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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08화 (108/130)

108화

“자네는 루티스 백작과 가까운 사이 아니었나?”

“그렇긴 하지만 요즘 루티스 백작님의 낌새가 이상해서요. 오히려 배도스 공작님을 위하는 척하면서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아슬아슬했습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다른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도 최근에 들었는데 헬릭스 공자님께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행동을 부추겼다고 하더라고요.”

“헬릭스에게?”

“예, 공자님이 발레린 공녀를 좋아했다고 말했을 때, 루티스 백작님은 오히려 헬릭스 님을 부추겼다고 합니다.”

“루티스 백작이 그랬다고?”

겔렌트 남작을 비롯해서 몇몇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스 공작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요즘 왕자 때문에 슬슬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마침 알맞게 움직여 주었군.”

“알맞게 움직인다는 게 어떤 말씀입니까?”

“안 그래도 왕자 측에서 지나간 독살 사건에 대해서 샅샅이 뒤진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렇게 내 증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데 이걸 모두 루티스 백작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낫겠지.”

겔렌트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스 공작은 주먹을 움켜쥐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이젠 정말 왕자를 죽여야겠어. 이대로 가만두다간 내 목숨까지 가져갈 기세야.”

“하지만 지금 왕자가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데 괜찮겠습니까? 거기다 이젠 독도 안 통하지 않습니까?”

배도스 공작은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독살은 어렵겠지만, 원래 왕자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예전부터 떠도는 소문이 있었지. 늑대 수인과 반쯤 섞였다고.”

“하지만 그건 소문일 뿐이지 않습니까? 거기다…….”

그때 겔렌트 남작이 나섰다.

“왕자는 늑대 수인의 피가 섞인 인간이 맞습니다. 그래서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부작용에 시달리고요.”

그 말에 몇몇 귀족들은 놀란 얼굴로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그럼 당장 왕자를 끌어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배도스 공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는 못 해. 어쨌든 내 선에서 최선은 황금 마검을 숨기는 것이었는데 이젠 그것도 글러먹었으니 왕자를 죽일 수밖에.”

“하지만 늑대 수인의 피가 반쯤 섞이면 왕이 될 자격이 없지 않습니까?”

“그걸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그 증거를 내밀면 내가 선대왕을 죽였다는 증거까지 내밀게 돼. 그게 가능하겠는가?”

뜻밖의 말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배도스 공작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서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는 차라리 왕자를 죽이는 게 속 편해. 여태껏 왕자를 피 말려서 스스로 물러나게 하려고 했는데 그건 들어먹지 않을 것 같으니 이제는 그냥 죽이는 게 낫겠지.”

배도스 공작은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한편 대회의실에 뒤늦게 들어가려던 헬릭스는 그 자리에 멈칫했다.

‘왕자를 죽이려 하다니.’

아무리 방탕하고 무식하게 살아왔어도 헬릭스는 제 아버지의 머릿속을 이해할 수 없었다.

18. 대화의 기술

제르딘은 집무실로 곧장 왔다. 발레린의 독살 미수 사건에 대해서 아직 보지 못한 자료가 있어서였다.

제르딘이 의자에 앉자마자 보좌관이 물었다.

“왕자님, 루티스 백작이 그렇게 이야기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미리 왕실 친위대를 준비하라고 하신 것도…….”

“요즘 겔렌트 남작과 루티스 백작 사이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리더군. 그리고 배도스 공작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루티스 백작 아닌가?”

“하지만 루티스 백작이 배도스 공작에 대해서 쉽사리 입을 열까요?”

“조만간 배도스 공작이 완전히 꼬리를 자를 텐데 루티스 백작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하긴 배도스 공작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쓰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만약 입을 열지 않더라도 증거가 충분하니 문제는 없을 거야.”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르딘을 조심스레 관찰했다. 그는 책상에 가득 있는 서류를 넘기며 집중하고 있었다.

보좌관은 머뭇대다가 입술을 뗐다.

“그런데 왕자님, 정말 왕자비님과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실 겁니까?”

“내가 대신전에 내는 결혼 서약서를 보면 모르겠나?”

“그래도 이건 다릅니다. 전에는 왕자비님과의 결혼을 무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르딘은 서류를 훑어보다가 문득 발레린의 이름을 보았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생각이 바뀌었어.”

보좌관은 잠시 멍하니 제르딘을 보다가 재빨리 말했다.

“왕자님! 어렸을 때부터 부작용으로 고생을 했는데…….”

“의사 말 못 들었나? 나와 발레린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부작용을 가질 확률이 거의 없는 거.”

