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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12화 (112/130)

112화

거기다 냄새도 어딘가 묵은내가 났는데 탑에서 맡았던 냄새와 비슷해서 발레린은 킁킁 세심히 냄새를 맡았다.

그때 루네스가 말했다.

“왕자비님, 불쾌하시면 곧바로 밖으로 안내할게요. 여긴 아무래도 감옥이라서…….”

“아니야. 예전에 내가 탑에서 살 때 이런 냄새가 났었거든. 탑 안에 옛날 물건이 많아서.”

루네스는 잠시 놀란 듯 가만히 있다가 이내 아래로 안내했다. 기다란 계단을 내려오자 그나마 넓은 홀이 나왔다. 문지기는 발레린을 보고서 고개를 숙이곤 곧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그때 수염이 덥수룩한 간수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튀어나왔다.

발레린이 놀라지도 않고 빤히 보자 간수는 오히려 당황한 듯 쳐다봤다. 그러다 그는 발레린의 입술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왕자비님.”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루티스 백작을 만나고 싶어서.”

“루티스 백작님을 왜…….”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간수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왜?”

“루티스 백작님이 있는 곳은 이곳보다 더럽습니다. 그리고 주변 분위기도 좋지 않아서…….”

“괜찮아. 오히려 이런 곳을 실제로 봐서 신기하기만 해.”

발레린이 활짝 웃자 간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는 발레린을 가장 안쪽에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문지기는 그들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곤 문을 열어 주었다.

간수는 끝에 있는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루티스 백작은 저기에 갇혀 있습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자 간수는 놀란 듯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를 했다. 간수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뒤에 물러나자 주변은 어느덧 조용해졌다.

루네스는 주변을 어색하게 훑으며 발레린에게 속삭였다.

“왕자비님, 여긴 범죄자가 있어서 주변 공기가 안 좋은 것 같아요.”

거기다 철창 너머로 쳐다보는 시선이 꽤 많았다. 발레린은 오히려 그들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며 주변을 신기한 듯 훑었다. 그러자 그들은 놀란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먼저 앞서서 걸었다. 루네스는 발레린이 먼저 걸어가자 뒤늦게 따라갔다.

발레린의 어깨 위에서 관망하던 그로프는 나직이 속삭였다.

“주인님, 확실히 이곳은 중범죄자를 수용하는 곳 같습니다. 분위기가 무겁네요.”

“하지만 신기하지 않아? 이런 곳은 책에서만 봤는데 실제로 보니까 정말 색달라.”

“그렇긴 합니다.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긴 하지만.”

그로프는 꺼림칙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간수가 가리킨 방이 가까워졌다. 발레린은 철장 사이를 보았다. 머리가 아무렇게나 헤친 사람이 무릎에 팔을 걸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루티스 백작님?”

발레린이 속삭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발레린을 보자마자 눈썹을 찌푸렸다.

“왕자비님이 여긴 웬일이십니까?”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루티스 백작님이 배도스 공작님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왔어요.”

루티스 백작이 어이없는 듯 웃었다.

“왕자비님, 저는 내일 완전히 죗값을 치릅니다.”

“그럼 다 이야기하고 가는 게 더 좋지 않나요? 루티스 백작님의 죄가 조금은 덜어지는 거잖아요.”

“제가 모든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벌을 받는 게 당연하겠죠.”

“하지만 모두 말하지는 않았잖아요.”

“어차피 겔렌트 남작이 다 제출했으니 그게 다 증거입니다.”

“그럼 더 어이없지 않나요? 분명 겔렌트 남작도 백작님과 같이 일을 저질렀는데 죗값을 받지 않는 거요.”

겔렌트 남작이라는 말에 루티스 백작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발레린은 빙긋 웃고는 철장 앞에 앉았다. 루네스는 깜짝 놀라 발레린의 팔을 잡았다.

“왕자비님, 여기 바닥 엄청 더러워요!”

“아니야, 루네스. 난 지금 명령하러 온 것도 아니니 상대방과 같은 눈높이에서 말하는 게 더 효과적이야.”

루네스가 말없이 바라보자 발레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책에서 봤거든. 그러면 더 대화가 잘 풀린다고. 그리고 한 번쯤 이런 감옥에 앉아 보고 싶었어.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보겠어?”

발레린이 싱긋 웃으며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루네스도 조심스레 발레린 옆에 앉으려 했다. 그때 발레린이 고개를 들어 손을 내저었다.

“루네스, 불편하면 앉지 않아도 돼.”

루네스는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다시 루티스 백작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발레린을 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루티스 백작님과 대화하고 싶어서요.”

