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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09화 (109/130)

109화

발레린은 안경을 보고는 놀란 눈으로 보았다.

“원래 헬릭스 님은 안경을 안 쓰시지 않았나요?”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요즘에 제가 책을 읽다 보니 눈이 나빠져서요.”

“책을 엄청 많이 읽으시나 보네요.”

“요즘 제가 책 읽는 재미로 삽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신이 나서 말했다.

“무슨 책을 읽으시나요? 저는 요즘 『천년 왕국사』를 다시 읽으려고 하거든요.”

헬릭스는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눈썹을 찌푸렸다.

“왕국 사요? 천년 된 왕국을 산다는 말입니까?”

발레린은 잠시 할 말을 잃어 헬릭스를 멍하니 쳐다봤다. 헬릭스는 난데없이 낄낄 웃었다. 발레린이 더 의아해서 보자 헬릭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 발레린과 눈을 맞췄다.

“공녀님, 농담이시죠?”

“농담이요?”

헬릭스는 여전히 웃음기 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발레린은 헬릭스가 농담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농담 아닌데. 혹시 헬릭스 님이 지금 농담하시는 건가요?”

“저도 농담 아닌데.”

발레린은 헬릭스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말없는 몇 초가 흘렀다. 헬릭스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는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럼 정말 천년 된 왕국을 산다는 말입니까? 소설책인가요?”

그때 그로프가 말했다.

“제가 본 인간 중에 가장 멍청한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깜짝 놀라 그로프에게 눈짓하고는 말했다.

“헬릭스 님, 왕국을 산다는 게 아니고 천년 된 왕국을 다루는 역사책이에요.”

헬릭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역사책이라고요?”

“네.”

헬릭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는 다시 웃었다. 발레린은 그의 모습이 꽤 신기해서 자세히 관찰했다. 발레린도 난생처음 보는 성격의 사람이었다.

헬릭스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얼굴로 신나게 말했다.

“역시 공녀님이 말씀하시는 건 모두 재미있습니다. 저는 공녀님이 말한 게 소설책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

“하긴 천년 된 왕국을 누가 사겠습니까? 돈이 엄청 들 텐데.”

“그건 그래요. 차라리 전쟁을 해서 차지하면 모를까.”

발레린이 미소를 짓자 헬릭스는 잠시 멍하게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왕국사라는 말이 원래 있었습니까?”

“네.”

헬릭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말이 있었는지 처음 알았네요.”

헬릭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이내 그는 싱긋 웃는 얼굴로 발레린을 보았다.

“그나저나 공녀님, 정말 똑똑하시네요. 역시 공녀님이십니다.”

괜한 칭찬에 발레린은 기분이 좋아져 활짝 웃었다.

“고맙습니다.”

헬릭스는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발레린은 마주 웃으며 헬릭스를 응시했다. 대화 책에서 보면 간혹 이런 경우에는 상대방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헬릭스는 발레린이 말없이 바라봐도 그저 웃으며 볼 뿐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발레린은 궁금해서 먼저 물었다.

“그나저나 웬일이세요?”

그제야 헬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이제 저와 완전히 갈라선 것 같아서요.”

발레린이 의아해하며 보자 헬릭스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왕자님을 죽인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발레린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마 늦은 시간이었고 왕족의 침실과 이어져서 그런지 하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발레린은 믿을 수 없어서 다시 물었다.

“사실인가요?”

“네, 제가 대회의실 앞에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제게 말해 줘도 되나요?”

“왕자가 싫긴 하지만 아버지가 나쁜 길로 빠져드는 걸 지켜볼 수는 없어서요.”

“나쁜 길이요?”

“예전부터 저희 아버지는 그런 경향이 있었거든요. 물론 지금도 그렇게 깨끗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쨌든 자식으로서 안타까울 뿐이죠.”

헬릭스는 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남 죽는 게 싫을뿐더러 잔인한 건 질색이거든요. 거기다 아버지가 죽이려는 사람은 무려 왕자이니 잘못 얽혔다간 저만 손해죠.”

발레린이 멀뚱멀뚱 보자 헬릭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렇게 보여도 전 파리 한 마리 못 죽이는 사람입니다.”

발레린의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중얼거렸다.

“정말 멍청해 보입니다.”

헬릭스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그로프를 보았다.

“그런데 이 개구리는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이상하게 절 보는 눈빛이 따가운 것 같기도 하고.”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를 보았다.

“헬릭스 님이 신기해서 그런 것 같아요.”

