳이 헬릭스를 만날 이유는 없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헬릭스 님은 그렇게까지 위험하신 분은 아니에요. 오히려 생각보다 마음이 여린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여리다고요?”
발레린은 갑자기 울던 헬릭스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키곤 말했다.
“공녀, 헬릭스는 누구보다 사람을 가볍게 만나고 귀족 회의에 툭하면 오지 않을 만큼 불성실한 사람입니다. 거기다 무식하기도 하고요.”
발레린은 이미 알던 사실이었다. 주변에서 듣기도 했고 보기도 했다.
사실 발레린은 제르딘의 지나친 경계에 살짝 부담이 되기도 했다. 거기다 계속되는 제르딘의 걱정에 발레린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왕자님, 제가 탑에 오래 있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에 대해 잘 모르진 않아요. 저도 나름대로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어요.”
“…….”
“물론 절 걱정해서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은 알지만 어쨌든 그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발레린은 살짝 제르딘을 보았다. 그는 말없이 발레린을 바라볼 뿐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은 화가 난 듯 어두웠다.
“제가 여태껏 공녀를 걱정한 게 과하다는 말입니까?”
“과하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괜히 저 때문에 왕자님께서 신경 쓰실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마치고서 발레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말해야 할 것 같아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전 이제 왕자님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려고요.”
“정리한다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굳은 얼굴로 발레린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묘하게 일렁였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살짝 쳐다봤다. 그로프는 귀뚜라미를 먹다 말고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주인님, 저는 늘 주인님의 곁에 있겠습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왕자님을 좋아하면서 많이 지치기도 했어요. 제가 너무 기대를 많이 한 탓이겠죠. 어쨌든 저도 이쯤에서 그만하려고요.”
“…….”
“물론 전 배도스 공작이 몰락할 때까지 왕자님을 지지할 거예요! 그리고 왕자님이 왕이 되는 모습을 꼭 보고 싶기도 하고요.”
발레린은 빙긋 웃었다.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는 자신이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아직 제르딘에 대한 감정은 완전히 정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발레린은 이 정도면 마음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때 제르딘이 차분히 물었다.
“제가 공녀를 많이 지치게 한 겁니까?”
그의 눈빛은 묘했다. 은근히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감정을 꾹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발레린은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그래도 이미 한번 꺼낸 말이니 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왕자님께서 저를 지치게 한 게 아니라 제 스스로 지친 거예요. 왕자님은 아무 잘못 없으세요.”
원래 그랬다. 발레린은 혼자서 제르딘을 일방적으로 좋아했다. 분명 제르딘은 처음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을 줄 수 없다고 했는데도.
“그게 그 말 아닙니까?”
“아니에요. 어차피 저 혼자서 왕자님을 좋아한 거잖아요.”
“…….”
“그리고 왕자님은 여전히 훌륭하세요. 지금도 잘 헤쳐 나가고 계시잖아요.”
발레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전 왕자님이 이렇게까지 다 알고 계실 줄 몰랐어요. 그래서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모두 공녀 덕분입니다.”
발레린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왕자님이 상황을 잘 이용하시니 잘되는 거겠죠.”
“아니요. 공녀가 아니었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배도스 공작을 누르진 못했을 겁니다. 처음에 공녀가 숨겨 둔 독을 찾아 주었고 그 후부터 제가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요.”
그때 그로프가 작게 속삭였다.
“지금은 왕자의 말이 맞습니다. 주인님 아니었으면 왕자가 이렇게까지 세력을 가지진 못했을 겁니다.”
발레린이 차마 말을 못 하는 사이 제르딘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공녀가 이 왕궁에 들어온 이후로 저도 바뀌긴 했습니다.”
“…….”
“물론 좋은 방향으로요.”
“다행이네요. 저 때문에 왕자님께서 괜히 힘드신 게 아닌가 했거든요. 그리고 제가 너무 이기적으로 왕자님을 좋아하지 않았나 걱정이 되기도 했고요.”
제르딘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발레린은 괜히 마음이 안 좋아 고개를 숙여 앞에 있는 음식을 보았다. 그래도 음식은 꽤 푸짐하고 맛있어 보였다.
발레린이 무의식적으로 고기를 집으려고 할 때였다.
“이기적으로 좋아해도 됩니다. 아니, 이기적으로 좋아해 주세요.”
발레린은 순간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기다 제르딘의 말에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발레린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보고 있자 제르딘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랫동안 생각해 본 것도 처음이고 그 누군가를 위해서 저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도 처음입니다.”
“…….”
“물론 처음에는 의심하고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럴수록 더 생각이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