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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96화 (96/130)

96화

발레린은 루네스의 손을 차분히 잡으며 침착하게 물었다.

“그런데 독을 누가 넣었는지 밝혀졌어?”

“우선 저는 독을 넣지 않았고 요리사들도 모르는 일이래요. 그나마 제가 의심이 가는 건 평소 왕자비님께 인사를 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게 누군데?”

“예전에 왕자비님이 얼마나 오래 버틸지 내기를 했던 사람이에요. 물론 그 사람은 왕자비님이 금방 나갈 것이라는 쪽에 건 사람이었고요.”

“그럼 그 사람이 배도스 공작 사람이겠네.”

발레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네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 사람은 무슨 일을 저질러도 그렇게 심하게 벌을 받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주변에서 은근히 소문이 돌았어요. 배도스 공작님이 봐주는 게 아니냐고 말이에요.”

“그럼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어?”

“지금은 왕자님께서 나서셔서 한창 조사받고 있을 거예요. 나머지 사람은 저같이 왕궁에 있으면서 대기하고 있고요.”

그때 그로프가 속삭였다.

“주인님, 생각보다 왕궁이 많이 썩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 책에서 본 왕궁의 실체와 똑같아. 권세를 잡은 사람이 제 사람을 심어 놓고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말이야.”

그로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16번이나 정독한 『천년 왕국사』를 떠올리며 말했다.

“난 왕자님이 계셔서 그나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썩어 있었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발레린은 더 마음이 쓰였다. 괜히 배도스 공작 때문에 제르딘의 일이 더 늘어난 것이다. 거기다 수습할 일까지.

거기다 여러 가지 얽힌 일 때문에 제르딘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도 덮어둬야 했다. 그 사실에 발레린은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루네스가 놀라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왕자비님?”

“너무 화가 나서.”

안 그래도 머릿속에는 활기가 넘쳤는데 이렇게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몸속이 답답할 것 같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루네스는 급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병실 문이 살짝 열렸다. 문틈으로 익숙한 사람이 보였는데 발레린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아버지?”

사르티아 공작이었다. 결혼 후에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발레린의 친아버지였다. 루네스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침대에 앉아 있던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그 소리가 울리자마자 사르티아 공작은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발레린은 곧장 그로프를 가리켰다.

“제 옆에 항상 있어 준 독 개구리 그로프예요. 손으로 만지지만 않으면 괜찮으니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발레린이 미소를 짓자 사르티아 공작은 큼큼 기침을 하며 침대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발레린이 여전히 일어서서 쳐다보자 사르티아 공작이 말했다.

“발레린, 그만 앉지 그러냐?”

“너무 놀라워서요.”

“뭐가 말이냐?”

“아버지는 한 번도 제게 먼저 찾아오지 않으셨잖아요.”

“그건 네가 저주에…….”

“그러고 보니 저를 만날 때 방독면을 쓰지 않으신 것도 처음이에요.”

발레린은 멍하니 사르티아 공작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르티아 공작은 옅은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내가 그동안 너에게 많이 소홀한 건 미안하구나. 모두 내 잘못이야. 해인저 부인을 믿어서도 안 되었는데.”

“어머니 무덤에는 가 보셨나요?”

사르티아 공작이 고개를 들자 발레린은 다시 말했다.

“어머니께 미안하지 않으세요?”

“그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해인저 부인과 결혼하셨잖아요.”

“그건 내가 해인저 부인에게 깜빡 속아서 그랬던 거고…….”

“그래서 어머니 무덤에 가셨나요?”

사르티아 공작은 말없이 발레린의 시선을 피했다.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종알종알 말했다.

“전 해인저 모녀가 죗값을 모두 치른 뒤에 어머니의 무덤에 갔었어요. 그곳에서 이제 어머니께 편히 쉬라고 말씀드렸어요. 저와 어머니의 억울함이 모두 풀리던 날이었거든요.”

“미안하구나, 발레린. 그땐 내가 시간이 없어서…….”

사르티아 공작의 얼굴은 꽤 난처해 보였다. 발레린은 갑자기 아버지가 왜 찾아왔는지 의문이었다. 여태껏 얼굴도 비치지 않다가 대체 왜?

16. 복잡한 진심

발레린은 사르티아 공작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아버지, 무슨 일 있나요?”

“무슨 일이라니?”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신 게 이상해서요.”

사르티아 공작이 어색하게 웃었다. 발레린은 아버지의 얼굴을 세심히 보다가 물었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건가요?”