“신기하다고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헬릭스는 그로프를 보며 웃었다.

“저도 이 개구리가 신기합니다. 붉은 개구리는 잘 없잖아요?”

그 말을 하면서 헬릭스는 고개를 숙여 그로프를 뚫어지게 살폈다. 그로프는 뒤로 물러나며 몸을 모았다. 헬릭스는 자세를 바로 하며 발레린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개구리는 혹시 피를 먹는 개구리인가요?”

“네?”

“몸이 붉어서요. 아니면 다른 개구리보다 피가 많나?”

헬릭스가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발레린은 입꼬리를 올린 채 헬릭스를 보았다. 그는 농담으로 한 말 같지는 않았다. 그저 호기심이 넘치는 눈빛으로 그로프를 쳐다볼 뿐이었다.

발레린은 안 그래도 입이 근질거려 설명했다.

“그로프는 원래 독 개구리라서 몸이 붉고 주로 곤충을 잡아먹어요.”

헬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로프를 잠시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가 잠시 멈칫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저희 아버지가 죽이려 한다는 사실은 제르딘에겐 말하지 마세요. 제가 상황을 보고 어떻게 나오는지 본 뒤에 공녀께 보고하겠습니다.”

“왕자님이 알면 안 되는 건가요? 아셔야 할 것 같은데.”

“제르딘은 이 사실을 알면 바로 아버지를 치려고 할 겁니다. 제가 아버지를 잘 아는데 아버지는 먼저 내쳐질 사람이 아닙니다. 뒤통수를 맞으면 모를까.”

“뒤통수요?”

“아버지는 나름대로 여러 사람을 치면서 그 자리까지 올라온 겁니다. 물론 뒤통수를 맞은 적도 없고요. 그래서 아버지는 뒤통수 맞는 걸 아예 모를 겁니다. 그런 경험이 없으니.”

“…….”

“저는 그게 지겨워서 아버지와 거리를 뒀고요.”

헬릭스는 귀를 후벼 파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조만간 공녀께 보고하겠습니다.”

헬릭스는 그렇게 말한 뒤 고개를 숙여 몸을 돌렸다. 발레린은 헬릭스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참 신기한 분이야.”

“멍청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발레린이 멍하니 보고 있을 때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서 있었다.

“왕자님!”

발레린이 깜짝 놀라 외치자 제르딘은 차분히 발레린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

“아까 헬릭스와 같이 있는 걸 본 것 같은데.”

발레린은 순간 제르딘에게 말할까 하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어쨌든 헬릭스는 배도스 공작의 아들이긴 했지만 그가 허투루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다 배도스 공작에 대한 평가가 은근히 냉정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헬릭스의 말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배도스 공작이 뒤통수를 맞는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아들이라도 그렇게 말할 정도면 헬릭스도 배도스 공작에 대한 반감이 많아 보였다.

발레린은 여태껏 헬릭스가 한 말이 진실이었던 것을 믿으며 말했다.

“헬릭스 님이 잠깐 오셔서 얘기를 나눴어요.”

발레린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제르딘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반응이 의아하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처럼 배도스 공작에 대해서 말해 줬어요. 그나저나 배도스 공작은 원래 뒤통수를 맞은 적 없나요?”

“지금까지 배도스 공작은 한 번도 배신당한 적이 없습니다.”

“왜요?”

“모두가 배도스 공작을 따르니까요.”

발레린은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제르딘이 어떻게 왕궁에서 버텨 왔을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때 제르딘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헬릭스는 배도스 공작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헬릭스가 하는 말을 모두 믿지 마세요.”

“그런데 들어 보니까 배도스 공작님을 그다지 많이 따르지는 않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헬릭스는 위험합니다. 그때도 공녀에게 이상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제 생각에 헬릭스 님은 나쁜 의도로 말한 것 같지는 않았어요.”

제르딘의 얼굴에 은근한 차가움이 맴돌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헬릭스 님은 그저 순수한 의도였던 것 같아요.”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헬릭스는 멍청해서 한 가지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제르딘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녀.”

발레린이 고개를 들어 보자 제르딘이 한 걸음 다가왔다. 발레린은 당황스럽긴 했지만 피하지 않고 제르딘을 쳐다봤다.

“헬릭스가 공녀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

“…….”

“당신을 좋아한다고.”

순간 발레린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튀었다. 그때 제르딘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발레린은 잠시 말이 나가지 않았다. 제르딘은 여전히 발레린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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