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어쨌든 공녀가 아니었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세력을 펼치지 못했을 겁니다.”
발레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제르딘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그와 동시에 제르딘이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것은 아무래도 그의 다정한 성격 덕분도 있지만 세력을 넓힌 것에 대한 고마움 같았다.
발레린은 새삼 제르딘에게 사실대로 묻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을 좋아하냐고 직접적으로 물었다면 제르딘은 더 부담스럽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발레린이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자 문득 제르딘이 물었다.
“음식은 더 안 드셔도 됩니까?”
안 그래도 발레린은 식판에 있는 음식을 모두 먹었기에 배가 불렀다.
“더 안 먹어도 돼요. 배가 불러서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곤 하인을 불렀다. 곧 하인이 식판을 치우고 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주변이 조용해지며 묵묵한 공기가 흘렀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빤히 바라봤다. 발레린은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이상하게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제르딘의 얼굴을 대놓고 봤겠지만 이제는 제르딘이 피곤해하니 그러지도 못했다.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제게 궁금한 건 없으십니까?”
“궁금한 거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꽤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이라곤 ‘제르딘이 자신을 정말로 좋아하는지’였지만 발레린은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이전에 엄청 기대하다가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을 때의 실망감이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었다.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없어요.”
“있을 것 같은데.”
웃음기가 섞인 말이었다. 의외의 말에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가볍게 말했다.
“황금 마검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제야 발레린은 제르딘이 질문한 의도를 알아차렸다. 발레린은 마음속이 약간 씁쓸하게 식긴 했지만 재빨리 물었다.
“황금 마검은 어떻게 됐어요? 조사는 다 끝났나요?”
“아마 조만간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그곳에 황금 마검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황금 마검이 한 자루라는 정확한 증거도 없으니까요.”
“만약 그곳에 황금 마검이 나오지 않더라도 조사관을 더 꾸려서 주변을 탐색하게 하려고 합니다.”
“정말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새삼 벅차올랐다. 처음 발레린이 황금 마검은 두 자루라는 가설을 말했을 때도 제르딘은 발레린의 의견에 그다지 따르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르딘이 자처해서 일을 하고 있었다.
“왕자님, 감사해요. 제 의견을 많이 반영해 주셔서요.”
“지금 생각해 보면 공녀의 의견도 틀린 건 아닙니다. 어쨌든 공녀 말대로 황금 마검이 하나라는 증거도 없으니까요.”
발레린은 새삼 기뻐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이 왕궁에 제르딘 같은 사람이 몇 명만 더 있다면 왕궁은 훨씬 평화로울 것이다.
그때 문득 발레린은 루네스가 말한 하인이 생각났다.
“제가 루네스에게 들었는데요. 생각보다 배도스 공작을 따르는 하인들이 많다고 해요. 그래서 죗값을 받아야 하는 하인들도 떳떳하게 지낸다고 들었어요.”
제르딘은 딱히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그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만간 그 부분도 처리할 겁니다. 어차피 공녀에게 독을 탄 사람도 배도스 공작 측 사람일 게 뻔하니까요.”
그때 빠르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제르딘의 눈썹이 잠시 일그러졌다. 그러나 찰나였다. 그는 발레린을 한번 보고는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갑자기 나타난 제르딘에 보좌관은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지?”
제르딘의 낮은 목소리에 보좌관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왕자님, 급한 일입니다. 지금 곧바로 가셔야…….”
제르딘의 표정이 다시 무감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발레린에게 말했다.
“저는 일 때문에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어서 가 보세요. 전 괜찮아요.”
제르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인 뒤 병실을 나갔다. 발레린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면서 말했다.
“주인님, 아무래도 왕자가 주인님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발레린은 깜짝 놀라며 그로프를 쳐다봤다.
“설마, 그로프. 아닐 거야. 나도 아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냥 왕자님이 내게 고마워서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도 그것치고는 지나친 관심 아닙니까?”
“여태껏 왕자님은 왕궁에 계시면서 세력을 가지지도 못했잖아. 이제야 조금씩 힘이 생기니까 그러시겠지.”
발레린은 제르딘을 왕궁 앞에서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제르딘은 지금과 다르게 무척이나 권태로워 보였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왕자님께 도움이 되어서 그나마 행복해. 왕자님이 나를 사랑할 수 없다고 해도.”
