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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04화 (104/130)

104화

“그러니까. 항상 웃고 다니셔서 만만해 보일 법도 한데 가까이 가면 또 은근히 쉽게 대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말이야.”

그때 하녀 한 명이 시계를 확인하고는 헐레벌떡 말했다.

“이만 가자. 하녀장님 오실 시간이야.”

그들은 빠르게 반대쪽 복도로 뛰어갔다. 발레린은 그들이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로프, 이렇게 듣기 좋은 뒷말은 처음이야.”

“저도 듣기 좋았습니다. 왕궁에 온 이후로 저런 말은 처음 듣는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왕궁에 왔을 때만 해도 발레린을 보고 무조건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 거기다 대놓고 왕궁에 저주 걸린 사람을 데려왔다고 말하는 하인까지 있었다.

발레린은 환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가 이내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내내 발레린을 보고 있던 그로프가 급히 물었다.

“주인님,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아니.”

“그러면 왜…….”

“아까 하인들 말 있잖아.”

“주인님께 좋은 말 아닙니까?”

“그 전에 한 말 말이야.”

“그 전에 한 말이라면 제르딘이 청혼서를 받아들였다는 말 말입니까?”

발레린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의 걸음도 차츰 느려졌다. 그로프는 발레린의 눈치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이지 않습니까?”

“하인들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

“배도스 공작이 일부러 퍼뜨린 걸 겁니다. 어쨌든 제르딘에겐 유리한 소문은 아닐 테니까요.”

“그렇긴 해. 배도스 공작이 왕자님께 흠집 내려고 하인들에게까지 소문을 퍼뜨렸겠지.”

그로프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느릿하게 걸어가던 발레린은 우뚝 멈춰 섰다.

“왕자님도 이 소문을 알고 있겠지?”

“하인들까지 알 정도면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할수록 발레린은 배도스 공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바쁜 왕자님에게 그런 소문까지 신경 쓰게 하다니.

“주인님, 다 왔습니다.”

발레린이 놀라며 고개를 들자 어느덧 제르딘의 집무실 앞이었다. 문지기들은 발레린을 보자마자 문을 열어 주었다.

발레린은 내심 기대하는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조용했다.

그곳은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유일하게 책상만이 여러 서류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왕자님이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 봐.”

그로프도 제르딘의 책상을 보고는 동의하듯 말했다.

“예전에는 책상이 무척 깨끗하지 않았습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배도스 공작이 너무 많이 권력을 쥐고 있어서 왕자님이 전보다 많이 바빠진 것 같아.”

그로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발레린은 상세히 설명했다.

“이전에는 배도스 공작의 권력이 커서 왕자님이 건드릴 게 없었는데, 이젠 배도스 공작에게서 그 힘을 빼앗았으니 많이 바빠진 거지. 원래 왕자님이 가져야 할 권력인데 말이야.”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짓고는 제르딘의 책상에 있는 서류를 뒤적거렸다. 보좌관은 노란색으로 표시된 서류를 들고 오라고 했다.

마침 서류 윗부분의 노란색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발레린은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서류를 잡아 들었다.

그러다 그 앞에 놓인 서류까지 딸려 와서, 발레린은 그 서류도 꺼내 보았다. 서류를 보자마자 발레린의 얼굴이 굳었다. 그 서류는 청혼서였다. 그것도 제르딘의 인장이 찍혀 있는 서류.

발레린은 굳은 얼굴로 서류를 훑었다. 내용은 제르딘에게 정식으로 청혼하는 것이었고 발레린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왕국의 이름과 함께 커다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 밑에는 제르딘의 인장이 찍혀 있었는데 무척이나 선명했다.

“주인님?”

발레린은 깜짝 놀라 그로프를 쳐다봤다.

“뭘 그렇게 자세히 보시는 겁니까?”

“왕자님의 인장이 찍혀 있어서.”

“인장이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청혼서를 다른 곳에 두었다. 그리고 노란색으로 표시된 서류만 손에 들었다.

“무슨 서류에 찍혔길래 주인님이 이렇게 놀라시는 겁니까?”

발레린은 빠른 걸음으로 제르딘의 집무실을 나왔다.

“청혼서였어.”

“청혼서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저 멀리 보좌관이 다가오고 있었다. 발레린은 서둘러 보좌관에게 가서 서류를 주었다. 보좌관은 활짝 웃으며 서류를 받고는 고개를 숙였다.

