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록빛 저주의 공녀님-95화 (95/130)

95화

그때 루티스 백작이 조심스레 말했다.

“제 생각에는 지금 발레린 공녀를 건드는 것보다는 그 왕국의 청혼서를 꺼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왕자가 아예 칼을 꺼내 든 것 같아서요.”

모두의 시선이 루티스 백작에게 향했다. 그중에서 겔렌트 남작의 시선이 제일 날카로웠다.

“루티스 백작님, 아까부터 왜 이렇게 제 의견에 반대하시는 겁니까?”

“반대가 아니라 이 방법이 가장 우세할 것 같아서야.”

“지금 제 의견을 무시하는 겁니까?”

“무시라니. 지금 누구 앞에서…….”

“그만하게.”

배도스 공작의 한마디에 주변에 조용해졌다. 배도스 공작은 눈썹을 찌푸린 채 탁자를 노려보기만 했다. 다른 귀족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가만히 있었다. 그는 하인이 가져온 얼음을 소리 내며 씹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아예 정공법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겔렌트 남작이 잽싸게 물었다.

“그럼 발레린 공녀를 내치기 위해 준비를 할까요?”

“아니, 그건 이미 했던 방법이라서 안 통할 수 있어. 차라리 우리가 만든 청혼서를 건드는 게 낫겠지.”

배도스 공작의 눈빛에는 독기가 흘러넘쳤다.

발레린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에 더 누워 있기에는 답답한 데다 이상하게 활기가 넘쳤다. 전보다 머릿속이 빠르게 잘 굴러가는 것 같았다.

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은 활기차게 말했다.

“들어와.”

병실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흰색 옷을 입은 의사가 방문했다.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오히려 전보다 더 몸이 좋은 것 같아요.”

의사는 신기한 듯 발레린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사실 놀랍긴 합니다. 원래 이런 독이라면 생명을 위협할 정도인데 오히려 왕자비님은 전보다 기력을 더 회복하셨으니까요.”

“그러게요. 오히려 강한 독을 먹어서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왕자비님께서 가진 독이 외부에서 들어온 독으로 기력을 충전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럼 제가 먹은 독이 보충제였네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도 기쁜 듯 개꿀개꿀 울었다. 의사는 약간은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의사를 관찰하다가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의사는 한 시간마다 방문하는 듯 보였다.

“원래 이렇게 자주 방문하시나요?”

“왕자비님이 독에 의해 의식을 잃으셨으니 저희가 더 세심하게 봐야 합니다.”

“하지만 이제 멀쩡해서 자주 방문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닙니다. 적어도 3일 동안은 왕자비님의 몸 상태를 지켜봐야 합니다.”

발레린의 의아하게 쳐다보자 의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사실 왕자님께서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왕자님이요?”

“네, 왕자님께서 왕자비님의 상태를 자주 보고하라고 하셨고…….”

“하지만 전 멀쩡하잖아요. 그러니까 왕자님께 저를 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해 주세요.”

발레린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의사는 입을 닫았다. 옆에 있는 그로프도 의사를 빤히 쳐다봤다. 의사는 멋쩍은 듯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주변에는 잠시 조용한 분위기가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발레린이었다.

“안 그래도 배도스 공작 쪽에서 일을 칠 것 같았는데.”

뻔히 예상된 상황에 발레린은 오히려 활짝 미소를 지었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마터면 주인님께서 큰일을 치르실 뻔했습니다. 주인님이 깨지 않아서 정말 걱정 많이 했습니다.”

“고마워, 그로프. 안 그래도 내 옆에서 계속 울었다면서.”

“네, 주인님이 제 목소리에 자주 정신을 깨시니 제가 계속 울면 주인님이 일어나실 것 같았습니다.”

어느새 그로프의 눈에 눈물이 스멀스멀 고이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손으로 그로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로프, 이제 나 멀쩡하니까 괜찮아.”

발레린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입니다. 주인님보다 독한 독에도 죽지 않아서요.”

“그러게. 오히려 더 생생해졌다니까!”

