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그때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뒤 조심스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다시 눈을 떴다. 익숙한 어둠이 몰려왔지만 이상하게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발레린은 닫힌 문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분명 왕자님은 나와 맺어지는 걸 꺼리실 텐데.”
그때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면서 대답했다.
“주인님, 이 정도면 왕자가 주인님을 좋아하는 걸 알아 달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
“설마…….”
발레린은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사실 발레린도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굳이 왕자가 이곳까지 온 것도 이상합니다. 잠이 안 온다고 해도 잠깐 다른 곳을 산책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저 걱정되어서 왔겠지.”
“걱정이라는 것도 관심이 있어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발레린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긴 아무 관심도 없으면 걱정도 안 할 텐데.”
“그러니까 왕자는…….”
“하지만 그로프, 여태껏 왕자님은 내게 친절하셨잖아. 그래서 나도 희망을 가졌던 거고.”
“그렇지만 주인님…….”
“그리고 산책을 하다가 내 병실에 잠깐 들른 걸 수도 있잖아.”
그로프는 그저 발레린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발레린은 괜한 기대는 하고 싶지 않아 미소를 짓고는 바로 누웠다. 하지만 발레린의 머릿속에는 그로프가 한 말이 둥둥 떠다녔다.
‘정말 왕자님이 내게 관심이 있는 건가?’
그러나 발레린은 쉽사리 정답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은 또다시 복잡하게 데구루루 돌아갔다.
발레린이 잠에서 깼을 땐 이른 아침이었다. 늦은 밤에 잠들었긴 하지만 평소 발레린은 일찍 일어나는 것에 습관이 배어 있어서 피곤한 몸을 일으켜 겨우 눈을 떴다.
“주인님, 잘 주무셨습니까?”
밝은 소리에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면서 또랑또랑 눈을 빛냈다.
“잠을 오래 못 자긴 했지만 그래도 잘 잤어. 확실히 왕궁 침대는 좋은 것 같아.”
발레린은 그나마 개운한 기분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미 그로프는 일어나서 발레린에게 펄쩍 뛰어와 어깨 위에 안착했다. 발레린은 놀라는 것도 없이 창가 앞에 서서 멍하니 다리를 움직였다.
여전히 발레린의 머릿속에는 제르딘이 한가득했다. 발레린은 맑은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그로프.”
“네, 주인님.”
“정말 왕자님이 나를 좋아하는 걸까?”
“어제는 정말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았습니까? 어느 누가 잠이 오지 않는다고 주인님 병실을 찾아오겠습니까?”
“왕자님 말씀대로 내가 걱정되어서 오신 것일 수도 있잖아.”
“이미 왕자는 의사에게 주인님의 상태를 보고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거기다 왕자는 주인님을 보고 웃었습니다. 어제는 특이하게 이상한 농담까지 하고요.”
“나도 왕자님이 농담한 게 신기하긴 했어. 그리고 농담이긴 했지만 나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기도 했고.”
“제 생각에는 왕자가 주인님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발레린은 우뚝 멈춰 섰다.
“설마!”
“그 상황엔 진담처럼 느껴졌습니다.”
발레린은 어제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때 그로프가 확신한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왕자는 주인님을 좋아하는 겁니다!”
“정말 그럴까?”
“네, 확신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왕자가 이렇게까지 행동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은 깜짝 놀라며 문을 바라봤다. 또다시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문이 열리더니 루네스가 들어왔다. 그나마 발레린은 마음을 놓으며 활짝 웃었다.
“루네스, 오늘은 일찍 왔네.”
“오늘부터 제가 다시 왕자비님을 모셔도 된다고 하셔서요.”
“오늘부터?”
“네, 왕자님께서 제가 먼저 일을 하도록 힘써 주셨어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가 활기차게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오늘부터 왕자비님이 병실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하던데 들으셨나요?”
“아니, 처음 듣는데.”
루네스는 활짝 웃었다.
“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제가 들은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왕자비님께 전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만약 왕자비님이 주무시고 계시면 쪽지라도 남겨 놓으려고 쪽지까지 준비해 왔어요.”
루네스는 작은 종이를 흔들었다. 꽤 꼼꼼한 행동에 발레린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루네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새삼 발레린은 루네스가 한 달만 일했는데 전용 하녀로 뽑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발레린이 미소를 지으며 보자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사실 이런 것도 어머니에게 많이 배웠어요. 어머니가 왕자님의 궁에서 꽤 오래 있었거든요.”
그 말을 하면서 루네스는 손에 들고 온 은제 쟁반을 내밀었다.
