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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16화 (116/130)

16669812291843.jpg116화

발레린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 헬릭스가 말했다.

“뒤로 넘어갈 때도 저는 공녀님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오히려 공녀님 덕분에 살 수 있었고 이후부터 공녀님이 계속 생각났죠. 원체 공녀님의 존재가 자극적이기도 하고 특이했으니까요.”

헬릭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색한 손은 잠시 가슴에 머물다가 내려갔다. 그사이 그의 귀는 어느덧 벌겋게 달아올랐다.

발레린이 흥미롭게 쳐다보자 헬릭스가 넌지시 물었다.

“공녀님도 이런 짝사랑을 하는 겁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발레린이 놀라자 헬릭스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르딘은 성격이 차가워서 누구를 사랑할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왕자님은 누구보다 친절하시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에요.”

“그나마 공녀님께는 그렇게 한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안 그런다면 정말 화날 뻔했거든요.”

어느새 헬릭스의 얼굴은 잔뜩 굳었다. 그러나 그는 발레린을 보며 서서히 표정을 풀었다. 어느새 그의 눈에는 옅은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괜히 걱정이 되어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헬릭스 님?”

“전 괜찮습니다.”

그러나 헬릭스는 갑자기 감정에 복받친 듯 눈물을 흘렀다.

“아니, 안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헬릭스는 고개를 숙인 채 울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여태껏 자신의 앞에서 사람이 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발레린은 책에서 언뜻 본 사람을 위로해 주는 법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헬릭스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헬릭스의 등을 토닥이기 직전이었다.

“공녀.”

뜻밖의 목소리에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왕자님!”

발레린은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어서 반가워 소리쳤지만 제르딘의 얼굴은 어딘가 묘하게 화가 난 듯 보였다. 발레린이 의아하게 보는 사이 제르딘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울고 있는 헬릭스에게 말했다.

“꺼지지?”

발레린은 깜짝 놀라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차가운 눈초리로 헬릭스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발레린은 당황스러워 헬릭스 앞을 막았다.

“왕자님, 지금 헬릭스 님은 많이 슬프세요. 그런데 그런 말은…….”

그때 헬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덕지덕지 붙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공녀님, 괜찮습니다. 원래 제르딘이 저렇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제 감정도 없는 사람입니다.”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헬릭스, 내가 두 번 말하는 거 안 좋아하는 걸 알 텐데.”

발레린은 지나치게 적대적인 제르딘의 태도에 당황하며 헬릭스를 쳐다봤다. 헬릭스는 그나마 마음을 다잡았는지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쉰 뒤 발레린을 보며 고개를 숙이고는 감옥 쪽으로 걸어갔다.

발레린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헬릭스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때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도 나지막이 속삭였다.

“전에는 멍청해 보였는데 지금은 꽤 짠해 보입니다.”

“그러게. 그러고 보면 나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단지 헬릭스는 그저 감정에 솔직했을 뿐이었다. 물론 여러 여자에게 집적거린 건 이해할 수 없는 태도이긴 했지만.

그때 유난히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헬릭스와 무슨 일로 만난 겁니까?”

“무슨 일로 만난 건 아닌데 우연히 마주쳤어요.”

“우연히요?”

“네.”

제르딘은 발레린을 빤히 바라봤다. 잔뜩 굳은 얼굴이었지만 묘하게 날카로워보였다.

“우연이 잦은 것 같은데 제 착각입니까?”

“정말 우연히 만난 건데…….”

발레린은 조금 억울했다. 물론 제르딘은 헬릭스가 위험하다고 걱정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발레린은 이 상황에선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발레린의 표정이 좋지 않자 제르딘이 차분히 말했다.

“아무리 우연이라도 제가 헬릭스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까보다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발레린은 더는 숨길 수 없어서 말했다.

“헬릭스 님은 왕자님이 위험하다고 했어요.”

“…….”

“헬릭스 님이 늦은 밤에 찾아온 것도 배도스 공작이 왕자님을 해하려 한다고 제게 말해 주기 위해서였어요.”

“왜 진작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까?”

“배도스 공작은 뒤통수를 맞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헬릭스 님이 말해 줬어요. 오히려 왕자님께서 나서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요.”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미 배도스 공작은 뒤통수 맞을 일도 없습니다. 여태껏 독살을 했다는 증거는 모두 모아 뒀으니까요.”

“모아 뒀다고요?”

