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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10화 (110/130)

110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으나 발레린은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하지만 헬릭스 님은 저를 좋아한다고 해서 나쁘게 행동할 분은 아닌 것 같아요.”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발레린은 그의 웃음이 의아해서 쳐다보았다. 제르딘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지금 헬릭스를 두둔하는 겁니까?”

“두둔이 아니라 그저 제가 본 대로 말하는 것뿐인데…….”

“물론 헬릭스는 여자 문제 외에 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자 문제만큼은 복잡합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왕자님, 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헬릭스 님을 좋아하지 않는걸요!”

“…….”

“그래서 헬릭스 님에게 이용당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참고로 순진한 여자를 꾀어내서 돈을 엄청 많이 뜯어 가는 남자는 책에서 많이 봐서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기 치는 방법도 다양하게 알기도 하고요.”

제르딘은 약간은 멍한 얼굴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왠지 모르게 상황이 어색해져 서둘러 말했다.

“아무튼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르딘이 말없이 지켜봤다. 언뜻 보면 무감한 듯 보이는 시선이었지만 할 말을 꾹 누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발레린은 차마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홀린 듯 바라봤다.

하지만 제르딘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의 눈빛도 여전했다. 맑은 하늘빛 눈동자가 짙게 번뜩였다. 할 말 이상의 감정을 채우고 있는 듯.

이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낯선 분위기였다. 발레린은 적응이 되지 않아 서둘러 말했다.

“그럼 전 방으로 먼저 들어갈게요.”

발레린은 누가 쫓아올세라 방으로 냉큼 들어갔다. 그러곤 망설이지 않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로프도 발레린의 머리맡에 누워서 잠자기 위해 몸을 모았다.

잠시 뒤 문이 살짝 열리며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눈을 꾹 감았다.

어차피 이어지지 못할 텐데 더한 말로 제르딘의 심경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발레린은 이제부터라도 제르딘의 곁을 지키면서 혹시라도 모를 위험을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헬릭스가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조심한다고 나쁠 것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발레린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발레린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제르딘이 발레린의 침대 앞에 섰다. 그는 눈을 감은 발레린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의 시선은 발레린에게 벗어날 줄 몰랐다.

제르딘은 저의 관심이 발레린에겐 부담인가 싶었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벽을 쌓고 피했으니 지금 발레린이 피하는 모습이 이해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무언가 속에서 올라오는 듯했다. 속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며 누군가에게도 놔주고 싶지 않은 묘한 감정이었다.

제르딘은 풀어지지 않은 욕망을 움켜쥔 채 몸을 돌렸다. 발레린을 바라볼수록 예상치 못하게 감정만 더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문득 드는 새로운 감정에 낯설었지만 그는 발레린이 누운 쪽으로 돌아누웠다.

발레린은 어느새 숨을 고르게 쉬며 잠에 빠져든 채였다. 그때 창가 사이로 바람이 술술 불어왔다. 발레린이 누운 쪽으로 바람이 불면서 발레린의 얼굴을 살짝 스쳤다.

제르딘은 발레린이 약간 덜 덮은 이불이 거슬렸다. 그때 바람이 또 창문 사이로 들어와 주변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약한 바람이었지만 제르딘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로프가 눈을 뜨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로프의 몸이 붉은빛으로 발광했다. 제르딘은 신경 쓰지 않고 발레린이 덮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그는 잠시 발레린을 보며 서 있었다. 등을 켜지 않아 어두웠지만 창문 사이로 비치는 달빛 덕분에 잘 보였다. 달빛에 묘하게 비치는 하얀 피부와 오뚝한 코, 그리고 묘하게 자꾸 시선이 가는 초록빛 입술.

제르딘은 한참 바라보다가 멈칫했다. 예법에 어긋나고 짐승 같은 상상이 그의 머릿속을 더럽혔다.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역겨워 제르딘은 눈썹을 찌푸리며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불가능한 사랑은 사람을 좀먹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르딘은 이번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제 어머니처럼 멍하게 지켜보지 않고 싶었고, 자신의 부작용이 커진다고 해도 발레린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동안 어머니가 왜 바보처럼 떠난 사람을 붙잡고 있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땐 이해하기도 싫고 이해하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날것의 감정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발레린이 헬릭스와 같이 있을 땐 속에서 들끓는 심정이었다. 헬릭스가 저와 상대가 안 된다고 해도 거슬렸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제르딘은 솟아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방치한 채 누웠다. 하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제르딘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발레린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짙고 어두웠다.

