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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15화 (115/130)

1666981225593.jpg115화

“내 생각에는 플린 독과 틱시를 섞은 것 같아.”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오랜만에 독 냄새를 맡으니 좋네요.”

발레린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왕자비님, 정말 독인가요?”

“분명해. 여기에 독이 들었어.”

발레린은 기사에게 식판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독이 들었으니 조사관에게 말해서 분석하라고 해 줘. 그리고 이 식판을 준비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냥 식당에서 주는 식판을 받은 터라…….”

그때 루티스 백작이 말했다.

“배도스 공작님이 한 짓일 겁니다. 정확히는 감옥에서 일하는 라플린이라는 요리사가 한 짓이겠죠.”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돌아보자 루티스 백작이 말을 이었다.

“라플린은 예전에 헤르틴 하녀장의 음식에 독을 넣었던 사람입니다. 배도스 공작의 사람이고요.”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철장으로 다가갔다.

“역시 배도스 공작님의 최측근다우세요! 감사합니다.”

“뭘요, 하마터면 제가 죽을 뻔했으니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루티스 백작은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어딘가 가벼워 보였다. 그때 루티스 백작이 발레린을 보며 말했다.

“어쨌든 이렇게 제 말을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확실히 이렇게 말이라도 하고 나니까 아까 화를 냈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새로 태어난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웃으면서 남에게 침 뱉는 법』을 본 보람이 있었다. 루티스 백작도 이제야 잘못을 깨닫는 것을 보니 뿌듯할 정도였다.

“그럼 백작님, 전 가 볼게요.”

“여기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 이렇게 기회를 준 것도요.”

루티스 백작은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빙긋 웃고는 몸을 돌려 곰팡이 냄새가 나는 복도를 지났다. 루네스는 감탄하듯 내뱉었다.

“왕자비님, 역시 대단하세요. 이렇게 루티스 백작이 단숨에 말할 줄은 몰랐어요. 지금은 배도스 공작에 대해서 다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거기다 루티스 백작을 완전히 새사람으로 만드신 거잖아요.”

발레린은 기쁜 미소를 지으며 활기차게 걸었다.

“난 책에서 본 대로 한 것밖에 없는걸. 그리고 왕자님께 유리하도록 도와야 했고.”

“왕자비님이 힘쓰신 만큼 왕자님께 유리하게 작용될 거예요. 루티스 백작까지 다 밝혔으니 배도스 공작 재판도 조만간 열릴 것 같고요.”

그때 부드러운 바람이 살결을 스쳐갔다. 어느덧 감옥 밖이었다. 환한 햇살은 발레린을 따뜻하게 비춰 주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왕궁으로 걸어갔다.

19. 지독한 질투

발레린은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아까보다는 빠른 걸음이었다. 루네스는 발레린을 따라오며 말했다.

“왕자비님, 갑자기 서두르는 이유가 있으세요?”

“왕자님께 내가 들은 말을 빨리 알려 주고 싶어서.”

당장 내일 루티스 백작이 벌을 받는 날이었고 제르딘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이제 루티스 백작이 모두 자백했으니 배도스 공작에 대한 증거는 더 찾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만약 이 사건으로 제르딘의 일이 줄어든다면 발레린은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발레린이 정원을 가로질러서 가던 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발레린은 문득 멈춰 섰다.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중얼거렸다.

“어딘가 익숙합니다.”

“왕자님은 아닌 것 같은데…….”

발레린이 여러 가지 생각하며 보는 사이 루네스가 옆에 섰다.

“헬릭스 님 아닐까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 사람이 더욱 가까워졌다. 발레린은 이제야 누군지 자세히 보였다. 루네스의 말대로 헬릭스였다.

“루네스, 어떻게 안 거야?”

“헬릭스 님은 이 왕궁에서 유명하거든요.”

“왜?”

루네스는 다가오는 헬릭스를 힐끔 봤다가 발레린에게 속삭였다.

“저 같은 하녀에게 무척이나 집적거리는 분이에요. 요즘은 안 그러는데 전에는 헬릭스 님을 마주치면 무조건 피하라고 조언 들었거든요.”

발레린은 웃으며 다가오는 헬릭스를 슬쩍 쳐다봤다. 그는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다. 발레린도 손을 흔들어 주다가 루네스를 보았다.

“루네스, 그럼 먼저 왕자님의 궁에 가 있을래?”

“괜찮으시겠어요?”

