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제르딘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의사는 완전히 물러났다. 그때 어느 귀족이 유난히 크게 말했다.
“왕자님께서 결혼도 하셨으니 슬슬 후사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르딘이 시선을 들자 원로원 귀족 중 한 명이 이어서 말했다.
“물론 아직 왕자님께서 왕으로 즉위하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하게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은 배도스 공작과 그 주변의 귀족뿐이었다. 대다수는 원로원 귀족의 말에 동의하며 한 마디씩 했다.
“아이가 있어야 왕궁도 안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왕국 사람들도 모두 그걸 바랄 겁니다.”
그때 배도스 공작이 말했다.
“하지만 왕자비님은 저주에 걸린 사람 아닙니까?”
사르티아 공작이 대번에 받아쳤다.
“이제 왕자비님은 저주가 아니라 능력으로 발현된 겁니다.”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저주에 걸렸는데 그게 능력이 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왕자비님에게는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제 아내도 그런 식으로 능력이 발현되었으니까요.”
그 말에 배도스 공작이 날카롭게 쳐다봤다. 사르티아 공작은 무뚝뚝한 얼굴로 볼 뿐 별말은 하지 않았다.
배도스 공작은 더 할 말이 없는지 기분 나쁜 듯 기침을 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때 세드릭스 공작이 제르딘을 보며 말했다.
“왕자님, 그러니 더는 미루지 마시고 후사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럴 생각이야.”
제르딘의 한마디에 귀족들의 시선이 한곳에 쏠렸다. 특히 배도스 공작은 무척이나 놀란 얼굴이었다. 그는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왕자님, 그래도 지금은 왕자비님의 몸도 좋지 않으신데…….”
제르딘이 웃었다. 한 번도 왕정 회의에서 웃음 짓지 않은 제르딘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르딘을 바라봤다.
“배도스 공작은 언제부터 왕자비를 걱정한 건가?”
“그게…….”
“그러고 보니 왕자비의 독살 미수 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배도스 공작에 관한 내용도 꽤 나오던데 이건 어떻게 생각하나?”
배도스 공작의 눈썹이 약간 일그러졌다가 이내 원래 얼굴을 유지했다.
“명확한 증거가 있으십니까?”
“명확한 증거라…… 그건 조만간 나올 것 같은데.”
제르딘이 미소를 짓자 배도스 공작은 날카롭게 제르딘을 쳐다봤다.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저를 그렇게 단정 지으시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건 조사 결과가 나오면 알게 되겠지.”
제르딘이 확신하듯 말하자 배도스 공작의 시선이 더욱 매서워졌다. 제르딘은 대수롭지 않은 듯 귀족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미처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델프스에 있는 동굴에서 황금 마검과 비슷한 검이 발견되었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황금 마검이라니. 그게 정말 발견된 겁니까?”
“정확하게 분석해 봐야겠지만 이전에 존재하던 황금 마검과 똑같이 생겼으니 맞겠지.”
제르딘은 배도스 공작을 보았다. 그가 일부러 눈을 맞췄으나 배도스 공작은 묘하게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배도스 공작 주변 귀족들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 외에 대다수의 귀족들은 모두 신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정말 소문대로 황금 마검이 두 자루였다는 말씀입니까?”
“만약 황금 마검이 맞는다면 원래 두 자루로 만들어진 거겠지.”
“그럼 굳이 없어진 황금 마검을 찾지 않아도 왕자님의 왕위 계승식은 문제없겠군요.”
모두들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그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배도스 공작의 얼굴은 여전히 굳은 채 가까스로 화를 참고 있는 듯 보였다.
내내 배도스 공작의 눈치를 보던 루티스 백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나저나 제가 요즘 아주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이라니요?”
배도스 공작 주변의 사람들이 중얼거리자 루티스 백작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대신전에 내는 결혼 서약서를 미루고 다른 왕국의 청혼서를 받아들이셨다고요.”
제르딘은 아무 표정 없이 루티스 백작을 보았다. 루티스 백작은 시선을 피했으나 제르딘은 그저 말없이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집요하면서도 무언가 꿰뚫을 듯 흔들림이 없었다.
째깍째깍. 시계가 일정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서로 눈을 굴리며 보고 있던 때였다. 겔렌트 남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그런 소문을 듣긴 들었는데 아무래도 악의적인 소문 같아서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대신전에서 아직 결혼 서약서를 받지 못했다는 말은 사실이라서…….”
