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왕자님께서 지시해서 배도스 공작님이 청혼서를 받아들였다고요.”
“그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잖아요.”
발레린은 분명히 보았다. 이름 모를 왕국의 공주와의 청혼서에 제르딘의 인장이 찍혀 있는 걸.
“아닙니다. 그건 배도스 공작님이 왕자님의 인장 반지를 복사해서 가지고 있다가 찍은 겁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깜짝 놀라 루티스 백작을 쳐다봤다.
“그게 사실인가요?”
“네, 그걸 복사한 것도 저였습니다. 그리고 그 인장을 찍은 것도 저고요.”
“그럼 배도스 공작이 다 시킨 일인가요?”
루티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하던 일은 대개 그렇습니다. 혹시 모를 증거를 없애기 위해 배도스 공작님은 말로만 명령을 하고 모든 일은 제가 다 하는 거죠.”
발레린은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태껏 제르딘이 그런 것인 줄 알고서 완전히 기대를 접고서 더 생각하지 않았다. 뜻밖의 사실에 얼떨떨했지만 발레린은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제르딘이 직접 인장을 찍지 않았다고 해도 제르딘과 이어질 확률은 없었다.
‘어차피 왕자님은 처음부터 나와 아이를 원하지 않았는데.’
거기다 제르딘의 그런 생각에는 유전적인 영향도 있었기에 발레린은 영 가망이 없었다. 어두운 생각이 점점 스며들던 찰나 루티스 백작이 말했다.
“어쨌든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게 다입니다. 겔렌트 남작이 증거로 제출한 것 외에도 말입니다.”
루티스 백작은 발레린을 쳐다보았다. 발레린이 앉아 있기에 눈높이가 바로 맞았다. 그는 익숙함을 느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왕자의 선택이 맞았습니다. 배도스 공작님은 너무 오만했던 거고요.”
발레린이 가만히 지켜보자 루티스 백작이 쉬지도 않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배도스 공작님은 맞지 않는 자리에 너무 집착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결국 그 자리는 왕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 앉아야 하는 자리인데.”
“그럼 왕자님이 왕의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말이죠?”
발레린이 잔뜩 기대하며 묻자 루티스 백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겁니까?”
그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하지만 발레린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루티스 백작을 쳐다봤다.
“결국 그 자리는 왕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 앉아야 하는 자리라고 말씀하셨어요. 배도스 공작은 오만했다고요.”
그 말에 결국 루티스 백작은 손을 아래로 내렸다.
“이런 말까지 할 생각이 없었는데…….”
루티스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왕자가 왕자비님을 잘 들인 건 분명합니다. 여태껏 왕궁에서 왕자비님 같은 분은 뵙지 못했으니까요.”
“왕자님도 같은 말을 했어요.”
발레린은 그 말이 칭찬 같기에 더욱 기분이 좋았다. 루티스 백작은 발레린의 웃는 얼굴을 한참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대단합니다. 아까부터 제가 무시를 했는데도, 자존심도 상할 만한데 오히려 아무렇지 않아 하니…….”
“원래 무시는 항상 받아 왔어요. 오히려 이런 대접은 제가 탑 안에 살 때보다 훨씬 좋은걸요. 루티스 백작님은 적어도 제게 반말은 하지 않았잖아요.”
“그럼 탑에 있을 때 하인들이 반말이라도 한 겁니까?”
“네, 심지어 르네윈도 제게 반말했어요. 물론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발레린은 미소를 지었다. 과거를 생각하면 슬프기는커녕 오히려 그리운 추억이었다. 탑 안에서 지낼 땐 그래도 발레린에겐 즐거운 기억이 꽤 많았다.
루티스 백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다 견뎌 내신 겁니까?”
“많이 힘들 땐 고생한 만큼 나중에는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희망을 가졌어요. 어머니 말씀을 기억하면서요. 그러니까 정말 그런 일이 생기더라고요!”
“…….”
“그리고 탑 안에서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에요. 힘든 만큼 좋은 일도 생기고요.”
발레린은 빙긋 웃었다.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다가 루티스 백작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그로프와 책 덕분에 탑 안의 생활이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루티스 백작은 발레린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보다는 짜증과 예민함이 많이 없어진 얼굴이었다.
발레린이 가만히 바라보자 루티스 백작이 말했다.
“헬릭스 공자님이 왜 그렇게 왕자비님을 좋아했는지 잘 알 것 같습니다.”
