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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05화 (105/130)

105화

“왕자님은 처음부터 나에게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고 나와의 아이는 가지기 싫다고 했고 배도스 공작이 몰락하면 결혼은 물거품이 된다고 했잖아.”

“…….”

“그걸 서류로 남겨 두기도 했었고.”

발레린이 강조하듯 말하자 그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이어 말했다.

“나도 거기에 동의해서 서류에 서명을 했었고.”

그로프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발레린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로프, 난 내가 탑에 있을 때 내 존재에 대해서 그나마 좋게 생각하며 극복을 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막상 왕자님이 직접 청혼서에 인장을 찍은 것을 보니까 지금 내 존재에 대해서 서러워.”

그로프는 발레린에게 다가오며 안쓰러운 듯 쳐다봤다.

“주인님.”

“왕자님은 어차피 나와 같은 능력이 있는 사람의 피를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로프는 말없이 발레린을 바라봤다. 발레린은 고개를 번쩍 들고는 말했다.

“더 슬픈 건 뭔지 알아? 왕자님이 이해가 된다는 거야.”

“…….”

“나도 그랬거든. 사람들이 내가 저주에 걸렸다고 해서 나를 무시하고 피했는데 만약 내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다들 이렇게 나를 싫어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도 주인님의 어머니께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무시와 멸시가 쉽게 잊히는 건 아니거든.”

그로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면역이 되어서 별생각은 들지 않아. 왕자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지금 나를 무시하고 멸시해도 난 오히려 웃을 수 있어. 어차피 그건 면역이 되었으니까.”

“…….”

“그런데 왕자님의 인장이 찍힌 청혼서를 보니까 정말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아. 웃을 수도 없고.”

“…….”

“물론 왕자님이 처음부터 내게 기대하지 말라고 했으니 난 어쩔 수 없긴 하지만.”

발레린은 이제 완전히 제르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힘이 없어 발레린의 고개가 절로 내려갔다.

그로프는 조심스레 발레린의 얼굴을 살폈다. 기다란 곱슬머리가 발레린의 시야를 막았다. 마치 커튼처럼 발레린 얼굴 주변에 내려온 머리는 꽤 촘촘했다.

그로프는 발레린이 걱정되어 조심스레 불렀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

“주인님?”

그로프가 발레린의 머리를 헤치려 하자 발레린은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 탓에 그로프는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미소를 짓고는 힘 있게 포크를 잡았다.

“그로프, 이젠 난 정말 왕자님께 사랑을 기대하지 않을 거야.”

발레린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크고 명랑했다. 발레린은 포크를 들고 부지런히 음식을 먹었다. 어느덧 발레린이 다 먹자 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발레린이 말하자마자 문이 열리고 루네스가 들어왔다. 루네스는 발레린이 다 먹은 그릇을 보고는 빠르게 말했다.

“왕자비님, 음식을 더 가져 올까요?”

“아니, 괜찮아.”

발레린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기를 정리했다. 발레린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리를 움직이며 운동을 시작했다. 루네스는 잠시 놀란 듯 발레린을 보다가 이내 조심스레 말했다.

“그나저나 왕자비님, 대신관님을 만나 보신 이후로 앞다투어 약속을 빨리 잡으려 하는 귀족들이 있는데 제가 일정을 보다 보니 예상치 못하게 빡빡하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사람이 많다 보니까 일정을 조정하기가 꽤 어려워서 그렇게 됐는데 다시 여유롭게 잡을까요?”

“아니, 오히려 일정이 여유롭지 않은 게 좋아.”

루네스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특히 세드릭스 부인께서 왕자비님을 많이 뵙고 싶어 했어요.”

“그럼 언제부터 그분들을 만날 수 있어?”

“아마 오늘 오후부터일 거예요. 괜찮으시죠?”

“그럼. 음식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 빼고는 모두 괜찮아.”

루네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분들께 모두 연락드릴게요.”

루네스는 식기를 모두 치우고서 물러났다. 발레린은 잠시 더 운동을 하다가 창문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제 발레린의 머릿속에는 제르딘이 왕이 되는 것밖에 없었다. 오로지 그것뿐이니 오히려 발레린은 머릿속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반면 그로프는 발레린을 그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주인님.”

