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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06화 (106/130)

106화

“그동안 탑이나 왕궁에 오래 있기도 했고 조금 더 다양하게 둘러보고 싶어서.”

“전 주인님 곁을 언제나 따르겠습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로프.”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이 활기차게 들어오라고 말하자 루네스가 들어왔다.

“왕자비님, 잘 주무셨어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왕자님께서 할 말이 있다고 아침을 같이 드시자고 하셔요.”

“왕자님이?”

루네스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물론 제르딘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긴 했지만 제르딘을 보면 마음이 다시 울렁거릴 것 같아 쉽사리 마음이 서지 않았다.

어제도 발레린은 겨우 눈을 감고 잤었다.

‘이제는 정말 마음을 접어야 하는데.’

또다시 기대하는 마음을 가졌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발레린은 마음이 안 좋긴 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자님께 죄송하지만 나는 여기서 먹는다고 전해 줘. 많이 피곤하다면서 말이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네스가 걱정스레 살폈다.

“왕자비님, 많이 피곤하세요?”

“아니!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고 그냥 잠만 조금 더 자면 돼.”

발레린이 미소를 짓자 루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음식은 이곳으로 가져올게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는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로프가 물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그 말을 하면서도 발레린은 벽에 걸린 보랏빛 드레스를 보았다. 발레린이 멍하게 보랏빛 드레스를 보고 있자 그로프가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주인님, 너무 심려치 마세요. 제르딘 같은 왕자가 주인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과분합니다.”

“하지만 왕자님은 내가 주는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할 분인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왕자님은 여태껏 배도스 공작에게 시달려 왔잖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말이야.”

“하지만 주인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도 나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좋은 이야기도 들었고, 그나마 어머니의 사랑은 받았잖아.”

그로프는 말없이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이 들어오라고 하자 루네스는 하인과 함께 음식을 가져왔다.

음식을 탁자에 놓으며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왕자비님, 왕자님께서 많이 걱정하셨어요. 아마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예요.”

“의사?”

“아무래도 왕자비님께서 독을 먹은 이후로 몸이 안 좋아진 것 같으니 의사가 진찰해 보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새삼 발레린은 제르딘의 배려에 감사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어차피 제르딘은 그저 원래 성격대로 행동하는 것일 텐데 말이다.

“난 정말 괜찮은데.”

“그래도 의사가 오신다고 했으니 한번은 검사를 받아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발레린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포크를 쥐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발레린은 생각 없이 음식을 먹었다. 어느새 그릇에 남은 음식이 거의 없을 때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왔다. 의사는 무척이나 늙은 사람이었는데 병실에서 봤던 의사였다.

“왕자비님, 상태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의 주변으로 여러 의사들이 들어왔다. 발레린은 살짝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들의 요구에 따라 눈을 이리저리 돌리고 팔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한참 발레린을 관찰하던 그들은 이내 천천히 물러났다.

그중에서 가장 늙은 의사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왕자비님의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합니다.”

발레린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피곤해하셨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지금 몸 상태로 봐서는 과로하신 상태는 아닌데.”

피곤한 것은 거짓말이었고 원래 발레린은 몸 상태가 좋았다. 그러나 밝힐 수가 없기에 발레린은 밝게 거짓말을 했다.

“이제 괜찮아.”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몸이 안 좋으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의사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곤 침실을 나갔다. 그들이 우르르 나가자 루네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왕자비님, 그럼 귀족분들을 모두 만나 보실 건가요?”

“몸도 멀쩡하니 만나 볼래. 어차피 약속한 거잖아.”

안 그래도 발레린은 자꾸만 제르딘만 생각나는 머릿속을 비우고 싶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래도 시간이 빨리 가고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발레린이 귀족들을 만난 시간은 점심시간 이후였다. 그나마 발레린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제르딘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간간이 귀족들은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 발레린은 당황스러웠지만 활짝 웃기만 했다. 그러면 대다수는 이야기를 더 꺼내지 않고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발레린이 만난 사람 중 가장 이야기를 많이 한 사람은 세드릭스 부인이었다. 그녀는 어제 방문하고 오늘 다시 왔는데 발레린을 만나자마자 밝게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그러면서 다른 귀족들은 기피하던 다음 만남을 또다시 기약했다.

세드릭스 부인도 발레린같이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지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발레린은 응접실을 나섰다.

침실에 거의 도착했을 때 발레린은 익숙한 사람을 보았다.

“헬릭스 님?”

헬릭스는 발레린을 보자마자 웃으며 다가왔다.

제르딘은 하루 종일 왕정 회의를 거듭했다.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가는 사이 그는 조금도 집중하지 못했다.

분명 청혼서를 보고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내색하지도 않고 아침도 같이 먹지 않고.

제르딘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곳을 응시했다. 보좌관은 한창 말을 하다 조심스레 말했다.

“시정할까요?”

“아니.”

유난히 낮은 목소리였다. 누가 보면 잔뜩 화가 나서 가까스로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보좌관은 큼큼 기침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뒤에 귀족들이 하나둘씩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보좌관은 제르딘 옆으로 와서 그의 상태를 힐끗거리며 살폈다.

그때 귀족 중 하나가 제르딘에게 물었다.

“왕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르딘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귀족을 쳐다봤다.

“왕자님께서도 이 의제를…….”

“남부 지역에 친위대를 더 파견하면 주변 마을 사람들도 안정될 것이고 그럼 괜히 남부 쪽 귀족들이 나서지 않아도 될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제르딘이 곧바로 대답하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입을 닫았다. 질문을 한 귀족도 잽싸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왕자님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면 확실히 주변의 원성도 줄어들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제르딘은 다시 탁자를 쳐다보며 생각에 빠졌다. 내내 지켜보던 보좌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왕자님, 혹시 다른 의제를 듣고 싶으신 겁니까?”

제르딘은 시선은 들지 않고 약간은 무심한 얼굴이었다.

“왜?”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다지 관심 없어 하지 않으십니까?”

“원래 왕정 회의가 그렇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제르딘은 귀족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그저 흘려 넘기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탁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대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곧바로 제르딘에게 와서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왕자비님의 상태는 매우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오늘 온 종일 귀족들을 만났다고 하던데.”

“그렇게 무리하셔도 지금 왕자비님의 상태는…….”

“내가 그걸 물은 게 아닐 텐데?”

제르딘이 차가운 시선으로 보자 의사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보다 못한 보좌관이 의사를 뒤로 물리면서 제르딘에게 말했다.

“왕자님, 안 그래도 지금 왕자비님께서 귀족들을 모두 만난 뒤라고 합니다.”

“발레린이 모두 다 만난다고 했었나?”

“네, 전용 하녀는 말렸다고 하는데 왕자비님께서 그들을 다 만나셨다고 합니다.”

제르딘은 무심한 얼굴이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 전혀 묻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의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의사는 다급히 제르딘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늑대 수인의 피가 섞인 사람과 저주에 걸린 사람의 아이는 어떤 부작용을 겪을지 물으신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가 차분히 말했다.

“제가 알아 온 바로는 늑대 수인이 반쯤 섞인 사람과 저주에 걸린 사람이 만나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부작용이 없을 확률이 높지만 늑대 수인의 피가 반쯤 섞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부작용이 더 강하게 작용할 확률이 높습니다.”

“늑대 수인의 피가 섞인 입장에선 부작용이 더 강하게 반응한다고?”

“어떤 저주에 걸렸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주라는 것은 한마디로 독한 기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독기가 늑대 수인의 피와 섞이면 늑대 수인은 부작용이 더 심해지는 반면에 그 피를 물려받은 사람은 오히려 부작용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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