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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13화 (113/130)

113화

‘역시 기다리는 자에겐 복이 있구나.’

발레린은 싱긋 웃으며 루티스 백작을 쳐다봤다. 루티스 백작은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되는 발레린의 시선에 지쳤는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루티스 백작님이 겔렌트 남작님과 함께 왕자님을 모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배도스 공작님이 저를 내쫓고 죽이려는 계략을 꾸민 것까지 모두 들었어요.”

너무나 자극적인 이야기라 그들의 이야기는 발레린의 머릿속에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루티스 백작은 대답하지 못하고 넋을 놓은 채 바라봤다. 발레린은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배도스 공작과 얽힌 일을 모두 밝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루티스 백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와 무관한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똑똑히 들었는걸요.”

“…….”

“거기다 겔렌트 남작님까지 얽힌 일이라 굳이 지금 배도스 공작님을 감싸 준다고 해도 배도스 공작님에게 가는 죄는 똑같을 거예요. 제가 말하면 되니까.”

잠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발레린은 루티스 백작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루티스 백작은 고개를 푹 숙였다가 이내 시선을 들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어차피 왕자는 제가 아니더라도 증거를 찾아낼 겁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겠죠.”

“원하는 대로요?”

“모르셨습니까? 왕자는 원래부터 이런 계획이었던 겁니다.”

“무슨 계획인데요?”

발레린이 끈질기게 묻자 루티스 백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왕자는 배도스 공작님께 얽매인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배도스 공작님의 권력을 조사권을 비롯해서 인사권까지 가져갔죠.”

“그래서요?”

“그동안 배도스 공작님께 쉽게 내주는 척하고 방관하며 모든 증거가 난무하게 만든 뒤에 이젠 그걸 거둬들여서 아예 싹을 잘라 버리려는 속셈이었던 겁니다.”

“그럼 왕자님이 일부러 배도스 공작에게 당하는 척했던 건가요?”

“네, 제가 여기 와 있으니 더 잘 와닿습니다.”

발레린이 뚫어지게 쳐다보자 루티스 백작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왕자 곁에 있었으면서 정말 모르셨습니까?”

“네.”

“왕자는 생각보다 교활합니다. 저를 그렇게까지 자극한 것도 왕자가 벌인 일이겠죠.”

“하지만 루티스 백작님은 잘못을 하긴 했잖아요.”

루티스 백작이 날카롭게 쳐다보자 발레린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만약 왕자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루티스 백작님은 배도스 공작님 밑에서 여러 일을 계속 하셨을 거잖아요. 저를 죽이려는 계획도 세우고요.”

“…….”

“그러니까 루티스 백작님은 이곳에 있는 게 합당해요.”

루티스 백작의 눈썹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누가 그걸 모릅니까?”

“그럼 잘 아시는데 왜 억울한 듯이 말하세요?”

발레린이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묻자 루티스 백작이 발끈했다.

“왕자가 저를 일부러 빠뜨린 것처럼 말을 돌려세워서 화가 나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말하게끔 유도했고요!”

그때 그로프가 귓속말을 하듯 속삭였다.

“주인님, 저희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해서 아쉽지만 그래도 루티스 백작의 말을 들어 보면 왕자가 손을 쓴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럼 정말 왕자님이 일부러 말을 흘려서 루티스 백작이 말려들었다는 거야?”

“루티스 백작은 배도스 공작의 일이라면 불같이 달려드니 그걸 이용한 것 아닐까요?”

발레린은 다시 루티스 백작을 쳐다봤다. 그는 굳은 얼굴로 땅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루티스 백작은 항상 배도스 공작 옆에 있었다.

‘정말 왕자님이 다 알고서 그랬던 건가?’

발레린은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지만 어딘가 상황이 묘하긴 했다. 마치 누군가 짠 듯 갑자기 감옥에 있는 루티스 백작과 분열 난 배도스 공작의 상황, 그리고 배도스 공작의 권력을 그대로 가져간 제르딘.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발레린은 제르딘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지금 제르딘이 적당히 상황을 이용하는 것 같아 감탄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역시 왕자님은 천재야.’

발레린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왕자님이 어떻게 유도했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건 왜 묻는 겁니까?”

“왕자님이 훌륭한 일을 어떻게 해냈는지 궁금해서요.”