“전 말할 게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그럼 루티스 백작님의 재산과 영지는 모두 겔렌트 남작에게 가는 건가요?”

그 말에 루티스 백작의 이마에 빗금이 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겔렌트 남작에게 가다니요?”

“상황을 보면 그렇잖아요. 이제 배도스 공작 옆에는 겔렌트 남작이 있는데 루티스 백작님이 모두 빼앗긴다면 그게 당연히 겔렌트 남작에게 가겠죠.”

“아닙니다. 제 재산은 모두 왕국에 귀속됩니다.”

“하지만 배도스 공작님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을 텐데요. 어차피 그 재산 모두 배도스 공작님께서 준 거잖아요.”

루티스 백작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뭘요?”

“제 재산 모두 배도스 공작님이 줬다는 거요.”

“그냥 어림짐작 했는데 정말 맞나요?”

루티스 백작은 멍한 얼굴로 발레린을 보았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참고로 귀속 관계에 대해서는 책에서 봤어요. 사이가 돈독한 귀족들은 서로에게 귀속 재산을 만들어서 그 사람이 죽거나 왕국으로 재산이 돌아간다면 귀속 관계의 사람에게 재산을 물려준다고요.”

“…….”

“지금 배도스 공작님 옆에는 누구보다 배도스 공작님을 옹호하는 겔렌트 남작이 있으니 배도스 공작님은 분명 겔렌트 남작에게 줄 거예요. 루티스 백작님께 했던 것처럼요.”

루티스 백작은 굳은 얼굴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늘 나오는 역사의 전형적인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지금 배도스 공작님도 무척 바쁠 거예요. 왕자님께서 조사를 계속 하고 계시고 권력도 빼앗겼으니까요. 그러니 겔렌트 남작에게라도 줘야지 그나마 사이가 돈독해지겠죠.”

루티스 백작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공녀, 그렇게 안 봤는데 꽤 머리가 돌아가는 군요.”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요즘 몸도 그렇고 머리도 활기가 넘쳐서요.”

루티스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공녀가 말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내게서 뭘 가져가려고 하지 마세요.”

“전 가져가려고 한 건 아니고 들으려고 왔어요.”

“그러니까 들으려고도 하지 마세요.”

“하지만 궁금한걸요. 그리고 왕자님께 사과를 했으면 좋겠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왕자님께 사과라니요?”

“전 그때 들었어요. 왕자님의 왕궁 뒤쪽에서 백작님이 겔렌트 남작과 이야기를 나누었잖아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루티스 백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걸 어떻게…….”

“우연히 그곳에 갔다가 들었어요. 참고로 그로프도 같이 들었고요.”

발레린은 어깨 위에 앉아 있는 그로프를 눈짓했다. 그로프는 개꿀개꿀 울면서 루티스 백작을 빤히 쳐다봤다.

“이걸 왜 이제야 이야기하는 겁니까?”

“보좌관에게 말했는데 왕자님 상황이 괜히 안 좋아질 것 같아 말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야 말할 기회가 생겨서 말하는 거예요.”

“…….”

“참고로 제가 들었던 내용은 배도스 공작님과 관련되어 있으니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하지는 마세요.”

루네스는 놀란 눈으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여전히 루티스 백작에게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루네스는 루티스 백작을 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왕자비님, 이 정도 내용이면 왕자님께 바로 말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한데 루티스 백작이 어떤 대답을 하는지 궁금해서. 우선 들어 보려고.”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살짝 물러났다. 그때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루티스 백작이 대답을 할까요?”

“겔렌트 남작 일도 있고 내가 그 말을 모두 들었으니 말할 거야.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루티스 백작은 배도스 공작의 말을 대신 전하면서 자기 말이 무척 많았잖아. 그때 왕정 회의에서도 배도스 공작은 가만히 있는데 루티스 백작만 많이 떠들었었고.”

“그럼 입이 근질거려서라도 말을 할 것 같다는 말입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저렇게 말을 하던 사람들은 입을 닫기가 어려워. 그리고 이미 내가 겔렌트 남작과 엮인 일도 다 아는데. 만약 루티스 백작이 말을 안 하더라도 나는 곧장 왕자님께 가서 겔렌트 남작과 배도스 공작이 얽혀 있다고 말하면 되는 거고.”

이제야 때가 된 것이다. 비록 보좌관에게 찾아갔을 땐 제르딘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이젠 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당시 보좌관 말처럼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은 게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 왕궁 뒤에서 들은 왕자님에 대한 모욕을 꺼내면 더 극적일 것이다. 이 일은 배도스 공작도 얽힌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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