“원래 헬릭스 님은 여자를 많이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긴 하지만 대개 그런 관심은 일시적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이해하지도 못하는 책을 들고 다니고 안경을 쓰고 다니지는 않았다는 거죠.”
“하지만 헬릭스 님은 제 취향은 아니에요. 저는 왕자님을 좋아하거든요.”
루티스 백작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도 왕자비님이 왕자님을 좋아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헬릭스 님은 왕자님보다 똑똑한 분은 아니니까요.”
꽤 맞는 말에 발레린은 잠시 동안 루티스 백작을 관찰했다. 그는 이제 완전히 해진 옷에 머리도 엉망이었다. 이전에 루티스 백작을 봤더라면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궁색한 차림이었다.
발레린은 아까 억울하듯이 말한 루티스 백작이 떠올랐다. 지금도 똑같이 억울할지 궁금했다.
“억울하지는 않으세요?”
“뭘 말입니까?”
“어쨌든 모든 일은 배도스 공작이 저질렀고 겔렌트 남작은 빠졌잖아요.”
루티스 백작이 웃었다.
“어차피 제가 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야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모습에 발레린은 새삼 기뻤다. 발레린이 미소를 지으며 보자 루티스 백작이 잠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나저나 죄송합니다.”
“뭐가요?”
“제가 한 일은 많겠지만 어쨌든 왕자비님을 몰아내려고 했으니까요. 배도스 공작님과 함께 하긴 했지만.”
발레린은 철장 사이로 조금 더 다가가 루티스 백작을 쳐다봤다. 갑자기 다가온 발레린에 루티스 백작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제게 잘못했다고 한 사람 중에서 두 번째네요.”
“무슨 말입니까?”
“저한테 잘못한 사람 중에서 루티스 백작님이 두 번째로 사과했다는 말이에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할게요.”
“뭔가요?”
“왕자님께도 사과해 주세요. 그때 겔렌트 남작과 함께 왕자님에 대해서 모욕적인 말을 했잖아요.”
“…….”
“어떤 말을 한 건지는 기억하시죠?”
“기억합니다. 모두 죄송합니다. 배도스 공작님과 함께 있다 보면 제가 어떤 위치인지 잊기도 합니다. 저는 일개 귀족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 말은 제가 왕자님께 잘 전달해 드릴게요.”
발레린은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루티스 백작은 발레린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바라보았다. 발레린이 의아해하자 루티스 백작이 말했다.
“왕자님이 갑자기 결혼하셔서 말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왕자님께서 많이 생각해 주시는 것 같아서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럼 이전에 결혼을 약속했던 분께 왕자님이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그렇죠. 그분도 배도스 공작님이 독살로 없애신 분입니다.”
“역시 배도스 공작은 어디에도 빠지지 않네요.”
“왕자님과 관련된 모든 일에는 배도스 공작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땐 왕자님이 이렇게까지 감정적이지도 않았고요.”
“감정적이지 않았다고요?”
루티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왕자님이 특별히 한 일은 장례식을 크게 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분도 결혼 약속만 했을 뿐 자주 만나지도 않았고요.”
“…….”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다릅니다. 특히 왕자비님이 독살 미수 사건 때문에 병실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때 왕자님은 왕정 회의까지 취소했거든요.”
“취소까지 했다고요?”
“네, 그러셨습니다. 원래 귀족 회의면 모를까 왕정 회의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왕자님이 꼭 참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늘 의사가 왕자님 주변에 있었죠.”
“혹시 왕자님 몸이 아프신가요?”
“아니요. 저도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의사가 왕자비님의 병실을 책임지는 의사였으니 왕자비님의 상태를 듣기 위해서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옆에 있던 루네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원래 왕자님께서는 그렇게까지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왕자비님께는 항상 배려하시고 친절하게 대하셨어요. 무척 신경을 많이 쓰시기도 하고요.”
발레린은 갑자기 쏟아지는 말들에 머릿속이 잠시 복잡했다. 그러나 결론은 늘 하나였다. 제르딘은 평범한 사람과의 아이를 원했다. 결국 발레린과 가족을 만들 수 없었다.
그때 난데없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 기사 한 명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낡은 식판이 들려 있었다.
그때 묘한 냄새가 발레린의 코를 찔렀다. 톡 쏘면서도 상큼한 과일 냄새.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독 냄새!”
기사는 깜짝 놀라며 말을 더듬거렸다.
“도, 독 냄새라고요?”
발레린은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기사가 들고 있는 식판을 가져와서 가까이 맡아 보았다. 발레린의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도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주인님은 훌륭하십니다. 독 냄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