“하지만 왕자님께서 더 큰 부작용으로 고생하는 것 아닙니까?”

제르딘은 여유롭게 서류를 훑어보며 말했다.

“어차피 여태껏 경험한 일인데 새로울 것도 없지.”

“그래도 더한 고통 때문에 고생하시면…….”

제르딘은 서류를 탁 덮었다. 보좌관이 놀라며 쳐다보자 제르딘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래서 지금 발레린과 한 결혼을 무르라고?”

뜻밖의 말에 보좌관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제 말뜻은 그게 아니라…….”

“그게 그거 아닌가? 내가 부작용으로 더 고생하면 발레린과 결혼 생활을 이어 갈 수 없다는 거.”

보좌관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제가 너무…….”

그때 제르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좌관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왕자님, 어디 가십니까?”

“발레린이 생각나서.”

보좌관은 깜짝 놀란 얼굴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개의치 않고 보좌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곧장 독살 미수 사건을 담당하는 조사관에게 보내.”

보좌관은 얼떨결에 서류를 받고는 제르딘을 믿기지 않는 얼굴로 보았다. 제르딘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보자 보좌관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조만간 배도스 공작이 배후였다는 게 밝혀질 거야. 이참에 배도스 공작과 관련된 하인들도 모두 내보내고 새로 물갈이를 해야겠어.”

“하지만 배도스 공작 측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제 알아서 기어야 하는 방법밖에 없을 거야. 그 청혼서 인장도 배도스 공작이 내 반지를 몰래 같게 만들어서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으니까.”

제르딘은 서랍을 열어서 왕실의 상징인 창과 방패가 엇갈리는 문양이 있는 반지를 책상 위로 던졌다. 보좌관은 깜짝 놀란 얼굴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럼 배도스 공작이 왕자님의 인장 반지를 복사해서 가지고 있었던 겁니까?”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장 반지를 내 왕궁 뒤쪽에 숨겨 놓고 있었더군.”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놈들은 특히 내 왕궁 주변에 무언가를 자주 숨기니 조사관들에게 주변을 뒤져 보라고 했지. 그런데 뜻밖의 수확을 했고.”

제르딘은 복사된 인장 반지를 눈짓했다.

“배도스 공작이 이렇게까지 행동할 줄 몰랐습니다. 감히 왕자님의 인장 반지까지 복사하다니.”

“처음부터 발레린이 헤르틴 하녀장이 숨긴 독을 찾지 못했다면 이렇게까지 내가 찾지도 못했을 거야. 거기다 그놈들이 주로 만나던 장소도 내 왕궁 뒤쪽이었으니.”

보좌관이 멍하게 보고 있을 때 제르딘은 책상을 벗어났다. 그때 보좌관이 급히 제르딘을 붙잡았다. 제르딘이 돌아보자 보좌관은 조심스레 손을 떼고는 말했다.

“그래도 왕자비님과의 결혼을 유지하는 것은 잘 생각해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 소리인가?”

“정말 죄송합니다만, 의사 말로는 왕자님의 부작용이 더욱 심해진다고 합니다.”

“상관없어. 이런 고통은 익숙하니까.”

“하지만 왕자님, 여태껏 왕자님은 이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서 엄청 노력하시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부작용은 오래가지 않잖아. 자주 아프긴 해도 그건 그나마 참을 수 있는데 발레린이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못 참겠어.”

보좌관은 깜짝 놀란 얼굴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제르딘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리고 요즘은 부작용도 없어지기도 하고.”

“하지만 일시적인 현상일 뿐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제르딘은 물끄러미 보좌관을 쳐다봤다. 차갑고 권태로운 시선이었다. 갑자기 내려앉은 분위기에 보좌관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죄송한 줄 알면서도 두 번씩이나 말하는 건가?”

보좌관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그저 고개를 숙였다.

“내 걱정을 하는 건 더 말하지 않겠지만 발레린은 걸고넘어지지 마.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제르딘은 그 말만 하고서 집무실을 나갔다. 보좌관은 멍하니 서 있다가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왕자님께서 한 번도 저러신 적 없었는데…….”

그가 걱정을 하면 대충 동의하며 넘어가던 사람이었다. 거기다 제르딘은 한 번도 감정에 동요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선대왕의 장례식 때도 울지 않던 사람이었다.

보좌관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닫힌 문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발레린은 갑자기 찾아온 헬릭스가 무척이나 새로웠다. 그것도 침실 앞, 늦은 시간이었다.

“헬릭스 님, 웬일이세요?”

발레린이 호기심을 가지자 헬릭스는 안경을 쓰윽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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