“대신전에 결혼 서약서를 제때 보내지 못한 것은 약식으로 된 서류를 정통성에 맞게 조금 더 보충해서 보내려다 늦어진 거다.”
제르딘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겔렌트 남작을 보았다. 남작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세드릭스 공작은 그들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왕자님께서 갑자기 정하신 결혼이라 결혼 서약서에 준비할 게 많으시겠죠. 거기다 약식으로 제출하는 것은 왕자님의 결혼에 대한 모욕이니 절차에 맞게 제출하시는 게 옳습니다.”
그때 루티스 백작이 발끈하며 말했다.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다른 왕국의 청혼서를 받아들이셨지 않습니까?”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그건 어디서 들은 건가?”
“예?”
“내가 청혼서를 받아들였다는 말, 어디서 들었는지 궁금한데.”
“그건…….”
“그러고 보니 그 소문에 배도스 공작도 등장한 것 같은데, 배도스 공작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배도스 공작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제르딘이 눈을 피하지 않고 차분히 바라보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저 악의적인 소문이겠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때 루티스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배도스 공작에게 외쳤다.
“공작님! 분명 제게 부탁해서…….”
루티스 백작은 말을 하다 말았다. 제르딘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지금 뭐라고 한 건가?”
“아니, 그러니까 그건…….”
그때 겔렌트 남작이 나섰다.
“루티스 백작님께서 그런 소문을 퍼뜨리신 겁니다. 배도스 공작님과는 아무 상관없고요.”
루티스 백작의 눈이 대번에 크게 뜨였다. 그는 할 말을 잃은 채 겔렌트 남작을 쳐다봤다. 남작은 시선을 애써 피하며 왕자에게 말했다.
“제가 옆에 있어서 압니다. 예전부터 루티스 백작님은 배도스 공작님과 왕자님을 엮어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제르딘은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한가?”
“네, 확실합니다. 참고로 그동안 루티스 백작님이 소문을 낸 증거도 있습니다.”
“그럼 조사해 보면 알겠지.”
제르딘은 루티스 백작에게 손짓했다.
“저자를 끌고 가라.”
그러자 루티스 백작이 고개를 내저으며 소리쳤다.
“억울합니다. 갑자기 제가 끌려가다니요! 저는 그저 배도스 공작님을 옆에서 모신 것밖에 없습니다.”
루티스 백작은 겔렌트 남작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겔렌트 남작은 시선을 피하며 앞만 바라보았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수군거리며 루티스 백작을 보았다.
왕실 친위대는 안 가려고 발악을 하는 루티스 백작의 팔을 끌고서 대회의실을 나갔다. 제르딘은 무심히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다.”
귀족들이 모두 일어나 예의를 표했다. 제르딘이 나가자 대회의실에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씩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들 대다수는 아까의 사태에 대해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배도스 공작 측에서 루티스 백작을 자르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 아닌가?”
“배도스 공작이 먼저 루티스 백작을 자른 것일 수도 있어.”
“그게 무슨 말인가?”
여러 귀족들이 관심을 갖자 귀족 중 하나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는 왕자님께서 배도스 공작을 조사하시니 이에 위협을 느낀 배도스 공작이 아예 루티스 백작에게 다 뒤집어씌워서 빠져나가려는 것 같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사르티아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배도스 공작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때 원로원 귀족 중 하나가 말했다.
“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왕자님이 본모습이 나오는군.”
“본모습이라니요?”
“원래 왕자님은 여기저기 시달리는 분이 아니었네. 그런데 선대왕께서 아프시고 급기야 돌아가시니 그렇게 온갖 일에 손을 놓은 거였지.”
그때 사르티아 공작이 말했다.
“그래도 왕자비 덕분에 달라진 것 아닙니까?”
“흠, 시기상으론 그렇긴 하지만…….”
“왕자비 덕분에 왕자님께서 안정을 찾으신 걸지도 모릅니다. 이전에는 이렇게까지 강경하지 않으셨잖습니까?”
귀족들은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한편 대회의실에서 나오지 못한 배도스 공작과 관련된 귀족들은 모두 말없이 배도스 공작의 눈치를 봤다. 배도스 공작은 말없이 굳은 얼굴로 물 잔을 바라봤다.
조용한 공기 속에 겔렌트 남작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자칫 잘못하면 배도스 공작님께서 루티스 백작님과 엮여서 큰일을 당할 뻔하셨습니다.”
배도스 공작은 눈을 살짝 내리깔며 겔렌트 남작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