“왕자비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한결 일을 빨리 할 수 있었습니다. 왕자님께서도 기다리지 않으시고 바로 회의에 들어가실 수 있었고요.”

“다행이네요.”

발레린이 활짝 웃자 보좌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나저나 왕자비님.”

“네.”

“제겐 높임말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왕자님을 보좌하는 사람일 뿐이고…….”

“왕자님 밑에서 고생을 많이 하시잖아요.”

“그렇긴 해도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그리고 여태껏 왕자님을 잘 보좌해 주셔서 감사하기도 해서요. 그래서 존경심이 들어요.”

보좌관은 잠시 말을 잃고 발레린을 보았다. 발레린은 빙긋 웃고는 말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발레린이 인사하자 뒤늦게 보좌관이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가볍게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주인님, 그런데 사실입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청혼서였어. 왕자님의 인장이 찍혀 있었고.”

그 생각을 하자 발레린은 마음이 더 안 좋아졌다. 제르딘이 직접 명령해서 이름 모를 왕국의 청혼서를 받았다는 소문은 그저 검증되지도 않은 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제르딘의 인장이 그대로 찍혀 있었고 심지어 제르딘의 집무실에 있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

발레린이 멍하게 중얼거리자 그로프가 발레린의 눈치를 보았다.

“주인님, 그래도…….”

“청혼서에 왕자님의 인장까지 찍혀 있었으니까.”

발레린은 멍한 얼굴로 걸어가다가 이내 우뚝 멈춰 섰다.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왕자비님!”

루네스는 꽤 급한 걸음으로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왕자비님, 어디 다녀오셨어요?”

“보좌관님 도와주고 왔어.”

“다행이에요. 저는 왕자비님이 혹시 몸이 안 좋으셔서 그런 건 아닌가 해서 많이 걱정했거든요.”

“루네스,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리고 내 옆에는 항상 그로프가 있잖아.”

발레린이 어깨를 가리키자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루네스는 그로프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발레린에게 바쁘게 말했다.

“음식은 침실에 두었어요. 식지 않았나 걱정되네요.”

“어차피 식어도 상관없어. 맛만 좋으면 되니까.”

“정말 다시 데우지 않아도 되나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네스는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왕자비님 같은 분은 없어요. 그러고 보면 전 정말 운이 좋아요.”

발레린은 그나마 루네스의 말에 위안을 얻으며 침실로 들어갔다. 루네스는 방에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서 인사했다.

“왕자비님, 음식 드시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루네스는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발레린은 침실을 차분히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오는 침실이었다. 가구는 물론 심지어 발레린이 잤던 침대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발레린은 묘하게 마음이 안 좋았다. 발레린은 힘없는 걸음으로 벽에 걸려 있는 보랏빛 드레스를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었다. 흰 구름이 파란 하늘 사이로 유유히 지나갔다.

발레린은 창턱에 얼굴을 괴고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그때 파리 한 마리가 틈 사이로 들어오더니 발레린의 머리 주변을 빠르게 맴돌았다.

윙윙, 파리는 발레린의 머리에 붙었다가 다시 돌아다녔다가 반복했다. 발레린은 처음에는 손을 내젓다가 파리가 자꾸만 귀찮게 하자 훅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파리가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로프는 발레린의 어깨 위에 있다가 창문을 내려가서 죽은 파리를 먹었다. 그러곤 그로프는 탁자 위를 보다가 외쳤다.

“주인님, 음식 식겠습니다.”

발레린은 천천히 몸을 돌려서 식탁 앞에 앉았다. 그로프는 탁자에 뛰어올라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힘없이 음식을 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로프, 역시 왕자님이 가진 감정에 대해선 기대하면 안 되나 봐.”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왕자님이 이제는 나를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 동굴에 갔다 온 이후로 왕자님이 무척 많이 달라지셨고 내게 한 번도 들려주지 않은 농담을 하거나 툭하면 나를 보며 웃으셨잖아.”

“그렇긴 했습니다. 그러니 왕자는 주인님을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청혼서에 왕자님이 인장까지 찍은 걸 보면 왕자님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저 고마워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꽤 진지하지 않았습니까?”

“진지하긴 했지만 왕자님 성격이 원래 그렇잖아.”

발레린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여태껏 발레린은 제르딘에게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도 노골적인 그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기대를 했다.

제르딘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헛된 기대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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