“왕자비님께 편지가 엄청 많이 왔어요.”
발레린이 관심 가지며 보자 루네스가 쟁반에 담긴 편지를 탁자에 놓았다.
“보낸 사람을 보니까 대부분 권력을 가진 분이셨어요. 그중에는 대신관님과 세드릭스 부인까지 있었어요.”
그로프도 관심이 가는지 발레린의 어깨에서 고개를 빼 들어 보았다. 발레린은 여러 편지 봉투를 하나하나 살폈다. 루네스의 말대로 모두 어디선가 이름을 들어 본 사람이었다.
“이분들이 왜 갑자기 편지를 보냈지?”
“아마도 왕자비님이 독 때문에 쓰러지셔서 안부차 보낸 것 아닐까요? 제가 보좌관님께 들었는데 왕자님께서 이곳에 방문하는 일반 귀족들은 모두 막으셨대요.”
“왕자님이?”
“네, 왕자비님께서 독 때문에 쓰러지셨으니 외부 사람은 모두 막았대요. 그전에 헬릭스 님이 오시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여태껏 제르딘이 방문한 것 빼고는 다른 사람은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거기다 제르딘은 헬릭스가 왔을 때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새삼 발레린은 제르딘이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것이 고맙다가도 그의 행동이 묘하게 감정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때 그로프가 발레린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주인님, 이 정도면 정말 왕자가 좋아하는 겁니다.”
발레린은 마음이 술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제르딘이 직접 말하지 않았기에 기대는 버렸다.
발레린이 멍하니 편지 봉투를 보고 있자 그로프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그나저나 배도스 공작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 말에 발레린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서 그로프를 보았다. 그로프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감히 독까지 타면서 주인님을 죽이려고 한 사람 아닙니까?”
“그렇긴 해. 다행히 내가 더 건강해지긴 했지만…….”
발레린은 말을 하다 말고 루네스를 쳐다봤다. 루네스는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루네스, 요즘 배도스 공작은 어때?”
“배도스 공작님은 요즘 이상하게 얌전한 것 같더라고요. 왕자님이 말씀하신 사병 축소도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심지어는 왕자님께 사과까지 했다고 하더라고요.”
“사과를 했다고?”
“네, 그동안 왕궁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요.”
그때 그로프가 작게 속삭였다.
“그저 보여 주기식 아닙니까? 뒤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지 누가 압니까?”
발레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게. 배도스 공작이 얌전해졌다니. 분명히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왕자비님, 요즘에 배도스 공작 측근들이 많이 조용해지긴 했어요.”
“왜?”
“왕자님이 요즘에 배도스 공작이 가지고 있던 지휘권을 가져오셨거든요. 그래서 요즘 배도스 공작 사람들이 몸을 사리고 있어요.”
“하긴, 내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탔으니 조만간 배도스 공작 측근들이 걸리는 게 당연하겠지.”
그때 그로프가 물었다.
“주인님, 그럼 지금도 때를 봐야 하는 겁니까?”
“아직 배도스 공작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신중하게 행동해야 해.”
“하지만 배도스 공작은 주인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아직 정확한 증거도 나오지 않았잖아. 왕자님도 지금 그 증거를 찾으려고 애쓰고 계시기도 하고.”
“하긴 증거도 나오지 않았는데 잘못 움직이면 오히려 주인님이 위험해질 것 같기도 하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건든 건 상관없는데 만약 배도스 공작이 왕자님을 건들면 나는 이렇게 가만히 못 있을 것 같아.”
발레린은 주먹을 쥐었다. 죽이려는 사람도 발레린에게 쉽게 다기오지 못하는 마당이었다. 어차피 독은 발레린의 몸속에도 널린 것이었고 아무리 독한 독이어도 쉽게 죽지 않으니 발레린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제르딘을 위협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었다. 아직 배도스 공작이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모양은 보이지 않았지만 만약 그런다면 발레린은 어떻게 해서든지 제르딘을 구할 것이다.
‘왕자님이 아니면 이 왕국에서 왕이 될 사람은 없으니까.’
거기다 발레린이 난생처음 반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발레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르딘을 지켜 주고 싶었다. 비록 제르딘은 반대로 생각하고 있어도 말이다.
그때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왕자비님, 편지에는 답장을 어떻게 보낼까요?”
그제야 발레린은 손에 든 편지 봉투를 다시 보았다.
“모두 만난다고 보내 줘. 안 그래도 요즘 몸에 활기가 넘쳐서 사람을 만나고 싶거든.”
루네스는 대번에 멈칫하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왕자비님, 이분들을 다 만나시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