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어차피 계약 결혼일 뿐인데 굳이 왜 정식으로 서약서를 제출하려는 걸까.’
마침 그로프도 발레린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작게 속삭였다.
“주인님, 왕자가 꽤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의중을 알 수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호텔에서 처음 이에 관해서 들었을 땐 제르딘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심이 기울여져 결혼 서약서를 제출하는 것에 대해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이상한 게 여럿이었다.
“왕자비님?”
발레린이 놀라며 고개를 들자 대신관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나마 지금 왕자가 하는 방법이 올바른 겁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발레린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의문이 많이 남았다.
‘대체 왕자님은 무슨 생각인 거지?’
그것부터 시작해서 왜 굳이 제르딘이 약식 서약서를 제출하지 않고 절차에 맞는 서류를 제출하는지……. 생각을 할수록 발레린은 가정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발레린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을 때 대신관이 말했다.
“배도스 공작이 왕자님의 명령을 받고 청혼서를 받아들였다는 소문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발레린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자 대신관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왕자님께서 직접 명령하셨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왕자가 그 청혼서를 받아들이겠습니까? 물론 왕자비님과의 서약서를 미룬다는 핑계로 다른 왕국 공주의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해괴한 소문이 있지만…….”
발레린은 호텔에서 몰래 들었던 제르딘의 말을 생각했다. 그땐 하나하나 모두 이해하기 힘들어서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듣고 있으니 발레린은 불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왕자님의 명령을 받고 배도스 공작이 청혼서를 받아들였다고요?”
“네, 저도 사실 믿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합니다. 물론 소문일 뿐이지만요.”
발레린은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르딘 주변에 떠도는 소문을 모두 믿지는 않았지만 이 소문은 신경이 쓰였다.
그때 그로프가 작게 속삭였다.
“소문뿐일 겁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제르딘이 어떤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리는지 잘 알았기에 발레린은 그 말이 그저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여태껏 보인 제르딘의 행동은 그가 그렇게 행동할 만큼의 여지가 없었다. 발레린은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하곤 대신관과 몇 마디 더 나누었다. 대신관은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발레린에겐 꽤 잘 대해 주었다.
“저와 유일하게 생각이 통하시는 분이니 이렇게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대신관은 보기 드물게 미소를 짓고는 차를 마셨다. 발레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다가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대신관님, 전 이만 일어나 볼게요.”
“벌써 가시게요?”
“네, 시간이 꽤 많이 지나간 것 같아서요.”
대신관은 시계를 슬쩍 보더니 차분히 말했다.
“이곳에서 점심을 드시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점심이요?”
“시간도 마침 점심시간이니 저희가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발레린은 내심 대신전에서 나오는 음식이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제르딘이 혹시나 점심을 같이 먹는 것을 기다릴까 싶어서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관님,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럼 나중에 다시 오십시오. 그땐 꼭 음식을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침 대신관도 함께 일어나 친절히 말했다.
“그럼 가시죠.”
발레린이 의아하게 보자 대신관이 미소를 지었다.
“저희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뜻밖의 환대에 발레린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프는 대신관을 힐끗 보고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신관은 주인님을 많이 생각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대신관님이 정말 나랑 생각이 잘 맞으셨나 봐.”
발레린이 작게 말하자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관을 쳐다봤다. 대신관은 발레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발레린은 대신관과 함께 대신전을 나갔다. 마차는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대신관은 마차 앞에 서며 발레린에게 인사를 했다.
“왕자비님, 다음에 꼭 다시 오십시오. 책에 대해서 다시 깊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도 올게요.”
발레린은 예법에 맞게 인사하고는 마차에 탔다. 마차는 빠르게 대신전을 벗어나 넓은 도로를 달렸다.
마차가 도착한 시간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발레린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루네스가 인사를 하며 말했다.
“왕자비님,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책에 관해서 이야기할 게 많아서.”
“책이요?”
“대신관님은 의외로 나와 책 취향이 같더라고. 거기다 책에 대한 견해도 잘 통해서.”
루네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의외네요. 저는 대신관님이 엄청 까다롭고 예민하다는 소리만 들었거든요.”