“서류나 물건 같은 증거는 없앴지만 그 일을 한 사람은 없애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왕궁에서 일을 하고 있었죠. 그래서 그 사람들을 통해 배도스 공작이 그동안 제 주변에 한 짓거리를 알리려고 합니다.”

이미 제르딘은 배도스 공작에 대한 것을 모두 준비한 듯했다. 그래도 발레린은 혹시나 제르딘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루티스 백작님을 만나고 왔는데…….”

“공녀.”

동시에 나간 말이었다. 제르딘은 먼저 발레린에게 양보했다.

“먼저 이야기하세요.”

발레린은 아까보다는 차분하게 말했다.

“루티스 백작님이 모두 말씀해 주셨어요. 그동안 배도스 공작님의 명령을 받고 움직였고 왕자님의 청혼서도 배도스 공작님의 명령을 받아서 왕자님의 인장을 복사해서 인장을 찍었다고요. 그리고…….”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요?”

“제 인장 반지를 복사해서 배도스 공작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도 왕위 계승자의 권력을 함부로 이용한 죄를 물으려고 하고요.”

제르딘이 다 알고 있다고 하니 발레린은 기대가 식는 기분이었지만 아까 맡은 독 냄새를 생각하며 기운을 차렸다.

“그럼 감옥의 요리사가 여태껏 배도스 공작님의 명령을 받은 것도 아세요? 마침 루티스 백작님이 먹는 음식에 독이 있었거든요.”

“요리사 라플린 말하는 겁니까?”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알고 있다고.”

새삼 발레린은 제르딘의 정보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니 발레린은 허무한 기분마저 느꼈다. 그러다 발레린은 루티스 백작이 사과한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루티스 백작님이 왕자님께 사과하셨어요. 그분은 배도스 공작님과 함께 있다 보면 어떤 위치인지 잊기도 한다면서 죄송하다고 했어요.”

“루티스 백작이 그런 말을 했습니까?”

“네.”

“신기한 일이네요. 루티스 백작이 그런 사과까지 하다니.”

발레린은 빙긋 웃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은 잠시 보다가 문득 말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내내 제 머릿속에 거슬리는 게 있는데.”

“뭔데요?”

“아까 헬릭스는 왜 운 겁니까?”

“제가 헬릭스 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울었어요.”

제르딘이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꼴좋군요.”

“네?”

“헬릭스야말로 제 풀에 넘어진 겁니다. 늘 여자를 쉽게 대하다가 이제야 제대로 역풍을 맞는 거죠.”

제르딘은 아까보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다 아까 일을 꼼꼼히 되씹는 건지 차분히 물었다.

“그나저나 아까 공녀는 헬릭스와 무척 가까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위로라도 해 주려고 그런 겁니까?”

“제 앞에서 사람이 우는 건 난생처음이었어요. 그래서 등이라도…….”

제르딘의 눈썹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럴 땐 그냥 피하세요. 괜히 그렇게 해 봤자 헬릭스는 멍청해서 제대로 알아먹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헬릭스 님은 제게 꽤 도움 되는 분이셨어요.”

제르딘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도움이요?”

“네, 적어도 헬릭스 님은 배도스 공작이 어떻게 행동할 건지 제가 말해 준 분이기도 하고 어제도 왕자님께 배도스 공작이 해를 가할 것 같다고 직접 와서 말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공녀, 제가 이 한 몸 제대로 못 지킬 것 같습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요즘 왕자님께서 바쁘시고…….”

제르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바쁘긴 해도 혼자서 제 몸을 지킬 수 있습니다. 굳이 헬릭스에게 도움을 받지 않아도.”

발레린은 멍하니 제르딘을 쳐다봤다. 발레린이 굳은 얼굴로 보자 제르딘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까 한 말은 정정하겠습니다. 어쨌든 공녀가 제 걱정을 해 주는 건 고맙지만…….”

“아니에요. 왕자님, 제가 또 왕자님을 피곤하게 만든 것 같아요. 전 이만 가 볼게요.”

발레린은 빠르게 고개를 숙이곤 그곳을 벗어났다. 어깨 위에서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왕자는 왜 저렇게 날을 세우면서 말하는 겁니까?”

발레린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제르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하는 일마다 제르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발레린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살짝 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어쨌든 이 궁에서 하루빨리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마음이 안 좋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에게 도움이 안 된다면 차라리 왕궁을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음 한쪽에서는 제르딘이 왕이 되는 것을 보고 가고 싶었지만 그때까지 발레린이 설 자리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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