다음 날 아침, 발레린은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습관처럼 옆을 보자 침대는 잘 정리되어 있었다. 발레린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5시 30분.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제르딘이 옆에 있었던 적이 없었기에 발레린은 별생각 하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나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마침 그로프도 일어났는지 발레린을 보며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운동을 마친 뒤 몸을 씻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로프가 옆에 와서 발레린이 보는 풍경을 같이 바라보았다. 발레린은 지나가는 구름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로프,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왕자님을 잊을 수 없나 봐.”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발레린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그로프를 보았다.

“오늘도 습관처럼 왕자님이 옆에 있나 확인했잖아. 그리고 어제도 왕자님이 좋아한다는 말만 했는데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왕자님은 그 생각이 아닐 텐데도 말이야.”

“주인님을 놓치면 왕자가 바보일 겁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빙긋 웃었다.

“그래도 난 여기에 온 건 후회하지 않아. 왕자님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게 슬프긴 하지만 내가 아니었으면 왕궁에 독살이 더 많아졌을 거고 왕자님도 이만큼 세력을 넓히지 못했을 거니까.”

“맞는 말입니다. 주인님 아니었으면 왕자가 이렇게까지 세력을 넓혔겠습니까?”

“나도 언젠가는 왕국사에 쓰이는 날이 있겠지?”

발레린은 잔뜩 기대하며 눈을 빛냈다. 그로프는 언제나 그렇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주인님은 왕국사에 쓰였을 겁니다. 주인님같이 훌륭하신 분이 아니면 어느 누가 왕국사에 쓰이겠습니까?”

발레린은 웃음을 짓고는 활기차게 그로프를 보았다.

“그러니까 이번에 최선을 다해서 왕자님을 지켜 주는 거야! 이 왕국에는 왕자님만 한 분이 없으니까.”

“그건 맞습니다. 정통성도 있으니 배도스 공작보다는 낫겠죠.”

발레린은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은 활기차게 외쳤다.

“들어와!”

침실에 들어온 사람은 루네스였다. 그녀는 마침 아침상을 함께 준비해 왔다. 발레린이 의아해하자 루네스가 설명했다.

“왕자님께서 요즘 바쁘니 당분간 같이 음식을 들지 못한다고 하셔서요.”

발레린은 그때 괜히 제르딘과의 식사 자리를 피한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혹시 왕자님이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

“네.”

“요즘 독살도 줄어들었지?”

루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독살 사건은 아예 없어요. 아마 왕자비님이 오고 난 이후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루네스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묘한 소문이 있어요.”

“무슨 소문?”

“원래부터 왕자님께서는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소문이요.”

“그런 소문이 있다고?”

“네, 사실 왕자님이 어렸을 때부터 독살 사건이 많았거든요. 그러니까 선대왕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왕자님 주변 사람들이 엄청 많이 죽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왕자님만 멀쩡했어요.”

그로프가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역시 늑대 수인의 피가 섞여서 독이 통하지 않는 걸까요? 그래서 주인님과 입을 맞춰도 멀쩡하고요.”

발레린은 쉽사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르딘의 말을 생각해 볼 때, 그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은근히 티 내기도 했었다.

‘정말 왕자님은 독이 통하지 않는 건가.’

발레린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왕자비님, 황금 마검을 찾았다는 소식은 들으셨나요?”

그 말에 발레린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황금 마검을 찾았다고?”

“네, 마침 오늘 델프스 동굴에서 찾은 황금 마검이 진짜 황금 마검이라고 결과가 나왔대요.”

“그럼 진작 황금 마검을 찾았다는 거네!”

루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왕자님은 황금 마검을 찾았다는 말씀은 해 주시지 않았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바쁘셔서 먼저 말씀해 주시지 않았을 거예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왕자님이 요즘 많이 바쁘시긴 해.”

그나마 발레린이 납득을 하자 루네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음식 다 드시고 불러 주세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루네스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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