“마침 나도 헬릭스 님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때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루네스는 그로프를 잠시 보다가 이내 물러났다.

“그럼 왕자비님, 전 먼저 가 볼게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는 고개를 숙이곤 먼저 떠났다. 헬릭스는 루네스를 보자마자 웃으며 인사했지만 루네스는 그저 간단히 고개만 숙이곤 빠르게 사라졌다.

헬릭스는 개의치 않고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공녀, 여기서 만나네요.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에는 하인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들을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안심하던 찰나였다.

“감옥에 다녀오시는 겁니까?”

헬릭스는 발레린의 뒤를 힐끔 보았다.

“네, 루티스 백작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마침 저도 있었는데.”

“헬릭스 님도요?”

“루티스 백작님은 그래도 아버지 다음으로 절 돌봐 주셨던 분이거든요. 지금은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함정에 빠지긴 했지만.”

헬릭스는 씁쓸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발레린의 얼굴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루티스 백작님은 많이 알던 사람 외에는 이야기를 잘 해 주지 않는데. 괜찮으셨습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이야기까지 해 주면서 그동안 했던 일을 모두 밝히셨어요.”

헬릭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티스 백작님이 그런 소리를 했다고요?”

“네.”

헬릭스는 믿기지 않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가 발레린을 뚫어지게 보았다. 발레린은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배도스 공작님은 어때요? 그때 왕자님을 해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요즘 아버지는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겔렌트 남작이 조금 수상해요.”

“겔렌트 남작이요?”

“네, 그분은 원래 저희 저택에 방문하지 않던 분인데 방문도 잦고 아버지가 없는 집무실에 들어가서 한참 있다가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럼 그분이 무슨 일을 꾸미는 건가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인들 말로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왔다고 하던데 모르죠.”

발레린이 잠시 말없이 있는 사이 헬릭스가 말했다.

“어쨌든 아버지는 왕자가 많이 두려울 겁니다. 왕자가 옛날 기록까지 뒤져서 아버지의 흠을 제대로 잡으려고 하거든요.”

“…….”

“전 왕자가 이렇게까지 집요할 줄 몰랐습니다. 마치 이때를 기다린 것처럼 행동하니까 당황스럽기도 하고요.”

“그동안 왕자님은 배도스 공작님에게 많이 당해 왔으니까요.”

비록 발레린은 제르딘 옆에 오래 있지는 않았으나 그 짧은 시간에도 배도스 공작이 어떻게 제르딘을 괴롭혀 왔는지 잘 보였다. 여태껏 제르딘이 미치지 않은 게 가상할 정도였다.

그때 헬릭스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공녀님은 왕자를 좋아하는 거죠?”

발레린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제게 줄 관심도 없고요?”

“죄송해요. 헬릭스 님. 이미 전 왕자님을 보자마자 반했거든요.”

헬릭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진작 아버지를 말리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발레린이 의아하게 보자 헬릭스가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진작 아버지를 말렸다면 제르딘은 이미 왕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면 굳이 공녀님을 왕자비로 맞이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고요.”

헬릭스는 발레린의 얼굴을 살폈다. 발레린은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헬릭스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기도 했고 제르딘을 탑에서 만나지 않았다는 가정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헬릭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그게 가장 아쉽습니다. 그런 탑 안에 공녀님이 있는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물론 소문은 들었지만 찾아갈 생각도 하지 않았죠.”

“…….”

“어쨌든 제르딘이 공녀님을 먼저 본 건 정말이지 무덤에 가서도 벌떡 일어날 일입니다.”

발레린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물론 헬릭스가 여자만 보면 좋다고 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잠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헬릭스는 고개를 숙인 채 땅을 보고 있었다. 거기다 헬릭스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발레린은 눅눅한 분위기를 벗기고 싶어 한마디 했다.

“헬릭스 님, 저 말고 다른 좋은 분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헬릭스가 입술을 짓씹었다.

“아니요. 공녀 같은 분은 없습니다. 저도 공녀를 처음 보자마자 반했습니다.”

“…….”

“그때 아주 강렬해서 기억이 남습니다. 공녀는 방독면을 쓰고 있었고 저를 보는 눈빛이 무척이나 또렷해서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런 눈빛은 어디에도 보지 못했거든요.”

그때 그로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주인님, 그럼 그때 저 사람이 멍청하게 웃었던 건 이미 반한 웃음이었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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