발레린은 배도스 공작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피곤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상쾌했다. 이전에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묘하게 피곤했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정말 주인님 말대로 배도스 공작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그러게. 나한테 이렇게 독을 먹일 줄은 몰랐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발레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문득 어딘가 허전했다. 발레린은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봤다.

“뭘 찾으시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까 루네스가 안 보이는 것 같아서. 혹시 루네스 못 봤어?”

“한 번도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는 주인님 옆에서 울다가 어두운 곳에 갇혀 있긴 했지만.”

발레린은 루네스가 이런 일에 가만히 있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누워 있는데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발레린은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 침대 옆에 있는 설렁줄을 당겼다. 그러자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낯선 의사가 들어왔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 몸은 불편하지 않은데 루네스를 보고 싶어서.”

“루네스라면 왕자비님의 전용 하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론 왕자비님의 전용 하녀는 지금 조사관에게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조사를 받고 있다고?”

“네, 현재 왕자비님께 음식을 갖다 준 하녀는 물론 음식을 만든 사람까지 모두 격리되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루네스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의사는 난처한 듯 고개를 숙였다.

“혹시 루네스가 어디 있는지 알아?”

“제1 수용소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발레린이 말했다.

“거긴 1급 살인범만 가두는 곳이잖아. 거기다 아직 사실이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그곳에 있다고?”

제1 수용소는 왕국의 질서를 어지럽힌 극악한 범죄자를 가두는 곳이었다. 발레린이 숱하게 봐 온 『매시드 왕국에서 벌어진 기이한 살인 사건』에서 주로 나왔던 감옥이었다.

“아마도 배도스 공작님이 이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그렇게 지시를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왕자님께서 조사권을 다시 받으셔서 단독으로 이 사건을 맡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나마 듣던 소리 중 반가운 소리였다. 하지만 발레린은 여전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제1 수용소라니.’

책에서 본 제1 수용소는 쥐와 온갖 벌레가 득실거리는 더러운 곳이었다. 거기다 건물은 낡아 빠져서, 그곳에 있는 것조차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상태가 안 좋다고 했다.

물론 발레린은 실제로 어떤지 궁금하긴 했지만 루네스가 그곳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했다.

발레린이 심각한 얼굴로 있자 의사가 급하게 물었다.

“왕자비님,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아니, 몸은 괜찮아.”

“그럼…….”

“난 괜찮으니까 나가도 좋아.”

발레린이 밝은 목소리로 말하자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인사를 하고는 병실을 나갔다.

발레린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로프, 루네스에게 가 보자.”

“주인님, 그래도 조금 쉬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몸에 너무 활기가 넘쳐서 어디라도 돌아다니고 싶어. 그리고 아무래도 루네스가 걱정되어서.”

“루네스는 이 일을 잘 헤쳐 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때도 혼자서 배도스 공작을 의심했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직접 보고 이야기해야겠어. 사실 나도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거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활짝 열렸다. 발레린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루네스?”

루네스는 벅찬 얼굴로 발레린에게 달려왔다.

“왕자비님, 괜찮으세요?”

“난 괜찮은데. 넌 괜찮아? 아까 나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제1 수용소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그 말에 루네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다행히 왕자님께서 힘써 주셔서 이번에 연관된 사람들은 모두 왕궁에서 대기하면서 조사를 받기로 했어요. 왕궁을 떠나지 못하는 조건으로요.”

“조사는 받았어?”

“네, 아마 제가 제일 먼저 조사를 받았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정말 왕자비님의 음식에 독을 넣지 않았어요. 다만 제 죄는 왕자비님의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검사하지 않은 거고요.”

“어차피 나는 독을 먹어도 멀쩡하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루네스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왕자비님께 더 소홀히 한 것 같아 죄송해요.”

루네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루네스, 난 괜찮아. 오히려 그 독을 먹어서 몸이 더 좋아졌어.”

“정말이세요?”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독을 먹고 나서는 내 몸을 더 잘 알게 됐어. 나보다 강한 독을 먹어도 내가 죽지 않고 더 건강해진다는 거.”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왕자비님이 무사하시지 않았다면 저는 제 목숨도 부지하지 못했을 거예요.”

루네스의 손은 옅게 떨리고 있었다. 확실히 이번 일로 많이 놀란 듯 보였다.

1