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제르딘은 발레린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자연스레 말했다.
“그래도 음식을 먹어야 힘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제르딘은 미소를 짓곤 곧바로 설렁줄을 당겼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하인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음식을 이곳으로 가져와.”
발레린은 서둘러 제르딘에게 물었다.
“혹시 왕자님도 이곳에서 드시나요?”
“아니요. 전 이미 먹고 왔습니다.”
“다행이에요. 전 혹시라도 왕자님께서 음식을 드시고 오지 않았을까 봐 걱정했거든요.”
“걱정이요?”
“요즘 왕자님께서 잘 먹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아서요. 요즘같이 바쁘면 특히 음식을 든든하게 챙겨 드셔야 하거든요.”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꽤 노골적이라 발레린은 천천히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주변 분위기가 이상했다.
발레린은 괜히 뛰는 심장을 무시하고서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멀뚱멀뚱 보면서 개꿀개꿀 울었다. 그러고서 발레린에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예전에 동굴에서 봤던 왕자의 얼굴이 지금 저 얼굴입니다.”
그로프의 말에 발레린은 슬쩍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발레린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 보면 착각할 정도의 시선이었다.
발레린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긴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제르딘이 이렇게까지 뚫어지게 쳐다보던 때가 있었던가? 발레린은 다시 제르딘을 쳐다봤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제르딘이 미소를 지었다. 발레린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때 그로프가 속삭였다.
“지금 주인님을 놀리는 것 같습니다.”
“놀린다고?”
“놀리지 않고서야 저렇게 착각할 만큼 주인님을 보고 있겠습니까?”
“하지만 왜 굳이 나를 놀리는 건지 이해가 안 돼. 왕자님은 바쁜 분이시고…….”
“공녀.”
낮은 목소리에 발레린이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제르딘이 진지하게 말했다.
“공녀를 놀리기 위해 그렇게 본 건 아닙니다. 기분이 나빴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왕자님께서 굳이 제게 왜 사과를…….”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화들짝 놀라며 문을 쳐다봤다. 마침 하인이 문을 열고서 음식을 들고 왔다. 하인들은 제르딘을 힐끗 보고서 조심스럽게 음식을 탁자에 놓았다.
하인들이 물러가자 제르딘이 돌아봤다. 발레린이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자 제르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발레린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탓에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로프도 놀랐는지 발레린의 어깨 위에서 중얼거렸다.
“주인님, 놀랐습니다.”
“미안해. 그로프, 나도 놀라긴 마찬가지야.”
“괜찮습니다.”
그로프는 곧 귀뚜라미가 모여 있는 상자로 펄쩍 뛰었다. 발레린도 쭈뼛거리며 탁자 앞에 앉았다. 제르딘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음식은 꽤 푸짐했다.
“왕자님, 같이 드시지 않아도 정말 괜찮나요?”
“제 걱정은 마시고 마음껏 드세요.”
발레린은 천천히 포크를 집었다. 제르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발레린은 우선 음식을 먹었다. 분명 아까는 배가 고프지 않았으나 막상 음식을 보니 입맛이 돌았다.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포크를 움직이며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한참 먹다가 발레린은 문득 주변이 조용한 것을 깨달았다. 그로프는 어느새 귀뚜라미를 다 먹었는지 발레린을 보고 있었다.
발레린은 음식을 씹으며 제르딘을 힐끗 쳐다봤다. 굳이 이 시간에 온 것도 그렇고, 바쁜데 찾아온 것도 그렇고, 이름까지 부르고 심지어 의사에게 보고를 받는데도 제르딘은 찾아왔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제르딘이 이곳까지 온 것은 발레린에겐 큰 의미였다.
‘만약 내게 관심이 없었다면?’
그럼 굳이 제르딘이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발레린은 마음속이 벅찬 기분이 들어 곧바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마침 빈 잔에 물을 따르고 있었다. 그는 물을 따른 뒤 발레린에게 건넸다.
발레린은 물 잔을 조심스레 받으며 제르딘을 힐끗거렸다. 그는 발레린의 먹는 음식을 훑고 있었다. 마치 독이라도 찾는 것처럼 눈빛에는 빈틈이 없었다.
“왕자님.”
그 말이 울리자마자 제르딘이 시선을 들었다. 순간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치자 발레린은 잠시 심장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발레린은 가까스로 입 안에 있는 음식을 삼키고서 물었다.
“제가 착각해도 되는 건가요?”
“뭘 말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왕자님이…….”
발레린은 차마 다음 말은 할 수 없었다. 또 혼자 착각해서 제르딘을 당황하게 하면 어떡하나 걱정부터 들었다.