“지금 저를 놀리는 겁니까?”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저는 정말 궁금해서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까?”

“네, 이건 정말 순수한 궁금증이에요. 심지어 저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서요.”

루티스 백작은 발레린을 잠시 바라보았다. 발레린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미소를 짓자 루티스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차피 공녀도 왕자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말씀드리죠. 왕자가 얼마나 교활하게 저를 이용했는지.”

발레린은 기대하며 가만히 기다렸다.

“전 한 번도 말실수를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물론 배도스 공작님 곁을 지키면서 울컥 화를 낸 적도 있긴 하지만 모두 제 선에서 잘 마무리했었죠.”

루티스 백작은 말을 멈추고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티스 백작은 순간 잘못 걸렸나 싶은 생각이 드는 동시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때는 왕자의 말에 교묘하게 이용당했습니다. 일부러 청혼서에 대한 소문을 꺼내서 저를 발끈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왕자는 모든 걸 알고서 작정하고 저를 이용한 것 같습니다. 여태껏 왕자는 그렇게까지 왕정 회의에 나선 적도 없었는데 그땐 꽤 적극적이었으니까요.”

“그럼 이전에 왕자님은 어떠셨나요?”

“의제에 대해선 알고 있어도 항상 지루한 얼굴로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지켜보기만 했다고요?”

“그렇기도 하고 어쩔 땐 참석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공녀님이 오신 이후로 왕자님이 묘하게 바뀐 것 같긴 합니다.”

“당연하죠. 왕자님은 저와 결혼하면서 세력을 넓히신 거잖아요.”

“그건 알고 계셨군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티스 백작은 발레린을 잠시 봤다. 발레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요?”

“대체 공녀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발레린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왕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발랄한 대답에 루티스 백작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순진한 건지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건지.”

“전 순진하지는 않아요. 그런 척도 아니고 그냥 진심을 말하는 건데 왜 꼬아서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발레린의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붉게 발광했다. 루티스 백작은 떨떠름한 얼굴로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발레린은 활기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제가 백작님의 말을 잘 들어 줬지 않나요?”

“…….”

“여기에 계속 있으면 말할 상대가 필요할 것 같은데. 전 탑 안에 15년 동안 갇혀 있을 때 그로프와 그나마 말을 하면서 지내서 괜찮았거든요.”

“…….”

“원래 루티스 백작님도 말이 많은 분 아니셨나요?”

그때 루티스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왠지 배도스 공작님 옆에 있으면 말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배도스 공작님을 대변해 주려면요.”

루티스 백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긴 했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전 내일이면 재판 결과가 나오고 이곳에 더 못 있습니다.”

“그럼 저에게라도 모두 말하고 가세요. 어차피 루티스 백작님이 말을 안 해도 벌을 받을 거고 말을 해도 벌을 받을 거예요. 그럼 차라리 말을 하고 왕자님께 도움이 되는 게 낫지 않나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어차피 루티스 백작님의 죄는 씻어지지 않으니 차라리 지금에라도 모든 것을 밝히면 왕자님께 도움이 되었다고 역사책에 쓰이지 않겠어요? 그럼 후손들도 그나마 겔렌트 남작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겠죠.”

루티스 백작은 고민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발레린은 가만히 기다렸다. 어차피 바쁜 일도 없었고 딱히 지금은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발레린은 루네스를 쳐다봤다. 루네스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흥미로운지 눈을 빛내며 루티스 백작을 보았다.

그때 그로프가 나직이 속삭였다.

“주인님, 과연 루티스 백작이 입을 열까요?”

“루티스 백작은 배도스 공작만 생각하지, 겔렌트 남작까지 좋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때 루티스 백작이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이 미소를 짓자 루티스 백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공녀님이 이겼습니다. 그래도 제가 겔렌트 남작보다는 나은 사람이니까요.”

발레린은 환하게 웃었다. 루티스 백작은 잠시 뜸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저도 사실은 그렇게 잘 살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백작 작위도 배도스 공작님이 주셨으니까요. 그리고…….”

루티스 백작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줄줄 말했다.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도 배도스 공작에게 시달리기도 했고 배도스 공작이 유일하게 살 수 있도록 돈을 주어서 맹목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발레린은 새로운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롭게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루티스 백작이 고개를 들어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 소문 있지 않습니까?”

“무슨 소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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