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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97화 (97/130)

97화

발레린은 아무래도 믿기지 않아 빠르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여태껏 찾아오지 않다가 이제야 오는 것도 그렇고 제게 미안해하는 것도 그렇고요.”

“…….”

“그리고 아버지는 철저하게 돈에 따라가시는 분이잖아요. 그러니 제가 왕자님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뜬금없었지만 반대하지 않으셨고요.”

“발레린, 그건…….”

“물론 아버지가 반대할 이유도 없긴 했어요. 어차피 저는 저주에 걸린 사람이었고 오히려 왕자님과의 결혼은 가문의 영광이잖아요.”

사르티아 공작은 말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제겐 유일한 직계 가족이지만 사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별로 없어요. 그냥 어머니가 그리울 뿐이에요.”

발레린은 여전히 탑에서 본, 해인저 부인과 결혼하는 아버지가 잊히지 않았다. 그것도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르티아 공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왕자님이 보내셨다.”

“왕자님이요?”

“그래, 왕자님께서 네 걱정을 많이 하시는 것 같더구나. 왕자님께서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셔서 외로움이 뭔지 잘 아시니 내게 명령을 내리신 거겠지.”

발레린은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르딘이 사르티아 공작을 이곳으로 보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깨 위에 있는 그로프도 입을 떼지 못하고 발레린만 쳐다봤다.

발레린이 멍하게 있는 사이 사르티아 공작이 말했다.

“그동안 내가 너에게 많이 무심했던 것도 사실이고. 어쨌든 이렇게 찾아온 것도 왕자님의 명령이 있긴 했지만 나도 진심이란다.”

“…….”

“그러고 보면 처음 널 만났을 때 그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구나.”

발레린이 고개를 들어 보자 사르티아 공작이 말을 이었다.

“물론 네 숨결이 닿아도 죽지는 않았지만 그땐 두려웠단다. 거기다 해인저 부인이 퍼뜨린 소문 때문에 네가 나를 죽일 줄만 알고 너를 그렇게 내버려 뒀었지.”

“하지만 어머니는 저를 만나러 오셨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방독면을 쓰지 않아도 멀쩡했고요.”

“그건 라를린이 가진 특별한 능력 때문이었어. 평범한 사람인 나는 네가 두려웠고.”

사르티아 공작은 무척이나 난처한 듯 쳐다봤다. 발레린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 숨결 때문에 뒤로 넘어갔다면 그럴 만해요. 어쨌든 아버지에겐 최악의 경험이었겠죠. 제가 처음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뒤로 넘어가셨다면서요?”

사르티아 공작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라를린이 하는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 그저 네가 저주를 퍼뜨려서 주위 사람을 위험하게 하는 것 같았거든. 라를린에게도 너와 만나지 말라고 말렸지만 라를린은 듣지 않았지.”

“그나마 어머니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방독면을 쓰지 않고도 괜찮았던 거죠?”

“그렇단다. 라를린은 어느 누구보다 강한 마법사였으니까.”

발레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어머니가 그리워졌다. 항상 발레린에겐 좋은 말을 건네주고 호기심을 해결해 주면서 따뜻한 품을 내어주던 어머니였다.

하지만 발레린은 지금 아버지가 마냥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인저 부인과 재혼했잖아요.”

“그땐 너무 힘들어서…….”

“전 해인저 모녀가 어머니의 관 앞에서 웃는 걸 봤어요.”

그 말에 사르티아 공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레린을 바라봤다.

“그게 사실이냐?”

“제가 탑에 갇히기 전부터 늘 말했던 건데 모르셨나요?”

사르티아 공작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그건…….”

“그런데 그땐 하인들조차 제 말을 들어 주지 않았어요. 그러니 아버지가 제 말을 들어 줄 리 없었겠죠.”

사르티아 공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발레린은 사르티아 공작을 뚫어지게 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아버지, 정말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 말에 사르티아 공작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는 꽤 생생했다.

“뭐든지 물어보거라.”

발레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어렸을 때 저를 만나러 오지 않았던 건 저를 싫어해서 그랬던 건가요?”

사르티아 공작이 두려워했다는 것은 들었지만 발레린은 정확히 알고 싶었다. 정말로 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했는지.

“싫어하다니?”

“그땐 아예 저를 보러 오지 않으셨잖아요.”