제르딘이 꽤 호기심 있게 쳐다봤다. 그는 발레린에게 눈빛을 맞추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지나친 관심에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발레린은 고개를 돌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런데 바쁘시지 않나요?”
물론 발레린은 제르딘이 직접 찾아와서 기쁘긴 했지만 혹시라도 제르딘이 저 때문에 피해가 갈까 걱정이었다.
“바쁘긴 하지만 공녀를 챙길 시간은 있습니다.”
발레린은 순간 말을 하려다 말았다. 어쨌든 제르딘은 주변 하인들에게는 엄격해도 자신과 계약 관계인 사람은 잘 챙기는 것일 수도 있었다. 거기다 계속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것도 제르딘에겐 피곤하게 다가올 것 같아 발레린은 입을 닫았다.
“혹시 제가 와서 공녀가 피곤하다면…….”
“아니에요! 왕자님이 찾아오신다고 해서 전혀 피곤하지 않아요.”
제르딘은 빙긋 웃었다.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더 안 드십니까?”
발레린은 제르딘의 말이 다 들리지 않았다.
‘왕자님이 저렇게 웃으신다고?’
발레린은 혹시라도 꿈인가 싶어서 눈을 두 번 깜빡였다. 하지만 앞에 있는 제르딘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제르딘이 흥미롭게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왕자님, 진심이세요?”
그 말에 제르딘은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
“뭘 말입니까?”
“그 웃음이요.”
제르딘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웃음이요?”
“네.”
“웃음이 왜?”
“왕자님한테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웃음이라서요.”
“제가 웃었다고요?”
“네.”
제르딘은 쉽사리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당황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까 분명 웃으셨는데.”
그로프도 옆에서 거들었다.
“분명 주인님을 보면서 아까부터 계속 웃었습니다.”
제르딘은 쉽사리 믿지 못하는 듯 그로프를 쳐다보다가 이내 발레린을 보았다.
“제가 공녀께 그렇게 웃었습니까?”
“네.”
제르딘은 헛웃음을 지었다. 발레린은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는 나직이 말했다.
“주인님이 잘못 본 게 아닙니다. 저도 봤으니까요.”
발레린은 다시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어이가 없는지 빈 그릇을 멍하니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갑자기 마주친 시선에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감사해요. 왕자님.”
제르딘이 눈썹을 살짝 움직이며 되물었다.
“뭘요?”
발레린은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순간 아까 사르티아 공작이 다녀간 것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제르딘의 명령으로 직접 찾아왔다고 했다.
“아버지께 저를 만나 보라고 하셨다면서요. 그래서 아버지와 이야기하면서 그동안 궁금해했던 걸 알았어요.”
제르딘이 궁금해하며 쳐다보자 발레린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저를 싫어하지는 않나 항상 생각했었거든요. 아버지는 저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아서요.”
“…….”
“그런데 아버지는 저를 싫어하지는 않는대요.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이제야 속이 시원해요.”
발레린은 아까 알았던 사실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제르딘은 물끄러미 발레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묘한 얼굴이었다.
발레린이 의아해하며 보자 제르딘이 말했다.
“그나마 제 아버지보다는 낫네요.”
“왕자님 아버지요?”
“제 아버지는 도망자에 불과하거든요.”
제르딘은 미묘하게 미소를 짓고는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루네스는 조만간 다시 일하게 될 겁니다.”
“정말요?”
“어차피 조사도 다 끝났고 배도스 공작이 계획적으로 공녀의 주변 사람을 자르려는 게 뻔히 보여서 이번에는 제 주관으로 할 겁니다.”
“그럼 이전에는 왕자님의 뜻이 없었나요?”
“이전에는 배도스 공작이 모두 맡아서 했습니다.”
“왜요? 배도스 공작이 일을 모두 잘 해결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땐 제 세력도 없었고, 제가 나서 봤자 반감만 사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왕자님의 세력이 생긴 건가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 덕분입니다.”
“제 덕분이라니요! 왕자님께서 그동안 잘 꾸려 오신 거죠.”
“아닙니다. 공녀가 아니었으면 사르티아 공작은 물론 원로원 귀족들이 저를 편들어 주지 않았을 겁니다. 거기다 대신전 사람들까지 공녀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대신전 사람들까지요?”
“대신관이 공녀를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더군요.”
그러고 보니 대신관이 다시 대신전으로 오라고 한 것이 생각났다. 그동안 발레린은 여러 일 때문에 가지 못했지만 새삼 그들이 아직도 기억해 주니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