“하지만 아까 제가 본 얼굴은 분명…….”
“그리고 처음부터 왕자님은 나나 나와의 아이를 원치 않으셨잖아. 어쨌든 나는 지금 능력이라고 해도 독기가 몸속에 흐르니까, 왕자님은 나 같은 사람과는 맺어지고 싶지 않으실 거고.”
그로프는 발레린을 빤히 쳐다봤다. 발레린이 미소를 지으며 응시하자 그로프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 같은 사람은 주인님을 그렇게 생각해도 저는 주인님이 좋습니다. 이 세상에 주인님 같은 분은 주인님뿐이니까요.”
“고마워, 그로프. 내게도 너 같은 개구리는 너뿐이야.”
그로프는 개꿀개꿀 울었다. 그 소리는 꽤 명랑하고 밝았다.
캄캄한 밤이었다. 온 주변에 어둠이 내려앉았는데도 발레린은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너무 활기가 넘치는 탓이었다. 발레린은 잠시 숨을 내쉬다가 눈을 감았다. 곧 머릿속에는 제르딘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발레린은 눈을 떴다. 주변은 무척이나 캄캄했다. 발레린은 멀뚱멀뚱 어둠을 응시했다. 그나마 창가에서 달빛이 새어 나와서 주변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어둠은 아니었다.
“주인님, 잠이 오지 않는 겁니까?”
그로프의 소리에 발레린은 놀라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로프, 아직 안 잤어?”
“주인님께서 잠을 설치는 것 같아 걱정이 되어서요.”
“내 걱정하지 말고 자. 어차피 나는 이르게 잠들기는 그른 것 같아.”
“왜요?”
“맹독을 먹어서 그런지 머릿속이 무척 활발하거든. 몸도 근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까 발레린은 의사가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외쳐서 바깥도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밤이었고 이젠 잘 시간이었다.
그때 천천히 문이 열렸다. 발레린이 놀라서 고개를 들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왕자님?”
제르딘은 꽤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직 안 잤습니까?”
“잠이 안 와서요.”
그 말에 제르딘은 빠르게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지금 곧바로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아니에요! 의사는 무슨, 그냥 말 그대로 잠이 안 와서 그런 것뿐이에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뚫어지게 보았다. 발레린은 괜히 시선을 피하며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곁에서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갑자기 들린 소리에 발레린은 순식간에 고개를 들었다. 제르딘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발레린과 눈을 맞췄다.
발레린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전 괜찮아요. 오히려 몸에 너무 활기가 넘쳐서 잠이 안 오는걸요.”
“저도 잠이 안 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왕자님도 잠이 안 오신다고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바쁘셔서 그런 것 아니에요? 일이 너무 많아서.”
“이전에도 잠이 안 오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향주머니를 많이 썼고요.”
발레린은 문득 제르딘과 같은 방을 썼을 때를 떠올렸다. 늘 발레린이 먼저 자서 몰랐지만 그래도 제르딘은 향주머니를 쓰지는 않았었다.
“공녀도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하니 향주머니라도 갖다 줄까요?”
“아니요. 괜히 그러실 필요 없어요.”
발레린은 제르딘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침대에 누웠다. 잠시 조용한 분위기가 흘렀다. 발레린은 슬쩍 제르딘을 쳐다봤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제르딘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공녀, 자도 됩니다.”
“왕자님은 안 주무세요?”
“저는 잠이 안 와서요.”
그러고 보면 제르딘은 왜 잠이 오지 않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왕자님은 왜 잠이 안 오시나요?”
“공녀 때문에요.”
“저 때문이라고요?”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르딘이 웃었다.
“농담입니다. 공녀 때문이 아니라 생각이 많아서요.”
발레린의 심장은 그나마 조금씩 진정되었다. 제르딘은 주변에 있던 이불을 정리해 주었다. 발레린은 어색한 기분을 피하고파 서둘러 말했다.
“그럼 전 잘게요.”
“네, 주무세요.”
나긋하게 떨어지는 어투였다. 발레린은 눈을 감아도 눈을 뜬 것처럼 상황이 생생했다. 거기다 아까 제르딘의 태도는 어쩐지 낯설었다.
‘농담이라니.’
여태껏 봐 온 제르딘은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왕자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꽤 많이 바뀐 제르딘의 태도에 발레린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