발레린도 대신관이 의외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이젠 제르딘에 대해 쓴소리는 하지 않아서 괜찮을 뿐이었다.
발레린은 왕궁으로 걸어가면서 물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지?”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루네스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왕자님은 혹시 점심 드셨을까?”
“그건 모르겠어요. 아마 지금까지 말씀이 없는 걸 보면 이미 드신 것 같기도 해요.”
루네스는 발레린의 눈치를 보았다. 발레린은 제르딘이 먼저 점심을 먹었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제르딘이 바쁜 것 같아서 더 그랬다.
‘또 기대했네.’
그럼에도 발레린의 표정이 살짝 식었다. 작정하고 기대한 것도 아니고 그저 은근한 기대였지만 아직 면역이 덜 되었는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발레린은 이내 밝은 얼굴로 왕궁에 들어갔다. 우울한 생각을 해 봤자 우울한 일만 덕지덕지 붙을 뿐이었다.
“왕자비님, 점심은 방으로 가져갈까요?”
발레린이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는 곧바로 물러났다. 발레린은 가볍게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때 계단 위에서 익숙한 사람이 서류를 가득 들고서 헐레벌떡 내려오고 있었다.
“보좌관님!”
보좌관은 대번에 고개를 들어서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왕자비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어디 가시나요?”
보좌관은 무척이나 바쁜 듯 계단을 내려와서 발레린 앞에 마주 섰다.
“잠시 자료를 찾으러 책 보관소로 가려고 합니다.”
“이 자료를 다 들고요?”
“네, 책 보관소에 갔다 온 후에는 또 왕자님의 집무실에 들러서 왕정 회의 자료를 들고 가야 하고요.”
“그럼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거네요.”
“어쩔 수 없죠. 다른 하인들도 모두 바쁘거든요.”
보좌관은 이마에 흐른 땀을 대충 닦아 냈다. 그는 꽤 바쁘고 힘들어 보였다.
“그럼 보좌관님, 왕자님의 집무실에 있는 서류는 제가 갖다 드릴게요!”
“아닙니다. 괜히 왕자비님께 제 일을…….”
“아니에요. 전 지금 할 일도 없는걸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발레린이 밝은 웃음을 짓자 보좌관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럼 제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언제든지 부탁하세요!”
발레린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자 보좌관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럼 왕자님의 집무실에서 윗부분에 노란색으로 표시된 서류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른 찾아서 갖다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왕자비님. 저는 책 보관소에 갔다가 곧바로 이곳으로 올 겁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계단을 올라갔다.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면서 말했다.
“주인님, 요즘 왕자도 그렇고 배도스 공작도 그렇고 많이 바쁜 것 같습니다.”
“그러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가.”
만약 배도스 공작이 제르딘을 건드린다면 발레린은 가만히 있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나마 지금은 제르딘을 위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지만.
어쨌든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제르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발레린은 제르딘을 생각하며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제르딘의 집무실에 거의 도착할 때쯤이었다.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왕자님께서 왕자비님과의 결혼 서약서를 제출하는 걸 미루고 다른 왕국에서 온 청혼서를 받아들인 거 말이야.”
“언뜻 듣긴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면 왕자님도 괜히 잘못 얽혀서 상황이 위험해질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렇지.”
하인 두 명이 제르딘의 집무실 근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복도가 워낙 조용하고 제르딘의 집무실밖에 없었기에 사람들은 거의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공녀님보다는 공주님이 낫지 않아?”
“아니, 난 차라리 지금 왕자비님이 나은 것 같아. 왕자비님 근처에서 일하는 하인들 말을 들어 보면 까다롭지도 않고 오히려 잘 대해 준다고 들었어.”
“그렇게 평판이 좋아?”
“심지어 내가 아는 애는 왕자비님을 그렇게 무서워하다가 이제는 왕자비님이 가장 좋대.”
“왜?”
“다른 왕궁 사람들과 다르게 웃으면서 대하셔서.”
“하긴, 나도 멀리서 왕자비님 웃는 모습을 봤는데 보면서도 어딘가 마음이 환해지는 기분이긴 했어.”
“그렇지? 그분 웃음이 참 묘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