“무슨 일이라니. 없단다.”

“그럼 대체 왜…….”

사르티아 공작은 작게 헛기침을 한 뒤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그로프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거리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로프는 발레린의 어깨 위에 뛰어올라 작게 속삭였다.

“주인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왜?”

“여태껏 한 번도 방문하지 않다가 갑자기 이렇게 온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저분의 표정이 무척이나 어색합니다.”

발레린은 사르티아 공작을 돌아봤다. 그는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발레린이 고개를 기울이며 뚫어지게 쳐다보자 사르티아 공작이 말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오히려 제가 가진 것보다 강한 독을 먹으니까 몸이 더 좋아졌어요. 의사 말로는 보충제를 먹은 것과 비슷하대요.”

사르티아 공작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잠시 아버지를 보다가 물었다.

“혹시 어머니도 이랬었나요?”

“어머니?”

“어머니는 무척이나 강력한 마법사였잖아요. 그리고 제가 태어났을 때도 저주가 아니라 행운이라고 말씀하셨고요.”

사르티아 공작의 얼굴에서 어색한 기운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너희 어머니도 어렸을 때 특이한 저주를 받았지.”

“특이한 저주요?”

“시든 꽃을 살리는 저주였단다.”

“시든 꽃을 살리는 건 저주가 아니라 축복받은 능력이잖아요.”

“하지만 사람이 손에 닿으면 화상을 입을 정도로 몸이 뜨거워졌단다. 그래서 어렸을 땐 가족들이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고 하더구나.”

“그럼 언제 어머니에게서 그런 저주가 사라졌어요?”

“다섯 살 이후에 그런 저주가 사라지고 오히려 몸속에 있는 마력이 강해졌다고 들었다.”

발레린은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발레린에게 이런 이야기는 조금도 해 주지 않았다.

발레린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저한테 이런 이야기는 해 주시지 않았는데.”

“아마도 너를 위해서 그런 것 같구나.”

“저를 위해서요?”

사르티아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를린은 원래 그런 사람이지. 오히려 네가 그 나이가 되도록 저주가 사라지지 않았으니 실망할까 봐 말을 하지 않았을 거다.”

사르티아 공작의 얼굴은 생각에 빠진 듯 약간은 멍한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어릴 때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문득 제 숨결에도 시들지 않고 살아온 노란 튤립이 떠올랐다.

“그럼 노란 튤립에 어머니의 능력이 보존되어 있는 걸까요?”

“노란 튤립?”

“어렸을 때 제 숨결에도 유일하게 죽지 않은 식물이거든요. 어머니도 신기해서 그걸 제게 남겨 주셨고요.”

“나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라를린이 만약 손을 썼다면 그럴 거다. 어쨌든 라를린은 훌륭한 마법사였으니까.”

그 말에 발레린은 속에서 울컥 올라올 뻔했으나 겨우 참았다. 노란 튤립마저 모두 시들어 버렸다면 발레린은 많이 절망했을 것이다. 제 옆에 오기만 하면 다들 죽고 없어졌으니 그로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나마 노란 튤립이 발레린의 희망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리기 직전이었다.

어깨 위에서 개꿀개꿀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이 내려다보자 그로프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그런데 사르티아 공작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입니다.”

발레린은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사르티아 공작을 쳐다봤다. 사실 발레린도 처음이었다. 이렇게 대화를 오래 나눈 것도, 사르티아 공작이 발레린을 찡그린 얼굴로 보지 않은 것도 처음이었다.

발레린이 물끄러미 보고 있자 사르티아 공작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그러느냐?”

“아버지가 저를 이렇게 오래도록 보고 있던 적이 처음이잖아요.”

“그건…….”

“그나저나 아직 대답해 주지 않으셨어요.”

“뭘 말이냐?”

“저를 왜 보러 오셨는지요.”

사르티아 공작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사실 그동안 너에게 미안했단다. 어쨌든 내가 널 탑에 방치한 건 맞으니까.”

“…….”

“그래서 널 찾아올 엄두가 나지 않았어. 미안하긴 했지만 갑자기 찾아오면 괜히 널 이용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발레린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믿기지 않았다.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아버지인지도 헷갈렸다. 이전의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모습에 발레린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사르티아 공작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그리고 어쨌든 네가 독을 먹고 병중에 있으니 내가 오는 건 당연하잖니.”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버지 맞으세요?”

사르티아 공작은 당황한 듯 발레린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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