발레린이 곧바로 고개를 돌리자 그로프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아까 청혼서를 보고…….”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괜찮아, 그로프! 아까 말한 것처럼 난 이제 기대하지 않으려고. 왕자님께서도 그렇게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 내가 괜히 거기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이젠 나에게 하나의 목표밖에 없어.”

“무슨 목표입니까?”

“왕자님이 왕이 되는 것!”

발레린은 환하게 웃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발레린의 살결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로프는 스치는 바람에도 눈을 깜빡하지 않고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무척이나 밝은 얼굴이었다. 그로프가 걱정한 것 이상으로.

주인님은 항상 그랬다. 우울한 듯 빠져들었다가도 곧바로 빠져나와 웃었다. 마치 그게 최선인 듯. 그로프는 새삼 주인님을 존경하며 개꿀개꿀 울었다.

늦은 밤이었다. 안부차 발레린을 방문한 귀족들은 모두 지친 얼굴로 돌아갔다. 그나마 세드릭스 부인은 발레린과의 대화를 통해 많이 웃었으며 다음 약속을 했지만 나머지 귀족들은 기운이 다 빠진 채 몸을 돌렸다.

발레린은 힘찬 걸음으로 침실로 걸어갔다. 옆에는 루네스가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왕자비님, 이제 남은 귀족들은 내일 만남으로 끝이에요.”

“벌써?”

“네, 오늘도 정말 많이 만나신 거예요.”

루네스가 약간 지친 목소리로 말하자 발레린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루네스는 발레린을 슬쩍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왕자비님, 지치지는 않으세요?”

“전혀!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니까 더 힘이 나.”

어깨 위에 있는 그로프는 발레린을 보며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웃고는 힘찬 걸음으로 침실로 걸어갔다. 루네스는 뒤늦게 발레린을 따라가며 내일 일정을 말했다.

“내일은 점심시간 이후에 귀족들을 만나고요. 그 다음은…….”

그때 발레린이 우뚝 멈춰 섰다. 루네스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서 있었다. 그는 가운 차림이었다. 루네스는 급히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잠시 주변에는 조용한 분위기가 흘렀다.

“늦었네요.”

차분한 한마디였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저를 걱정해 준 귀족들을 만난다고 늦었어요.”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오히려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니까 활기차고 좋기만 했어요.”

발레린은 진심으로 기뻐서 미소를 지었다.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제르딘은 그로프를 쳐다보다가 발레린을 보았다. 발레린은 고개를 살짝 숙이곤 침실로 들어갔다. 뒤이어 제르딘이 들어왔다.

“공녀.”

막 침대에 누우려던 발레린은 고개를 돌려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채 발레린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보일 정도로 밝은 하늘빛 눈동자였지만 지금은 어쩐지 어둠에 동화되어서 짙었다.

“오늘 제 집무실에 들렀다고 들었습니다.”

“아, 보좌관님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제가 서류를 찾아서 갖다 줬어요.”

“봤습니까?”

“뭘요?”

제르딘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몇 걸음도 걷지 않아서 발레린의 침대 앞에 섰다. 발레린이 의아해하며 보자 그가 발레린과 시선을 맞추며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청혼서요.”

발레린은 제르딘이 이렇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예상치 못해서 잠시 놀랐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자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빠르게 말했다.

“보긴 봤지만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어차피 왕자님과의 결혼은 계약 결혼일 뿐이었고 서류상 얽힌 사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굳이 제게 모두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쨌든 저는 왕자님이 제게 잘해 주시는 걸 아니까요.”

발레린은 빙긋 웃고는 침대에 누웠다. 제르딘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발레린은 눈을 꾹 감았다.

어차피 이젠 발레린과 상관없는 일이었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눈을 감았는데도 제르딘의 시선이 느껴졌다. 심지어 그는 제 침대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발레린은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심장만은 이성을 잃어버린 듯 쿵쿵 뛰었다.

발레린은 늘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습관처럼 옆 침대를 보았다. 침대는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발레린은 잠시 빈 침대를 보다가 일어났다. 늘 하던 것처럼 창문을 보며 다리를 움직였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잠시 보다가 말했다.

“주인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발레린은 더 활기차게 움직였다. 발레린은 창문 밖에 있는 흰 구름을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로프, 우리 왕궁을 나가면 여행 떠날래?”

“여행이요?”

발레린은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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