“아니다. 발레린. 내가 어떻게 너를 싫어하겠니?”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까지 자주 만나러 오지 않았잖아요.”

“그건…….”

“그래서 저는 어머니에게 미안했어요. 아버지가 절 싫어하셔서 괜히 어머니까지 싫어하나 싶어서.”

“발레린, 아니야. 널 싫어하지 않았다.”

“그럼 어머니는 왜 그렇게 내버려 두셨나요? 그리고 해인저 모녀가 오면 무척 반가워했잖아요.”

“무슨 말을 해도 너에겐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그땐 나도 무지했었다. 생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사르티아 공작의 얼굴은 약간 떨떠름해 보였다. 그는 굳은 얼굴로 있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만약 그때 진실을 일찍 알았더라면 라를린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거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늦었구나.”

사르티아 공작은 먼 기억을 더듬는 듯 공허해 보였다. 과거를 생각하면 안 좋은 일밖에 없었다. 저주에 걸렸다며 받은 무시와 멸시. 그리고 아무리 말해도 진실을 믿어 주지 않고 오히려 억울한 누명을 덧씌우던 일 등.

하지만 과거 일은 과거였고 발레린은 현재를 살고 있었다.

“어차피 모두 일어난 뒤잖아요.”

사르티아 공작이 고개를 들어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아버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렇게 생각해 봤자 소용없어요.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인걸요.”

“발레린, 넌 내게 많이 서운하겠지?”

“어릴 땐 아버지께 많이 서운했는데 이제는 괜찮아요.”

“괜찮다고?”

“네, 아버지가 저를 싫어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해요.”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사르티아 공작이 멍하니 쳐다보자 발레린은 활기차게 말을 이었다.

“사실 아버지가 저를 싫다고 하셔도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기도 했고 이젠 그런 일에는 굳은살이 박여서요.”

사르티아 공작은 한참 동안 말없이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이 마냥 미소를 짓고 있자 사르티아 공작이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냐?”

“네! 그리고 아버지가 저를 싫다고 하지 않으시니 아까보다는 힘이 나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아는 진실이 참으로 달콤했다. 발레린이 여전히 환하게 웃자 사르티아 공작도 차츰 표정을 풀고서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약간의 침묵이 감돌았다. 사르티아 공작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어색하게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구나. 마침 일이 있어서.”

“네, 방문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사르티아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필요한 게 있으면 내게도 연락하거라.”

발레린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르티아 공작은 발레린을 잠시 보다가 이내 몸을 돌리곤 병실을 나갔다.

병실이 조용해지자마자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신나게 외쳤다.

“그로프, 너도 들었지?”

“뭘 말입니까?”

“아버지가 날 싫어하지 않는대!”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누가 주인님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래도 다들 내가 저주를 받았다고 싫어했잖아. 왕궁에서도 하인들이 피하기도 했었고. 물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니 다행이야.”

발레린은 빙긋 웃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은 활기차게 외쳤다.

“들어와.”

발레린이 말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순간 발레린은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왕자님?”

발레린은 갑자기 찾아온 제르딘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안 그래도 밝은 발레린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왕자님, 웬일이세요?”

제르딘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서둘러 말했다.

“공녀가 괜찮은지 걱정이 되어서요.”

“혹시 의사에게 듣지 않으셨나요? 제가 전보다 더 건강해졌다고요.”

“들었긴 한데 직접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르딘은 한 걸음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직접 보고 싶어서 왔다고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연스레 발레린 옆에 있는 의자에 앉고는 발레린을 살폈다.

하늘빛 눈동자가 발레린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발레린은 세세히 달라붙는 그의 눈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왕자님도 이런 기분이었나.’

물론 발레린은 관찰당하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발레린이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제르딘이 말했다.

“아픈 곳은 없습니까?”

발레린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은요?”

“네?”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발레린은 시계를 쳐다봤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원래 이맘때쯤 되면 발레린의 배는 시계처럼 고프다고 징징거렸다.

“이상하네. 지금은 배가 안 고파요.”

발레린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순간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너무 강한 독을 먹어서 그런가 봐요. 오히려 아직 활기가 넘치기도 하고요.”

발레린이 웃으며 말하자 제르딘도 입꼬리를 올렸다. 발레린은 그 모습이 어디선가 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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